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도작문화
우리의 농경문화의 중심 작목 중의 하나인 벼의 기원은 인도의 동부지방과 서아프리카지방으로 이해되고 있다.0416) 특히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동부와 운남지역에서 벼의 야생종이 발견되고 있으며 재배유적의 경우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요컨대 벼는 인도 동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중국의 화남지역과 화중·화북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벼의 종류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볍씨의 길이에 대한 너비의 비례에 따라 장립형(Indica)과 단립형(Japonica)으로 구분된다. 화남지방에는 장립형, 화중지방은 장립형과 단립형, 화북지방에는 단립형이 재배되었다. 벼는 원래 열대성 식물인데 한랭한 화중·화북지방으로 이식됨에 따라 장립형에서 단립형으로 변화해 간 것으로 본다. 한반도에 발견된 도작문화의 흔적은 기원전 10세기경의 평양 남경유적을 지역적 상한으로 하고 있다.0417) 이 지역에서는 23개의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36호 주거지에서 탄화된 곡립 5종류가 보고되었다. 그 내용은 벼·조·수수·기장·콩 등으로, 특히 벼의 확인은 그 위치 등에 의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발견된 볍씨는 장폭비율이 1.88(길이 4.5㎜:너비 2.5㎜)로 단립형에 속한다.
한편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유적에서도 볍씨의 존재가 확인되었다.0418) 볍씨의 장폭 비율은 1.50 내외로서 단립형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동일지역 채집 시료에 대한 우리 나라와 일본측의 측정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나무나이테측정법에 의한 보완연대는 기원전 13∼12세기까지 소급된다.0419) 또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탄화미가 발견된 곳은 부여 송국리유적이다.0420) 이 유적도 흔암리유적처럼 해발 40m 이내의 구릉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대규모 취락지역으로 제54지구 1호 주거지, 제50지구 2호 주거지에서 탄화된 볍씨와 토기편에 볍씨자국이 남겨진 것 등이 발견되었는데 장폭비율이 1.79로서 단립형이었다.
이와 함께 전남 나주 다시면 가흥리의 영산강 강안에서도 벼가 채취되었다. 화분분석에 의거해0421) 볼 때 이 벼는 이미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 벼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하고, 기원전 1천년기 전반에는 중남부지방에 벼농사가 정착되어 차츰 잡곡농사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22) 한편 이외에도 합천 봉계리 선사유적과 전남 소산리·반곡리유적 등지에서 볍씨편이 보고되고 있어 광범위하게 벼재배가 진행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0423) 또한 김포군 가현리의 니탄층에서 쌀·조 등이 출토되었는 바 그 탄소연대 측정치가 기원전 2천년에 상당하는 연대치가 나왔으며0424)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송포면 가와지유적의 토탄층에서도 탄화미 4립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의 연대치도 기원전 2천년대로 나와 그 상한연대가 점차 상승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0425) 이같은 사실은 경기도 강화군 우도에서 신석기토기 겉면과 조각 사이에 낀 볍씨자국과0426) 경기도 파주군 도척면 궁뜰에서 채집된 무문토기 밑바닥의 볍씨자국이 장립형으로 이해됨에 따라 종래 한반도의 볍씨는 단립형만이 있다는 견해를 비판하는 입장과0427) 함께 이 지역 일대가 우리 나라 도작의 선착지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0428)
이상의 자료들은 한반도 농경문화 시작과 함께 도작문화의 시기도 신석기시대까지 올려 볼 수 있게 한다. 즉 신석기시대에 벼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이들 유적의 내용은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도작은 구체적인 벼재배 기술이 전제된 농업 생산방식이 전제된 것으로 단지 벼가 검출되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향후 계속된 검토를 통해 연구될 사안이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내용은 기왕에 알고 있던 시기보다 앞서는 곡물로서의 벼가 존재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한편 한반도 도작문화의 전파경로에 대해서는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 서북부로 연결되는 경로를 강조하는 육로전파설과 황해를 통한 해로전파설 및 양지역 동시전파설 등으로 나뉘어지고 있다.0429) 그런데 벼의 자연생장 가능지역이 한반도 중북부를 넘지 못하고 있는 점과 대부분의 도작 관련유적이 이 지역과 일치하고 있으며≪三國志≫등 관련 사료에서도 삼한지역에 ‘도작’과 관련한 기사가 특기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도작이 한반도 중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생업경제의 중심 작목으로서의 의미를 확보하였다고 이해된다.0430)
