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Ⅲ. 백제의 대외관계1. 중국왕조와의 관계2) 대중관계의 전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3) 건국집단의 기원과 주민구성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1) 한강유역의 상실
            • (1) 왕위계승 분쟁과 왕권의 쇠퇴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3) 동성왕의 왕권강화책과 신진세력의 등장
          • 2) 무령왕의 활동
            • (2) 무령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시책
        • 3.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재편
          • 2) 정치체제의 개편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2) 대중관계의 전개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4)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 3. 왜와의 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2) 군사제도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2) 조세제도
            • (1) 세제의 내용
          • 3) 산업
            • (1) 농업생산력의 발전
            • (2) 수공업의 발달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2) 법률과 풍속
            • (2) 풍속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웅진시대

 백제는 장수왕의 남침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음을 당하자 문주왕 원년(475)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한성은 약 5세기간에 걸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도읍지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침입에 의한 갑작스러운 천도에 따라 한성지방에 두었던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다. 이처럼 문주가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 가운데는 고구려의 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대중관계 및 대왜관계상 필요한 금강 중심의 수로 확보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385) 따라서 웅진천도 이후의 대중관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었다.

 웅진천도 후 다시 사비로 천도하기까지의 대중관계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2>와 같다.

번호 연 도 내 용 삼 국 사 기 중 국 사 서
기 년 서 명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476

480

480

484

484

484

486

488

490

490

490

490

495

495

502

512

521

521

522

524

534
조공(송)

조공(남제)

봉책(남제)

기타청구(남제)

허가(남제)

조공(남제)

조공(남제)

전쟁(위)

전쟁(위)

관작청구(남제)

봉책(남제)

봉책(남제)

관작청구(남제)

봉책(남제)

봉책(양)

조공(양)

조공(양)

봉책(양)

조공(양)

봉책(양)

