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9권 통일신라Ⅳ. 대외관계3. 해상활동3) 당에서의 활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 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 (1) 대여제항쟁
            • (2) 나당군사동맹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백제의 패망
            • (2) 백제국 부흥운동의 진압
            • (3) 새로운 나제관계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고구려의 패망
            • (2) 고구려국 부흥운동
          • 5) 대당전쟁
            • (1) 대당전쟁의 원인
            • (2) 대당전쟁의 승리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1) 민족융합의 문제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1) 문무왕의 왕권강화
          • 2) 김흠돌란의 발생
          • 3) 신문왕의 개혁정치
        • 2. 전제왕권과 귀족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과정
          • 2) 중앙통치조직
          • 3) 내정기관의 정비
          • 4) 재상제도의 운영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1) 9주 5소경
          • 2) 군사조직
            • (1) 중앙의 군사조직
            • (2) 지방의 군사조직
          • 3) 진과 성곽시설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1) 관료전
            • (2) 녹읍
            • (3) 정전·연수유전답
          • 2) 조세제도
            • (1) 전조
            • (2) 호조
            • (3) 부역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1)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
              • 가. 궁중수공업
              • 나. 관영수공업
              • 다. 궁중ㆍ관영수공업관사의 변화
            • (2) 민간수공업
              • 가. 농민수공업
              • 나. 귀족의 수공업 경영
              • 다. 사원의 수공업 경영
            •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1) 국내 상업
            • (2) 대외교역
        • 2. 귀족의 경제기반
          • 1) 사유지와 목장
          • 2) 식읍
          • 3) 녹읍과 녹봉
          • 4) 문무관료전
        • 3. 농민의 생활
          • 1) 신라장적
            •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 (2) 신라장적과 농민생활
          •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 4. 천민의 생활
          • 1) 향·부곡
          • 2) 노비
        • 5.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머리장식
              • 가. 남자
              • 나. 여자
            • (2) 의복
              • 가. 포
              • 나. 바지
              • 다. 저고리(단의와 내의)
              • 라. 치마, 허리끈과 옷끈
              • 마. 반비
              • 바. 배당
              • 사. 표
              • 아. 요대
              • 자. 버선·버선목
              • 차. 화·화대·이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Ⅳ. 대외관계
        • 1. 당과의 관계
          • 1) 친당외교의 추진
          • 2) 나당 친선외교의 확립
        • 2. 일본과의 관계
          •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 (2) 황해횡단항로
            • (3) 남방해로
            • (4) 선박과 항해술
          • 2) 해외무역
            • (1) 수출품
            • (2) 수입품
            • (3) 일본과의 교역
            • (4) 이슬람과의 교역
          • 3) 당에서의 활동
            •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 (2) 구법승의 순례
            •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1) 성격
            • (2) 유학의 발달
            • (3) 도당유학생의 활동
          • 2) 역사의 편찬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1) 유식사상
              • 가. 원측의 유식학
              • 나. 서명학파
              • 다. 법상종 승려들의 유식학
            • (2) 원효 교학
              • 가. 생애와 활동
              • 나. 기신론 철학
              • 다. 교판
            • (3) 화엄교학
              • 가. 의상의 생애와 활동
              • 나. 의상의 화엄사상
              • 다. 화엄종과 의상 화엄의 계승
            • (4) 계율학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1) 미타신앙
            • (2) 관음신앙
            • (3) 미륵신앙
            • (4) 지장신앙
          •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와 천문현상의 기록
            •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 (3) 해시계와 물시계
