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성
가) 무문토기문화의 사회구성
최근 무문토기문화의 독자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증가함에 따라 청동기시대와는 별도의 개념으로서 「무문토기문화」, 「무문토기문화기」, 「무문토기시대」 등의 개념을 사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0459)
이러한 무문토기문화는 ‘支石墓社會’라고도 할 수 있는데 농경이 가능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한반도의 광역을 문화권으로 하여 도작을 포함한 알곡농경의 실시, 고인돌의 축조, 마제석기의 성용, 무문토기의 사용, 정착취락의 건설 등으로 그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문화이다.
이 문화의 기원이나 또는 담당 사회집단의 출현에 대하여는 별로 연구된 바가 없다. 그것은 이 문화가 바로 청동기시대인들 문화라는 등식 때문에 청동기의 기원에만 연구가 치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선사문화의 올바른 복원을 위하여는 이러한 無文土器文化複合의 출현과 형성과정의 구명이 필수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그 기원과 출현 과정에 대하여는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나, 이 문화가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정착하여 1000년이 넘도록 농경정착 취락이 가능한 한반도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들어갔는 바, 명실공히 우리 나라 전통문화의 原形인 정착 취락 농경생활은 다름아닌 이 문화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무문토기문화의 사회적 성격과 그 구성에 대하여는 특히 그들의 무덤인 지석묘의 성격과 그 구조적인 양상을 통하여 논의되어 왔다. 그러한 사회구성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이 사회가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한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발전되어 갔다는 점이며, 그러한 과정을 어떠한 성격과 체계의 것으로서 인식하고 규정해야 하는가가 논의의 주안점이 될 것이다. 현재 이러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의 입장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지석묘를 통하여 본 무문토기문화의 사회는 그 성격상 平等社會(Egalitarian Society)라서 비록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능력에 따른 상대적인 富의 차이나 행위상의 영향력의 차이는 존재하였으나, 그러한 차이가 계급화를 거쳐서 제도화되고 그러한 제도화된 사회적 신분이 대를 이어서 세습되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관점이다.0460)
따라서 한반도의 곳곳에 독립적인 취락으로 남겨진 당시의 마을공동체에는 물론 마을마다의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그러한 우두머리가 마을을 대표하여 마을의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마을의 共同事를 관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장은 주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업무상의 권한을 수행하는 직임을 부여 받은 자로서 마을사람으로부터 원로나 대표자로서의 사회적 인정과 경제적 대우와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임의로 마을 사람들에게 행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치적인 특권이 자손에게 세습되는 그러한 신분의 소유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현재까지 나타난 고고학적인 문화내용에서 그러한 지배계급화된 신분이나 사회구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무문토기나 각종 마제석기의 일률적인 특색이나 취락 안의 주거지들의 평준화된 규모나 그 안에서 발견되는 물건들에서 특정권력에 상당하는 물적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간주하기 쉬운 거대한 上石을 지닌 지석묘의 경우도 자세히 관찰하면, 오히려 평등사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거대한 상석에 관계없이 그 밑의 매장부의 규모는 권력의 차이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일률적인 크기를 지닐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석기나 토기나 관옥 등의 부장품은 오히려 지석묘 안에 묻힌 자들 사이에는 신분의 격차가 없었음을 반증하여 주고 있다. 나아가서 그러한 지석묘가 당시의 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들의 무덤이라고 본다면, 한반도에 적어도 6만기 이상으로 추산되고, 전남지방만 국한하여도 16,000기가 넘는 것으로 확인된0461) 지석묘들이 모두 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들이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세계의 어느 선사사회에서 피지배자들의 무덤이 마치 전무한 것처럼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지배자 계급에 속한 자들의 무덤만 6만명 이상분이나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비실제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지석묘의 편만한 분포현상과 엄청난 숫자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매장부의 일률적인 규모와 부장유물의 성격, 그리고 거대한 상석들이 대체적으로 그 크기가 비슷하다는 사실 등은 그 안에 묻힌 자들이 지배계급에 속하는 소수층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거나 혹은 일반 사람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접받던 원로나 마을의 대표자나 혈연으로 구성된 친족사회에서 연장자나 가장의 무덤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설령 거대한 느낌을 주는 상석의 크기 차이가 사회적인 힘의 차이를 실제로 반영하였다고 하는 경우라도 이것은 당시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나 영향력이 커서 많은 사람의 동원이 가능한 경우거나 혹은 부잣집에서는 상석을 큰 것을 쓰거나 하부구조용의 판재를 다듬어 썼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만 못한 사람이나 집안에서는 보다 작은 상석을 쓰고 하부구조도 근사하게 조립하지 못하였던, 그러한 차원의 사회적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문토기-지석묘사회는 기본적으로 혈연친족으로 조직된 마을구성원 모두의 협동농경과 공동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취락생활을 영위하였던 호혜평등의 공동체사회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사회에서 가부장적 제도에 따른 가장이나 마을의 원로의 무덤으로서 지석묘가 등장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구성은 성격상 평등사회요, 체계상 가장이나 원로 신분의 마을대표자와 일반 마을사람들이라는 이원적인 사회구성을 지닌 사회로 규정이 가능하겠다.