조공(양)
문주왕 2년



동성왕 6년

동성왕 6년

동성왕 6년

동성왕 8년

동성왕 10년








무령왕 12년

무령왕 21년

무령왕 21년


성왕 2년

성왕 12년

건원 2년

건원 2년






영명 8년

영명 8년

영명 8년

영명 8년

건무 2년

건무 2년

천감 1년

천감 11년

보통 2년

보통 2년

보통 3년

보통 5년

중대통 6년

南 史

南 史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梁 書

梁 書

梁 書

梁 書

冊府元龜

梁 書

梁 書

<표 2>웅진시대의 대중관계

 문주왕 2년(476)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국제적인 연계를 위하여 다시 송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들의 해로를 막은 까닭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386) 이와 같이 웅진시대 초기에는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해로가 막혀버리자 중국에는 도달하지도 못하고 돌아온 경우가 동성왕대에도 있었다.387)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대중관계는 고구려의 해상권 제압으로 매우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전하는 웅진시기의 대중관계에 관한 기록은 많은 차이가 있다. 상당부분의 대중관계 내용 가운데 중국사서에 기록된 내용들이≪삼국사기≫에 빠져 있으며,≪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중국사서에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시기에도 보이지만 웅진도읍기에 두드러진다.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제가 웅진천도 후 내정의 불안과 국제적 고립으로 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웠다는 점과, 고구려에 의하여 제해권까지 위협을 받고 있어 대중관계의 항로가 완전히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상황의 일단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대에는 남제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즉 고구려의 계속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남제로부터 봉책을 받고 있었으며, 조공과 청구 등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에 의한 대중항로의 차단에서 비롯되었던 어려움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중관계는 주로 백제에서는 남제가 조공하거나 청구하는 형태였고, 남제에서는 백제가 청구한 관작 등에 대하여 봉책하는 형태였다. 당시 웅진천도 이후 어려웠던 상황에서 백제가 대중관계를 추진한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 주목되는 사실은 갑작스럽게 백제와 위가 전쟁하였다는 것이다. 즉≪삼국사기≫동성왕 10년(488)조에 위가 백제를 침입하였다가 백제에게 패했다는 것이다.388) 이 내용은≪송서≫에서 비롯되어 중국 정사의 남조계통 사서에만 전하고 있는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관한 방증자료로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기도 하다.389)≪삼국사기≫의 이러한 내용은≪남제서≫에 기재된「魏虜」와의 전쟁기록과 같은 것이다.390)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기년상 2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위나라 군사의 백제침략에 관한 기록은 침략 당사국으로서 위의 정사인≪魏書≫에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의 역사서임에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주목된다. 다만≪資治通鑑≫에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齊 永明 6년(488)의 사실로 기록되어391)≪삼국사기≫와 같은 기년으로 되어 있다. 기년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로 되어 있어≪삼국사기≫의 내용과 문구의 구성에 있어서도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삼국사기≫동성왕 10년에 보이는 위와의 전쟁기록은≪삼국사기≫편찬 이전의 백제자료로부터 전해진 내용은 아닌 듯하며,≪자치통감≫의 내용이≪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동성왕기에 편입된 것 같다.392) 이러한 추측을 더욱 굳게 만드는 것은≪삼국사기≫동성왕대의 기록이 기술의 형식은 모두 사건의 발생년도·계절·월 등을 예외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오직 위와의 전쟁기록이 있는 동성왕 10년기에만 계절이나 발생월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계절이나 월의 내용이 없는≪자치통감≫의 내용을≪삼국사기≫의 기년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일 것으로 판단된다.393)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전하는「魏虜」와의 전쟁기록은 위와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해석된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처럼 위와의 전쟁으로 기록하게 된 것은 남북조시대의 특수상황에서 비롯된≪남제서≫찬자의 역사인식에 의한 것이었다.394)≪남제서≫의 이러한 내용은 기년이 모호하게 기록된 관계로≪자치통감≫에서는 제 영명 6년에 기록되었고, 또 이를 그대로≪삼국사기≫에서 취했던 것이다. 동성왕은 천도 이후 계속되었던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고구려를 무찌르고, 이 때 전공을 세운 사람에 대해 남제에 관작을 청구하여 허락받았던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바로≪남제서≫가 전하고 있다.395) 그러므로 웅진시대 특히 동성왕대까지의 대중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사서와≪삼국사기≫기록에 보이는 차이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중국의 남북조시대로서 남조와 북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특수한 정세였으므로 이러한 중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초래된 역사인식과 함께 사료의 철저한 분석과 비판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대중관계에 대한 기록의 혼란이 무령왕대에 이르면 보이지 않는다. 무령왕대의 대중관계 기록은 중국사서나≪삼국사기≫에 모두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무령왕 12년(512)에 사신을 양에 보내었다. 동 21년에는 다시 양에 조공하고 표문을 보내어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비로소 우호를 통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396) 이 때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받았던 어려움이 극복되었음을 양에 알렸고, 그러자 양 고조는 무령왕을 봉책하였던 것이다.

行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餘隆은 바다 밖에서 변방을 지키며 멀리서 직공의 예를 닦아 그 충성심이 환히 드러났다. 짐이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전례에 따라 영예로운 관직을 내리노니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 百濟王의 관직을 허락한다(≪梁書≫권 54, 列傳 48, 諸夷 東夷列傳 百濟).

 양에서도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무령왕에게 寧東大將軍의 봉책을 행하였던 것이다. 무령왕대의 이러한 대중외교에 관한 자료들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천도를 단행한 후에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웅진천도 후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한 데 따른 대중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해권을 재확보함으로써 정상적인 대중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 사서의 내용과≪삼국사기≫의 내용이 그 이전과 달리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대중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무령왕의 이러한 업적에 의해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는 대중관계에서의 국제적 지위에 대항하여 대등한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성왕은 즉위한 이듬해 양으로부터 봉책을 받고, 성왕 6년(528)에는 조공을 하였다. 그 후 성왕 16년에 이르러 백제는 마침내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지형적으로 협소하여 도성으로서 적당하지 못하던 웅진에서 다시 사비로 천도를 단행케 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침략에 의해 이루어진 웅진천도 후 63년간의 웅진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385)兪元載,<百濟熊津城硏究>(≪國史館論叢≫45, 1993), 85∼89쪽.
386)≪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2년 3월.
38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6년 7월.
38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10년.
389)김세익,<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군에 대하여>(≪력사과학≫1967-3), 17쪽.
390)≪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國.
391)≪資治通鑑≫권 137, 齊紀 2, 武帝 永明 6년.
392)兪元載,<中國正史 百濟傳硏究>(≪韓國上古史學報≫4, 1990), 271쪽.
393)兪元載,<魏虜의 百濟侵入記事>(≪百濟硏究≫23, 1992), 94쪽.
394)兪元載, 위의 글, 83∼94쪽.
395)兪元載, 위의 글, 94쪽.
396)≪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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