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증왕대
(1) 지증왕의 등장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은 지증왕대의 일이다. 500년 내물왕의 직계인 소지마립간이 죽은 뒤 왕위는 그 방계혈통인 지증왕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왕위계승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내물마립간의 손자인 習寶葛文王의 아들로 전왕인 炤知의 再從弟로 되어 있으나,185)≪삼국유사≫에는 내물마립간의 손자로 되어 있어 소지의 再從叔이 된다.186)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단정할 수 없으나,187) 그의 혈통이 내물왕의 방계로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503년 계미년에 그는 갈문왕의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는 그의 재위 4년째 되는 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지 4년이 되도록 정식의 왕(寐錦王)이 되지 못하고 갈문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왕위계승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88) 아마 그가 왕이 된 데는 왕비족인 박씨의 후원에 힘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후 진지왕대에 이르기까지는 박씨가 왕비족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증왕의 등장은 내물왕의 직계손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에 대해 그 방계인 지증계와 박씨족 연합세력의 도전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189)
이렇게 하여 새로이 등장한 지증왕은 그 이후 중고왕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된다는 점에서 신라정치사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삼국사기≫에 지증왕대에 처음으로 신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라 할지라도190) 지증왕대의 새로운 왕계의 형성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지증왕대에 이르러 그 이전과는 달리 그들 가계의 직접 조상들을 신궁에 새로이 배향하였을 것이고, 이에 따른 새로운 의례라든가 제의의 성대함이 후대에 기억될 만큼 의미있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85) |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4년. |
---|---|
186) | ≪三國遺事≫권 1, 王曆 1. |
187) | 지증왕은 즉위시의 나이가 64세였으므로 소지왕과 같은 세대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三國遺事≫의 기록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 1972;≪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63∼74쪽). |
188) | 文暻鉉,<迎日 冷水里 新羅碑에 보이는 部의 性格과 政治運營問題>(≪迎日 冷水里 新羅碑(가칭)의 綜合的 檢討≫, 한국고대사연구회, 1989), 57쪽. 李喜寬,<新羅上代 智證王系의 王位繼承과 朴氏王妃族>(≪東亞硏究≫20, 西江大, 1990), 74쪽. |
189) | 李喜寬, 위의 글, 75∼78쪽. |
190)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神宮의 설치에 대해≪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소지마립간 9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祭祀志에는 지증왕대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