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1) 생업경제
(1) 생업
가. 농경문화의 시작
역사발전에 있어서 생산양식의 전환 즉, 기왕의 수렵·채집·어로 등 약탈경제적 생업경제 양상이 農耕에 의한 재생산경제 구조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반문화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0402) 이같은 변화의 내용이 자체 발전에 의한 것인가, 외부로부터의 기술유입에 의한 것인가, 또는 새로운 종족의 이동에 의한 것인가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0403)
그런데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성립은 단순한 發明·傳派의 차원이 아니라 주민의 移動이란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대부분 인류사의 커다란 문화적 변혁이 민족이동을 수반하고 있듯이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기반인 무문토기문화의 한반도 진입 역시 민족의 이동이 강조되고 있다. 이 이동의 양상도 여러 경우가 예상되는데0404) 기본적으로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와의 관련성이 상정된다.0405) 신석기문화인들의 주된 거주지역이 강변이나 해변인 데 반해 무문토기문화인들의 거주지역이 구릉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문화변화의 양상이 급격한 변화나 갈등의 경우와는 거리가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0406) 어쨌든 우리 나라 무문토기문화는 무문토기의 분포가 구릉지대라는 점, 그리고 농경과 관계있는 도구들이 반출되고 주민의 증가와 아울러 청동기를 사용하는 단계로의 전이 등, 이전에 볼 수 없는 특징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 현존하는 농경문화의 흔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유적이다.0407)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적으로 이 이전의 유적에서는 농경관련 유물 및 곡립 등을 확인하기 어렵다. 지탑리유적에서는 조 또는 피 등의 곡립이 확인되고 유물로서는 돌낫(石廉), 돌쟁기(石犁), 갈돌(展石), 돌도끼(石斧) 등과 둥근밑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0408)
한편 곡립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농경과 관련된 유물의 존재로 농경을 예상할 수 있는 유적으로서 평남 온천군 궁산리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석제가래(石楸), 사슴뿔가래(鹿角楸), 사슴뿔굴봉(鹿角掘棒), 뿔낫(猪牙製廉) 등의 유물과 둥근밑·평평밑의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가 함께 반출되었다고 한다.0409)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으로서 반월형석도와 돌낫 등의 농구가 발견된 것으로 평북 용천군 신암리유적이 있다.0410) 이 유적의 토기는 평평밑 및 손잡이 등이 있어 무문토기문화와의 접촉을 상정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 역사에서 농경문화의 시작은 신석기문화 후기부터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농경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괭이농사에서 보습농사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0411) 그러나 대부분의 즐문토기시대 유적에서는 유물의 조합에서 농경도구의 비중이 크지 않았듯이 농경이 전체 생계방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약하다. 따라서 이같은 내용은 단지 식료의 다양성이 증가한 수렵·채집경제 사회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같은 변화는 무문토기문화의 수용이라는 요인에 의해 나타났음이 주목된다.0412) 즉 무문토기문화의 수용을 통해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청동기문화의 기반문화로서 청동기문화 단계에서 본격적인 농업생산이 진행되게 되었다. 무문토기는 마제석기를 반출하거나 청동유물과 함께 반출되고 있어 기본적으로 청동기문화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무문토기의 분포는 거의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관계유물로서 유구석부와 반월형석도의 존재가 주목된다. 반월형석도는 수확용 도구로서 농경과 관련된 직접적 유물이란 점에서 신석기시대와 구별되는 생업경제의 변화상을 확인시켜 준다. 따라서 이들 유물의 전파경로와 분포양상을 통해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한반도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는 초기 농경의 경우 요령지방을 거쳐 육로를 통해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본다.0413) 중국 石刀의 출현은 仰韶文化와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데 장방형의 형태에서 점차 반월형으로 변화하였다.0414) 장방형석도의 경우는 조를 중심으로 하는 앙소문화의 전작농업과 관련된 도구로서 우리의 경우 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밭농사 중심의 지역적 내용과도 연결되고 있다. 한편 반월형석도의 경우 황하 하류와 산동성 및 양자강 하류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龍山文化의 내용과 연결되는데 용산문화의 경우 밭농사와 함께 도작농업도 행해졌음이 주목된다. 이 유형의 석도는 평안남도·황해도와 함께 한강유역을 중심한 한반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다.0415)
따라서 이상 유물의 분포양상을 통해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를 밝힐 수 있다. 즉 한반도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는 앙소문화가 요령지방을 거쳐 육로를 통해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연결되는 경로가 상정된다. 관련유적의 양상을 통해 확인되고 있듯이 초기 농경문화는 밭농사가 중심이 되었는데 조·피 등이 초기 작물이었고 수수·밀·보리·콩 등이 그 뒤를 이었다.
0402) | 金貞培,<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 1971;≪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4). |
---|---|
0403) | Kroeber, A. L., Anthropology, New York, Harcount, 1948, pp.344∼571. 문화의 변화에 대해 Kroeber는 Invention(발명), Diffusion(전파), Migration(이동)이란 요소에 의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 선사농경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池健吉·安承模,<韓半島 先史時代 出土 穀類와 農具>(≪韓國의 農耕文化≫1, 경기대 출판부, 1983). 林孝宰,<韓國 原始農耕文化의 展開>(≪韓國의 農耕文化≫3, 1991). 金秉模,<韓國 靑銅器時代 經濟>(≪韓國의 農耕文化≫3, 1991). 安承模,<한국 선사농경연구의 성과와 과제>(≪先史와 古代≫7, 韓國古代學會, 1996). |
0404) | Trigger, B. G., Beyond History:The Method of Prehistory,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1968, p.28. Trigger는 이동의 경우에도 크게 7가지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는데 완전히 주민이 교체한 것인지, 또는 후래자가 선주자의 근처에 거주하면서 동화된 것인지, 또 조직화된 이민이 들어온 것인지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
0405) | 金貞培,<韓國靑銅器文化의 史的考察>(≪韓國史硏究≫6, 1971). |
0406) | 金貞培, 앞의 책. |
0407) | 도유호·황기덕,<지탑리유적 발굴중간보고>(≪문화유산≫1957-5·6);≪지탑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8,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61). |
0408) | 도유호·황기덕, 위의 글. |
0409) | 도유호·황기덕,≪궁산리원시유적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2, 1957). |
0410) | 리순진,<신암리유적발굴중간보고>(≪고고민속≫1965-3). |
0411) | 서국태,≪조선의 신석기 시대≫(사회과학출판사, 1986). |
0412) | 金貞培, 앞의 글(1971). |
0413) | 金廷鶴,<經濟生活>(≪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171∼175쪽. |
0414) | 安志敏,<中國古代的石刀>(≪考古學報≫10,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1955). |
0415) | 金元龍,<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檀國大, 19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