이같이 도작의 전파경로에 대한 3가지 견해는 모두 그 근거로서 관련 유물, 특히 반월형석도·유구석부·토기문화 등의 요소, 그리고 탄화미 및 볍씨자국에 의한 품종논의 등이 연결되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특히 농업생산 및 사회발전의 양상 등을 이해하는 요소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계속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동물뼈에 대한 보고는 개와 돼지를 중심으로 보고되고 있다.0431) 그러나 이들 뼈가 사육을 통해 식량으로 활용된 짐승으로는 보기 힘들다. 이는 당시의 경제생활이 가축을 사육한 단계로 이해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0432) 토양의 성질에 따른 부식이 예상될 수도 있지만 기왕의 유적에서 나타난 생활상은 가축사육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히려 화살촉 등과 같은 유물의 존재는 가축사육의 가능성보다는 수렵을 통한 동물자원의 획득이 예상된다. 가축사육이 농경에 선행한다는 기왕의 통속적 관념은 이미 부정되었듯이0433) 대부분의 무문토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화살촉의 존재는 수렵 및 어로활동을 통한 주요한 동물성 단백질 획득의 수단이었다고 이해된다. 또한 방추차의 존재가 역시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점은 이 시기 농경과 아울러 방직의 기술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다량의 방직과 관련된 도구가 있다는 것은 야생의 식물뿐 아니라 방직에 필요한 식물의 재배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발굴 조사된 유적을 통해 청동기시대 사회의 경제생활을 보면 신석기문화 단계의 채집경제 양상과는 완전히 구분된 생산경제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래의 약탈경제 단계의 생계양식이 재생산경제 구조로 재편되어 안정적인 식량자원의 확보를 통한 정착생활과 잉여에 의한 소유차 및 사회집단 구성의 변화 등 앞서의 사회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문토기가 주로 구릉지대에 분포한다는 점이나 이와 수반하여 몇 가지 고고학적 유물이 함께 출토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상황의 종합적 결론이 농경의 존재를 확인케 한다는 사실은 다분히 농경의 기원지가 구릉지대임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구릉지대가 농경에 가장 적합하다는 견해는0434) 널리 알려진 사실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폭넓은 원시농경이 이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0435) 이러한 전반적인 농업활동을 극명하게 묘사한 자료로서 대전 괴정동 출토로 알려진 農耕文靑銅器를 들 수 있다.0436) 이 유물에 묘사된 당시 농경활동의 양상을 보면 따비로 밭을 일구는 모습과 괭이로서 땅을 일구는 모습, 그리고 수확된 농산물을 흑도같이 생긴 용기에 보관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 파손된 나머지 부분에는 아마도 씨뿌리는 모습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결국 전반적인 농업활동을 묘사하여 모든 농업활동이 원활히 진행되기를 희구하는 내용의 의식용구였다고 이해된다.
한편 무문토기를 사용한 주민들의 경제양상은 농경과 함께 앞서 지적되었듯이 화살촉이나 어망추 등의 존재를 통해 수렵·어로도 함께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농경생활의 보조적 경제활동으로 자연환경과 기후의 변화가 주는 영향하에서 그러한 생활형태가 나타났다. 이는 복합적 경제활동의 일반적 현상으로서0437) 무문토기 유적지와 거주지에서 나타나는 화살촉과 어망추는 바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기호와 양식의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농경문제와 관련하여 ‘新石器革命’의 의미를0438) 우리 나라 선사고고학의 입장에서 재음미해 보면 이른바 중근동이나 서구의 발전단계와 우리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석기시대에 양식생산을 통해 새로운 경제양상을 이루었다는 관점의 신석기혁명의 의미는 한국사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에서 원시농경의 흔적을 확인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농경 발생의 기원이 이미 신석기시대에 시원을 갖는다는 차원의 문제이지 전적으로 생업경제를 논하는 각도에서 볼 때에 식량생산은 무문토기시대에 와서 성립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북아시아에 있어 중국의 신석기시대의 경제양상은 바로 식량생산의 단계로서0439) 우리와 다른 반면,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그 양상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점에 전반적 사회양상의 유사성을 발견케 된다. 