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Ⅲ. 백제의 대외관계1. 중국왕조와의 관계2) 대중관계의 전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3) 건국집단의 기원과 주민구성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1) 한강유역의 상실
            • (1) 왕위계승 분쟁과 왕권의 쇠퇴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3) 동성왕의 왕권강화책과 신진세력의 등장
          • 2) 무령왕의 활동
            • (2) 무령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시책
        • 3.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재편
          • 2) 정치체제의 개편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2) 대중관계의 전개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4)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 3. 왜와의 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2) 군사제도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2) 조세제도
            • (1) 세제의 내용
          • 3) 산업
            • (1) 농업생산력의 발전
            • (2) 수공업의 발달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2) 법률과 풍속
            • (2) 풍속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사비시대

 성왕 16년(538) 봄, 백제는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로 고쳤다.≪삼국사기≫에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기 전의 준비계획 등에 대하여 실제적인 내용들이 전하지 않고 있다.397) 그렇지만 현존하는 사비도성의 나성·궁궐지·도로 등의 정연한 도성 유적을 통해서 천도 이전에도 상당한 준비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웅진은 고구려세력을 피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는 훌륭한 도읍지였으나, 협소하고 궁벽져 재도약하려는 백제의 도읍지로서는 적합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상당기간의 준비를 거쳐 사비로 천도하였던 듯하다. 백제의 사비천도는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할 정도로 의욕에 찬 천도였다. 그러므로 사비시대의 대중관계 또한 이에 짝하여 상당히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3>과 같다.

번호 연 도 내 용 삼 국 사 기 중 국 사 서
기 년 서 명
1

2

3

4

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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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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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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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9

30

31

3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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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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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9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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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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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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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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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3

64

65

66

67

68

69
541

541

541

549

562

567

567

570

571

572

577

577

578

581

581

582

584

586

589

589

598

598

598

607

607

607

607

608

611

611

611

612

614

621

624

624

624

624

624

625

626

626

626

627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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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641

641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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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

644

644

645

651

651

652
조공(양)

기타청구(양)

허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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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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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수)

기타청구(수)

불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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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청구(수)

허가(수)

조공(수)

조공(수)

기타청구(수)

견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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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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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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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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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관작청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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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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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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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성왕 19년

성왕 19년

성왕 19년

성왕 27년


위덕왕 14년


위덕왕 17년

위덕왕 18년

위덕왕 19년

위덕왕 24년

위덕왕 24년

위덕왕 25년

위덕왕 28년

위덕왕 28년

위덕왕 29년

위덕왕 31년

위덕왕 33년

위덕왕 36년

위덕왕 36년

위덕왕 45년

위덕왕 45년

위덕왕 45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9년

무왕 12년

무왕 12년

무왕 12년

무왕 13년


무왕 22년

무왕 25년

무왕 25년


무왕 25년


무왕 26년

무왕 27년

무왕 27년

무왕 27년

무왕 28년

무왕 28년

무왕 28년

무왕 30년

무왕 32년

무왕 33년


무왕 37년

무왕 38년

무왕 38년


무왕 40년

무왕 41년

무왕 42년

의자왕 1년

의자왕 1년

의자왕 1년

의자왕 2년

의자왕 3년

의자왕 4년

의자왕 4년

의자왕 4년


의자왕 11년

의자왕 11년

의자왕 12년
대동 7년

대동 7년

대동 7년

대청 3년

천가 3년

광대 1년

천통 3년

무평 1년

무평 2년

무평 3년

태건 9년

건덕 6년

선정 1년

개황 1년

개황 1년

개황 2년

지덕 2년

지덕 4년

개황 9년

개황 9년

개황 18년

개황 18년

개황 18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4년

대업 7년

대업 7년

대업 7년

대업 8년

대업 10년

무덕 4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9년

무덕 9년

정관 1년

정관 1년

정관 1년




정관 9년


정관 11년

정관 11년

정관 12년



정관 15년

정관 15년

정관 15년





정관 18년


정관 19년

영휘 2년

영휘 2년

梁 書

梁 書

梁 書

梁 書

陳 書

陳 書

北 齊 書

北 齊 書

北 齊 書

北 齊 書

陳 書

周 書

周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陳 書

陳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舊 唐 書

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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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府元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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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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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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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府元龜


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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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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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唐 書


冊府元龜

舊 唐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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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사비시대의 대중관계