한편, 지석묘를 통하여 무문토기사회를 계급사회로서의 族長社會(Chiefdom)로 보는 관점에서는 그 근거로서 지석묘 상석의 거대함이 나타내는 상징적인 권위와 그러한 거대한 상석을 들어올리기 위하여 수십 명 이상의 장정을 동원할 수 있었던 권력자의 존재를 거론하고 있다.0462) 이와 관련하여 무문토기 주거지들 크기가 일률적인 것처럼 보이고 마제석기와 토기 등의 유물에서 특수한 신분의 상징이 될 만한 특수품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취락에 속하는 주거지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차이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주거지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량의 차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는 바로 그 사회가 신분의 분화가 존재하였고, 그러한 신분의 존재는 농경생산물의 분배과정에서 점차 계급화되어 갔을 것이라는 근거에서 지석묘사회의 계급발생을 인정하고 지석묘사회가 언젠가는 계급사회로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0463)
즉 원래 무문토기-지석묘사회는 평등사회적인 단계에서 시작하였을지라도 농경생산량의 증가와 그 분배구조의 재편과정에서 당연히 신분의 분화가 나타나고 마침내 계급사회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양 입장이 어느 한편으로 결말을 보기 위하여는 지석묘뿐만 아니라 무문토기 취락 전체의 발굴을 통하여 그 취락의 구조로 반영되는 사회구성의 체계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0464)
다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근 1000년간에 걸쳐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발전되어간 무문토기-지석묘사회의 사회구성은 기본적으로 호혜 평등적인 농경취락 공동체였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한 호혜 평등의 사회체계를 통하여 농경생산력과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구증가와 함께 사회의 규모가 성장하여 갔고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대소규모의 새로운 사회가 분파하여 갔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내외적인 요인에 의하여 계급화된 사회구성체로 진전될 수 있는 사회적 잠재력을 키워나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잠재적 가능성이 어느 시기에 어떠한 구체적인 사회변동을 통하여 계급사회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는지는 앞으로 다수의 대소 취락들을 발굴하여 그 유적의 구조화 유물상에 대한 상대비교적 추론을 통하여 추적해 볼 과제이다.
