라. 독무덤
독무덤은 시신, 또는 유골을 독이나 항아리에 넣어 땅 속에 매장하는 장법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처음 나타나 원삼국기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된 묘제이다. 한반도에서 최초의 독무덤 분포지라고 할 수 있는 금강유역의 유적에서는 바닥에 구멍을 뚫고 곧추 세운(直立) 항아리에 돌뚜껑을 씌운 외독무덤(單甕式)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이음독무덤(合口式)이 주류를 이루며 드물게나마 세 개의 독을 이어 맞춘 三甕式도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독무덤은 앞서 금강유역에서와 같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을 빼고는 대부분 청동기문화가 쇠퇴하고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룩된 묘제로 생각된다.
그 분포는 앞서 널무덤에서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이들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묘제가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실제로 몇몇 유적에서는 이들 무덤이 한 지역에 섞여 있어 그러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강서 태성리와0243) 은율 운성리0244)에서는 각각 5기의 독무덤이 주변의 널무덤 등 다른 종류의 무덤들과 함께 조사가 이루어졌다. 지표에는 봉토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모두 두 개의 독이나 항아리로 이어진 이음독널이었다. 여기에서 별다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花盆形土器와 같은 독널로 쓰인 토기의 성격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 즉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단계에 이루어진 어린아이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이 밖에 황해도의 안악 복사리0245)와 신천 명사리0246) 등지에서도 독무덤들이 널무덤 등과 함께 조사된 바 있으나 그 성격은 앞서 이 지역에서의 다른 독무덤들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유역에서는 부여 송국리유적에서0247) 1기가 조사되었고 공주 남산리에서도0248) 송국리식토기를 사용한 독널 3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독널은 둥그렇게 구덩이를 파내고 그 안에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토기를 세워 묻었는데 바닥에는 지름 3㎝ 가량의 구멍을 뚫었고 위에는 돌뚜껑(石蓋)을 씌웠다.
남산리의 독무덤들은 둘레에 퍼져 있는 널무덤의 사이사이에 이루어져 있었다. 그 시기도 널무덤과 마찬가지 송국리시기에 해당되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독무덤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영산강유역에서 조사된 독무덤유적으로 光州 新昌洞유적0249)을 들 수 있다. 구릉상의 대지에 넓게 이루어진 무덤들 가운데 53기를 발굴하였는데 외독널과 삼옹식 각 1기를 빼고는 모두가 이음독널이었다. 독널의 크기는 60∼70㎝가 가장 많았으나 45㎝의 작은 것도 있었고 가장 큰 것은 130㎝에 이르며 대부분 동-서로 길게 묻혀 있었다. 이처럼 크기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이들 무덤은 성인용의 洗骨葬이라기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매장시설로 믿어진다.
부장품으로는 후기 민무늬토기에 해당되는 단지와 목항아리 외에 쇠조각 1점이 출토되었고 둘레에서는 청동제의 칼자루끝장식(劍把頭飾)과 돌도끼·돌살촉·숫돌·쇠조각들이 채집됨으로써 이 유적이 청동기시대의 최말기인 기원 전후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독무덤의 전통 위에서 그 뒤 원삼국기 말에 이르러 활발히 이루어진 이 지역 특유의 큰독널문화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0250)
낙동강유역에서 이 시기의 대표적 독무덤유적으로는 김해 회현동0251)과 지내동유적0252)을 들 수 있다. 회현리의 독무덤은 이 곳 조개더미의 동쪽 정상부 둘레에서 고인돌·돌널무덤·움집터와 함께 3기가 조사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음독널로서 이 가운데 3호 독널의 아가리 이음새 밑에서 碧玉製의 대롱옥 2점과 한국식동검 2점, 새기개 8점이 출토되었다. 독널은 일본 야요이(彌生)시대의 전기 말쯤에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여 조개무지의 생성연대보다 다소 이른 기원 전후에 이루어진 유적으로 생각된다.
지내동의 독널은 황갈색의 후기 민무늬토기와 회청색연질토기를 맞물린 이음독널인데 바로 옆에서는 일본 규슈지방에서 흔히 나오는 야요이식의 붉은간토기(紅陶)가 출토되어 당시 한·일간에 이루어진 교류관계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낙동강 하류지방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해서 이루어진 이들 독무덤의 전통은 이후 원삼국기를 거쳐 삼국시대까지도 계속된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이르면 독립된 무덤으로서보다는 딸린무덤(陪塚)으로서 일부 지역에서만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池健吉>
0243) |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앞의 책(1959a), 70∼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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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 리순진, 앞의 글(1974a). |
0245) | 전주농,<복사리망암동 토광무덤과 독무덤>(≪고고학자료집≫3, 1963), 91∼101쪽. |
0246) | 도유호,<신천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대하여>(≪문화유산≫1962-3). |
0247) | 姜仁求 외,≪松竹里≫Ⅰ(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1979), 97쪽. |
0248) | 尹武炳, 앞의 글(1987). |
0249) | 金元龍,≪新昌洞甕棺墓地≫(서울大 考古人類學叢刊 1, 1964). |
0250) | 池健吉,<先史時代篇-總說>(≪全羅南道誌≫2, 全羅南道誌編纂委員會, 1993), 22쪽. |
0251) | 榧本杜人,<金海貝塚の甕棺と箱式石棺>(≪朝鮮の考古學≫, 京都;同朋舍, 1980), 68∼84쪽. |
0252) | 沈奉謹,<金海 池內洞 甕棺墓>(≪韓國考古學報≫12, 1982), 89∼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