 백제는 사비천도 후 성왕 19년(541) 양에 조공하고, 毛詩博士·涅槃等經義·工匠·畵師 등을 요청하니 양에서 이에 응해 주었다.398) 이는 천도 후 성왕이 가졌던 문화중흥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대에 이르면 기존의 백제의 대중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백제는 종래 남조와 일관하게 유지하던 대중관계에서 벗어나 북조와도 그 관계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위덕왕 14년(567)에는 남조인 陳에 조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다시 북조인 北齊에도 조공하였다. 그 뒤 17년에는 북제에서 위덕왕을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399)에 봉책하였으며, 다시 이어 18년에는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400)에 봉책하였다. 뿐만 아니라 19년에는 북제에 또 조공하였다. 이처럼 위덕왕 17·18·19년에 연이어 계속되는 북조와의 교류는 그전까지의 남조 일변도의 대중관계 노선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위덕왕 24년 진에 다시 조공하기도 하여 남조·북조와 모두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후에도 남조인 진과, 북조인 周에 대한 외교관계를 모색하고 있어 이러한 대중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덕왕대에 이르러 대중관계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은 한반도내의 삼국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이 狗川에서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제까지 유지되던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한 나제동맹은 일시에 결렬되고, 동맹관계였던 신라세력이 적대국가로 바뀌어 버렸다. 이러한 삼국간의 정세변화는 곧바로 대중관계에 변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나제동맹이 깨지자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북조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빈도 높은 사신파견은 이 시기의 급박하였던 백제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중국에서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수가 통일왕조를 세우게 되자, 백제는 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위덕왕 28년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수의 高祖는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에 봉책함으로써 그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나서 백제는 ‘帶方郡公’, 고구려는 ‘遼東郡公’, 신라는 ‘樂浪郡公’ 등에 봉책함으로써 형식적이나마 그들 나름대로의 지배질서를 확립하려고 한 점이었다. 이러한 질서관념은 당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남북조시대와 비교하면 상당한 관념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겠다.401) 반면 고구려와의 불화가 계속되던 백제로서는 진을 평정한 수와 보다 적극적으로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위덕왕 45년(598)에 백제는 관례적인 대중관계에서 벗어나 長史 王辯那를 수에 보내 조공하고 고구려에 대한 협공을 제의하였다.402) 그러한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왕대에도 고구려 협공에 대한 상호협조에 대한 교섭은 계속되었다. 무왕 12년(611) 수에 사신을 보내고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함에 행군날짜를 물으니까 수는 尙書起部郞 席律을 보내서 왕과 상의하도록 하였다.403) 이것은 수가 고구려세력을 의식하여 백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을 말해주며, 또한 백제로서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와의 긴밀한 관계가 요구되었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협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수가 멸망하고 당이 서게 되었다. 그러자 무왕 22년 사신을 당에 파견하면서 果下馬를 보냄으로써 당과의 외교를 시작하였다. 무왕 25년에는 당 고조가 무왕을 ‘帶方郡王百濟王’에 봉책하였으며404) 백제에서는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도 수와 마찬가지로 백제를「帶方郡王」에 봉하고 있어, 수대 이래의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관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후 무왕 27년에는 당에 明光鎧를 바치고, 고구려와의 불화를 토로하자 당에서는 화친을 종용하였다. 무왕 28년에는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다시 찾으려고 하자, 신라가 급히 이러한 사실을 당에 알리게 되었고 백제의 시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405) 이처럼 당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백제·신라의 끝없는 외교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당으로서 중재자적 입장에서 삼국의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삼국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이후에도 이러한 대당관계는 계속되어 무왕 41년에는 자제를 당의 國學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406)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었지만 백제와 당과의 관계 또한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무왕이 죽자 당에서는 애도와 함께 ‘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뒤를 이어서 의자왕이 즉위하니까 당 태종은 祠部郞中鄭文表를 보내 의자왕을 ‘柱國帶方郡王百濟王’에 봉책하였다.407) 그러자 의자왕은 그 해 8월에 사은사를 보내었다. 그 후 백제는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대야성의 성주 品釋과 그의 처를 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의자왕 3년(643)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모하여 신라 대당외교의 전초기지인 당항성을 공격하였다.408) 신라가 황급히 당에 군대를 청하였으므로 백제는 공격을 멈추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이르면 다시 국제정세는 변화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화친의 상대였고 신라는 당과 밀착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의자왕 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였으므로 이 틈을 노려서 신라의 7성을 습취했던409) 사실로서도 당시의 정세를 헤아릴 수 있다. 당으로서는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타개해보려고, 의자왕 11년 당 고종이 종주국의 자세에서 백제에게 극단적으로 신라와의 화친을 종용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백제는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합세하여 의자왕 15년에 신라의 30여 성을 또 다시 쳐부수었다.410) 이는 당과의 관계가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김춘추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청하였다. 그 결과 당은 의자왕 20년에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공식적인 백제의 대당외교는 끝나게 되었다.

 사비시대에 이루어진 빈도 높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보듯이, 백제는 당시의 어려운 국제정세 속에서도 대중외교를 매우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397)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66쪽에서 동성왕의 사비지역 사냥을 백제의 사비천도와 연계시켜 해석하고 있다.
39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399)≪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17년.
400)≪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18년.
401)兪元載, 앞의 글(1992a), 186∼190쪽.
402)≪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45년 9월.
403)≪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12년 2월.
404)≪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5년 정월.
405)≪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8년 7월.
406)≪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41년 2월.
407)≪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원년.
408)≪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3년 11월.
40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5년 5월.
410)≪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5년 8월.

金周成,≪百濟泗沘時代政治史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90), 158∼15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