나) 요령청동문화의 사회구성
요령청동문화를 역사상 고조선의 문화내용으로 간주하고 고조선에 대한 역사기록을 통하여 그에 해당하는 고고학적인 자료를 규정하는 방식이 특히 북한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0465)
그러나 고고학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지적해야하고 또 실제로 봉착하는 문제는 고조선이 국가의 면모를 이미 갖추고 난 뒤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묘사한 사회문화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수백 년 이상 걸쳐 성장 발전해 온 요령청동문화의 각 단계별 문화내용과 그 연속적인 전개과정을 하나하나 집어내기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어느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란 항상 그 문화의 시발부터 종국까지의 과정 전체 가운데 한 국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마지막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기록상의 내용들에 대조해서 상응시키는 발상과 태도는 실제로 전개된 문화의 양태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고학적인 자료에 대한 역사학적인 접근이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하며, 역사기록에 입각한 설명이 결코 고고학적인 자료의 성격과 사실을 직접적으로는 규명할 수가 없다는 점을 환기시켜야 할 것 같다.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요령청동문화의 사회구성을 복원하는 데에는 역시 무문토기-지석묘사회의 사회구성을 추정하는 것과 같은 자료의 한계가 나타난다. 우선 요령청동문화의 경우는 유적이 무덤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요령청동문화의 사회구성 문제는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의 성격을 통하여 파악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무덤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崗上墓와 樓上墓이다.0466)
이 무덤은 墓主의 커다란 무덤곽과 그 주위의 부장품곽과 순장 인골곽으로 구성된 積石石棺墓라는 무덤구조와 함께 신분의 상징인 다량의 각종 청동제품과 무기를 부장하고 있어 그 사회가 분명한 계급사회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덤의 주인공들이 청동검과 도끼와 활로 무장하고 기마를 행하던 강력한 무사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요령청동문화의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통하여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러한 각종의 청동제 무기는 당시 요령사회의 주민 모두가 습용하던 일상용품은 아니었다. 그리고 요령청동검을 위시한 각종 청동기가 매장된 요령지방의 대소 석관묘들은 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들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요령사회는 기본적으로 계급사회였으며 그러한 계급사회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서 청동기의 제작과 사용의 독점을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청동기가 등장하기 이전의 요령지방의 원주민은 청동기의 등장을 계기로 계급사회로 전환하였으며 따라서 요령청동사회는 시작부터 계급적인 성격을 지닌 사회구성체였다고 본다.
이러한 청동기의 소유에 대한 사회적인 독점과 발맞추어서 심화된 요령청동사회의 계급적 사회구성은 철기술의 도입과 대내외적인 정치적 요인에 의하여 일관성 있게 진화과정을 밟아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과 무사를 포함하는 지배관료계급과 일반평민층과 노예층이라는 4계급체제의 국가구조를 완성시켰으며, 그러한 최종적인 국가단계의 사회구성과 사회상에 대한 설명을 일부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그러한 계급화 과정의 초기단계는 강력한 무기를 포함하여 각종 청동기를 독점하여 기득권을 확보한 무사계급과 그에 속하지 못하는 일반평민층이라는 이원적인 사회구성이었으며, 여기에서 나아가서 무사계급 안에서 권력의 차등이 나타나고 그에 따른 위계가 수립되고 일반평민층안에서도 계층화가 심화되어 노예층까지 분리되는 계급화의 확대 편성과정을 거쳐 국가체제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요령동문화는 청동기 자체가 다름아닌 계급화의 動因이 됨으로써 처음부터 계급사회로 출현하여 자체 발전적으로 국가체제로 완성되어갔으며, 무문토기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역동적인 과정을 시간적인 흐름에 맞추어서 복원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다) 한국식청동문화의 사회구성
한국식청동문화는 기존의 무문토기사회의 농경생활과 정착 취락생활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무문인들이 사용하던 심발형무문토기 등의 토기와 유구석부나 반월형석도 등의 마제석기도 사용하였다. 한편 이들은 요령청동문화의 청동검과 거울이나 도끼 등의 청동이기를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며, 무덤으로는 무문인들의 토착묘인 지석묘 대신 요령청동사회의 석관묘전통을 채택, 사용하였다.0467)
한반도 안에서의 한국식동검문화의 태동은 요령청동문화의 한반도 이주를 통한 토착무문인들과의 융합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과정은 강력한 청동무기로 무장하고 기마에 능하고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사회구조와 생활습관을 지닌 요령청동인들이 한반도의 무문농경사회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서 그들과 하나의 복합사회를 이룩하면서 농경민화되어간 것으로 보인다.0468)
그리하여 새로운 농경복합사회에서 지배자계급으로 군림하게 된 청동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전투와 생존에서 필수불가결한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였던 무기를 더욱 호사스럽고 세련된 수준으로 변신시킴으로써 신분과 권력의 상징구로서 패용하였다. 한국식동검문화의 청동기가 요령청동기들보다 더욱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안에서 새롭게 상승시킨 신분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위 요령식청동 유물조합에 비하여 한국식청동기 조합에 속하는 동검과 정문경과 각종 의례용 청동기들의 수준과 기능상의 특징이 전자에 속하는 마구부속품을 위시한 각종 실용적인 무기류와 비교할 때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단지 요령청동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하여 후자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점진적 논리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격한 변화의 배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이나 역사적인 사건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요령청동인들은 한반도에 들어와서 마주치는 무문인들과 융합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의 사회를 이룩하였고, 그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한 후에 순전한 농경민화되어 갔으며 그 결과 기마를 이용하여 실전에서 사용하였던 청동기들도 농경지대인 한반도 안에서는 점차 그 실효성이 줄어 단지 그들의 출자와 신분의 상징구로서 점차 비실용적인, 그러나 훨씬 더 정교하고 높은 수준의 사회적 도구로 변모되어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반도 안에서는 바로 이러한 한국식청동문화의 단계에서부터 본격적인 계급적 복합사회가 이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평등적인 성격의 무문토기사회와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적 성격의 청동기사회가 병존하였으며, 소위 세형동검 유물조합이 출현하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하여 요령청동 문화집단의 한반도 진출을 계기로 하여 두 사회가 융합함으로써 한반도 최초의 계급적 복합사회인 한국식청동문화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식청동문화 사회는 곧 철기를 수용하면서 ‘국가’라는 ‘계급사회의 완성’을 향하여 급속하게 발전하여갔던 것이다.
