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Ⅱ. 신라의 융성2. 정치체제의 정비2) 부체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2. 성립과 발전
          • 2) 성립
          • 3)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2) 나제동맹의 결성
          • 3) 마립간시대의 정치적 발전
        • 2. 정치체제의 정비
          • 1) 배경
          • 2) 부체제
          • 3) 지증왕대
          • 4) 법흥왕대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1) 영토의 확장
          • 2) 왕권의 강화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2. 왜국과의 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3. 경제
          • 1) 농업
          • 4) 토지제도와 조세·요역제도
        • 4. 사회구조
          • 2)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4) 골품제사회의 권력구조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2) 임나 문제의 제학설
          • 3) 가야관계의 제학설
        • 2. 가야사의 범위
      • Ⅵ. 가야의 성립
        • 2. 가야의 건국 설화
        • 3. 가야 제국의 성립
        • 4. 가야연맹의 형성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1. 가야연맹의 발전
        • 2. 가야연맹의 약화
        • 3. 가야의 멸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2. 대백제관계의 심화와 부용외교
        • 3. 백제·신라의 각축과 분열외교
      • Ⅸ. 가야인의 생활
        • 1. 산업의 발달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2) 가야의 신앙과 풍속
          • 3) 유물자료에 보이는 신앙과 풍속
            • (1) 장례 풍속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부대표자 회의-화백

 부체제 아래서의 중요한 정치 문제는 각 부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는 혁거세의 추대가 6촌의 촌장들의 의논으로 이루어졌다는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이미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사금시대에 왕위는 유력한 집단의 장들에 의해 선임되기도 하였고 세습되기도 하였는데,≪삼국사기≫에서는 이를 흔히「國人」에 의해 추대되거나 세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국인은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6부의 대표자들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대표자들의 회의를 흔히 和白이라고 부르는데 화백이라는 명칭은≪新唐書≫新羅傳에 처음 보일 뿐 우리 나라의 사료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신당서≫에서는 화백회의의 운영원리에 대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초기의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183) 그렇다면 초기의 화백회의의 참여자는 6부의 대표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많이 인용되는 기록이다.

왕의 대에 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慈藏의 父이다)·廉長公·庾信公이 南山 亏知巖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였다. 이 때에 큰 호랑이가 자리에 뛰어 들거늘 여러 사람이 놀라 일어났으나 오직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와 같고 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세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靈地가 있는데, 장차 큰 일을 의논하려고 하면 대신들이 반드시 이 땅에 모여 의논한 즉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靑松山이고 둘째는 남쪽의 亏知山이고 셋째는 서쪽의 皮田이고 넷째는 북쪽의 金剛山이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眞德王).

 이 기록은 물론 진덕여왕대의 것으로 상당히 후대의 것이고 또 회의의 참석자 중에 원래 경주 출신이 아니라 금관가야 출신인 김유신이 끼어 있음으로 보아 원래의 화백회의와는 그 성격이 약간 변질되었다고 보여지지만, 회의의 참석자가 6명이고 또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기 위한 특별한 지역이 있었다는 것은 마치 백제의 政事岩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화백회의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회의의 참석자가 6명인 것은 우연인지도 모르나 6부의 6이란 숫자와 관련지을 수 있다면 원래 화백회의는 6부의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영일 냉수리비>에 지도로갈문왕을 포함한 7명의 참석자가 회집하여 중대사를 논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냉수리비>에서도 참석자의 출신부는 몇 개의 부에 한정되고 있지만 갈문왕을 제외한 6명이 참석한다는 것은 원래 6부의 대표자가 참석했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84)

 초기에는 6부의 대표자에 의한 회의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차츰 변질되어 유력한 부에서는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반면에 대표자를 참석시키지 못하는 부도 생겨나서 부 사이에도 우열의 차이가 점차 분명해졌을 것이다.<냉수리비>와<봉평비>에서 보는 것처럼 후대에 가서는 화백회의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나며 특히 梁部와 沙梁部의 인물이 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習比部나 漢祇部의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부의 위상과 아울러 화백회의의 운영원리도 초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신라가 내물왕대에 이르러서 부족연맹체적 체질을 탈피하고 고대국가로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됨에 따라 부족장 회의의 전통을 잇는 화백회의도 점차 귀족회의로 바뀌게 되고 그 권위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3)≪新唐書≫新羅傳의 기록은 8세기 중반경 신라에 왔던 중국사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6세기경 상대등과 대등을 중심으로 한 회의체의 이름이 화백이라고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거리감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李仁哲,<新羅의 君臣會議와 宰相制度>,≪韓國學報≫65, 1993;≪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87쪽).
184)과거에는 화백회의의 의장은 상대등이고 참석자가 바로 大等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나(李基白,<大等考>·<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66∼132쪽), 최근 냉수리비의 발견으로 화백회의의 의장은 葛文王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