청동기시대의 경우에도 일본의 야요이(彌生)문화는 우리와 밀접하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경제문제는 단순한 식량생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신석기혁명을 이룩하고 난 다음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대문명의 발생이 계기된다는 사실은 청동기라는 새로운 자원을 기반으로 한 사회가 형성된 것과 함께 식량생산을 통한 경제력의 엄청난 증대라는 사실이 전제된 것이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가 식량생산 단계를 거쳐 청동기문화 위에서 고대국가를 출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상술한 이유 때문이며 우리 나라와 일본의 고대사회 성립이 중국보다 늦은 이유는 신석기시대에 식량의 생산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청동기시대에 와서 생산단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0440)
0416) | 中尾佐助,≪栽培植物と農耕の起源≫(東京;岩波書店, 1973). |
---|---|
0417) | 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이 지역은 주위에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인 금탄리유적이 존재하는 곳으로 팽이형토기, 반월형석도, 석촉, 방추차, 숫돌, 돌돈, 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다. 이 곳의 14C 측정치는 기원전 999년을 보여준다. |
0418) | 서울대 박물관,≪欣岩里住居址≫4(考古人類學叢刊 8, 1978). |
0419) | 崔盛洛,<放射性炭素測定年代問題의 檢討>(≪韓國考古學報≫13, 1982). |
0420) | 姜仁求 외,≪松菊里≫Ⅰ(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1981). |
0421) | 安田喜憲 外,<韓國における環境變遷史と農耕の起源>(≪韓國における環境變遷史≫, 1980), 51∼52쪽. |
0422) | 池健吉·安承模, 앞의 글. |
0423) | 沈奉謹,<韓國 稻作農耕의 始源에 관한 硏究>(≪釜山史學≫6, 1982). ―――,<韓國 先史時代 稻作農耕>(≪韓國考古學報≫27, 1991). |
0424) | 임효재,<경기도 김포반도의 고고학적 연구>(≪서울大學校 博物館 年報≫2, 1990), 7∼13쪽. |
0425) | 한국선사문화연구소·경기도,≪일산 새도시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1992). 이융조·박태식·하문식,<한국 선사시대 벼농사에 관한 연구-고양 가와지 2지구를 중심으로->(≪省谷論叢≫25, 1994). |
0426) | 손보기,<우리나라 벼농사의 새로운 사실>(≪東方學志≫54·55·56, 延世大, 1987), 359∼367쪽. |
0427) | 손보기 외,<서해안 우도의 선사문화>(≪博物館紀要≫3, 檀國大, 1987). 손보기, 위의 글. 한편, 토기편에 남아 있는 볍씨자국은 토기소성시의 수축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원형이 변형될 가능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崔盛洛,≪海南郡谷里貝塚≫Ⅰ, 목포대 박물관, 1987). |
0428) | 林孝宰,≪韓國古代文化의 흐름≫(集文堂, 1992), 153∼161쪽. |
0429) | 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沈奉謹, 앞의 글(1991) 참조. |
0430) | 金貞培, 앞의 글(1971). |
0431) | 김신규,<우리나라 원시 유적에서 나온 포유동물상>(≪고고민속론문집≫2, 1970). 북한학계는 신석기시대부터 개·돼지 등이 가축으로서 사육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식량채집 단계인 당시 사회에서 이들을 사육하기 위해 소요되는 식료가 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식료보다 더 많다는 사실에 의해 이러한 가능성은 부정된다. |
0432) | 金貞培, 앞의 책(1974). |
0433) | Childe, V. G., Man makes Himself, London, Watt, 1936, pp.59∼86. |
0434) | Vavilov, N. I., Studies on the Origin of Cultivate plants, Bull, Appl. Bot., 16-2, 1926. Braidwood, R. J., The Agricultural Revolution, Scientific American, 1960. Sept. 3. |
0435) | 金貞培, 앞의 글(1971). |
0436) | 韓炳三,<先史時代 農耕文靑銅器에 대하여>(≪考古美術>112, 韓國美術史學會, 1971). |
0437) | Flannery, K. V., Archaeological systems theory and Early Mesoamerica, Anthropological Archaeology in the Americas, 1968, pp.67∼87. |
0438) | Childe, V. G., ibid, 1955. |
0439) | Chang, K. C.,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ina, Yale Univ., 1968. pp.159∼160. |
0440) | 金貞培,<靑銅器 文化-生業經濟>(≪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1973), 202∼20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