0459) | 尹武炳,<無問土器 形式分流試考>(≪震檀學報≫39, 1975). ―――,≪韓國墓制의 變遷≫(忠南大 人文科學論叢 Ⅱ, 1975). 西谷正,<朝鮮考古學の時代區分について>(≪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考古學論考, 平凡社, 1982), 873∼892쪽. 盧爀眞, 위의 글(1987), 755∼767쪽. ―――, 위의 글(1992), 9∼33쪽. 李白圭,<漢江流域 前半期 민무늬토기의 編年에 대하여>(≪嶺南考古學≫2, 嶺南考古學會, 1986), 31∼58쪽. 安在皓,<松菊里類型의 檢討>(≪嶺南考古學≫11, 1992), 1∼34쪽. 鄭漢德,<嶺南地域 無文土器文化에 관한 몇가지 問題>(≪伽耶考古學論叢≫1, 伽耶文化硏究所, 1992), 1∼28쪽. 河仁秀,<嶺南地域 支石墓의 型式과 構造>(≪伽耶考古學論叢≫1, 1992), 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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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0) | 盧爀眞, 앞의 글(1987), 755∼767쪽. Bong Won Kang, A Reexamination of Korean Megalithic Tombs and Social Organization, Paper Presented at the 57th Annual Meeting for the Society for American Archaeology, Pittsburgh, Pennsylvania, April 8-12, 1992. |
0461) | 李榮文,≪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韓國敎員大 博士學位論文, 1993), 4쪽. |
0462) | 이융조,<한국 고인돌 사회와 그 의식>(≪東方學志≫23·24, 延世大, 1980). 崔夢龍,<全南地方 支石墓 社會와 階級의 發生>(≪韓國史硏究≫39, 1981), 1∼14쪽. ―――,≪A Study of the Yongsan River Valley Culture≫(동성사, 1984). |
0463) | Song Nai Rhee·Choi Mong Lyong, Emergence of the Complex Society in Prehistoric Korea, Journal of World Prehistory Vol. 6, No. 1, 1992. 3. pp.51∼95. |
0464) | 金元龍,<韓國考古學의 成果와 課題>(≪韓國考古學報≫21, 1988), 23쪽. |
0465)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기원전 천년전 전반기의 고조선문화>(≪고고민속론문집≫1, 력사연구소, 1969). ―――,≪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7). ―――, 앞의 책(1987). ―――,≪조선고고학개요≫(1989), 120∼158쪽. 박영초, 앞의 책, 128∼224쪽. |
0466) | 朝中合同考古學發掘隊,≪崗上·樓上:1963∼1965 中國東北地方遺跡發掘報告≫(社會科學院出版社, 1966). |
0467) | 盧爀眞, 앞의 글(1987), 764∼765쪽. |
0468) | 盧爀眞, 위의 글, 764∼765쪽. ―――, 앞의 글(1992), 11∼24쪽. Hyunk Jin Ro, A Revised Framework for Korean Prehistory, Pacific Northeast Asia in Prehistory:Hunter-Fisher-Gatherer, Farmers, and Sociopolitical Elites, Washington State University Press, Seattle, 1992, pp.209∼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