            • (4) 역법과 연호
            • (5) 수학과 도량형
          • 2) 땅의 과학과 기술
            • (1) 풍수지리와 지리학
            •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 (3) 풀·나무·흙의 기술:종이·직물·유리·도자기
            • (4) 쇠붙이의 기술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1) 의약학
            • (2) 빙고-얼음의 저장 이용
            • (3) 인쇄술
            • (4) 간단한 기계와 자동 장치
            • (5) 탑과 건축
            • (6) 선박 기술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1) 고대국어의 자료와 표기법
            • (2) 차용어
            • (3) 문법
          • 2) 향가
          • 3) 한문학
            • (1) 한문학의 전개
              • 가. 신라 통일 이전의 한문학
              • 나. 8세기 승려들의 시문
              • 다. 9세기 신라 한문학
            • (2) 한문학의 의의
        • 5. 예술
          • 1) 회화
          • 2) 서예
            • (1) 초기의 서풍
            • (2) 서풍의 발전
            • (3) 후기의 선풍 글씨
          • 3) 조각
            • (1) 불교조각
              • 가. 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
              • 나. 8세기 전반의 불교조각
              • 다. 8세기 후반의 불교조각
              • 라. 9세기의 불교조각
            • (2) 탑과 부도의 조각
            • (3) 일반 조각
          • 4) 공예
            • (1) 금속공예
              • 가. 시대개관
              • 나. 범종
              • 다. 사리장엄구
              • 라. 장신구 및 생활용구
            • (2) 토기 및 와당과 전
              • 가. 토기
              • 나. 와당과 전
          • 5) 건축
            • (1) 사원 건축(목조)
            • (2) 궁실 및 연못
            • (3) 고분
            • (4) 석조건축
              • 가. 탑파
              • 나. 부도
              • 다. 석등
              • 라. 당간과 당간지주
              • 마. 석련지와 석련대
              • 바. 석비와 탑비
              • 사. 석교
            • (5) 성곽
              • 가. 왕경의 성곽과 구성문제
              • 나. 소경과 주성
              • 다. 축성기법의 예
          • 6) 음악
            • (1) 역사적 배경
            • (2) 향악과 향악기
              • 가. 삼현과 삼죽의 기원
              • 나. 거문고의 수용과 옥보고
              • 다. 삼현과 삼죽의 악조 및 악곡
              • 라. 옥보고의 창작곡과 악가무
            • (3) 당악과 불교음악의 대두
              • 가. 당악과 당악기의 등장
              • 나. 불교음악
            • (4) 일본에서의 고려악
          • 7)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2) 구법승의 순례

 佛法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들의 수도 유학생 수에 못지 않게 많다. 진흥왕 10년(549) 신라승 覺德이 중국 남조의 梁으로 求法길에 나섰고,0893) 明觀도 같은 왕 26년 陳에서 구법한 뒤 經論 1,7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0894)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隋·당에 건너가 구법활동을 하거나 그 곳에 머물면서 弘法에 전념한 승려의 수는 족히 기천에 달했을 것이다.≪三國遺事≫에는 원광법사가 西學에서 귀국한 뒤 승려들의 발길이 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入唐求法僧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0895) 최치원도 “儒者이건 佛者이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入唐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0896)

 당 義淨(635∼713)의≪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중국에서 인도로 간 구법 승려들이 58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신라승 9명(失名僧 2명 포함)과 고구려 승려 한 사람도 보인다.0897) 이들은 대개 삼국통일 이전에 天竺으로 향발하였던 승려들이다. 그 뒤 慧超(700?∼780?)도 아마 開元 11년(성덕왕 22년, 723) 무렵 중국 廣州에서 배를 타고 천축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먼저 입당구법하다가 다시 천축으로 習法하러 간 신라승들의 수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에 머물며 구법하던 僧徒들을 종파별로 분류하여 130여 명이 찾아졌다.0898) 그러나 史籍에 보이는 승려 전부를 빠짐없이 망라하였다 해도 사적에 이름이 남지 않은 허다한 구법승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인의≪입당구법순례행기≫에 보면 赤山村(山東省 榮成市 石島鎭)에 건립한 新羅僧院인 法華院에는 常住僧尼가 27명이 유석하고 있었다.0899) 그러나 인근의 天門院이나 劉村의 僧院에는 얼마나 많은 신라승이 상주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그는 武宗(841∼846)의 불교탄압이 한창일때 左神策軍 軍容院에 소환된 長安 東半部의 外國僧 21명 가운데 10명이 신라승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0900). 이 밖에 외국승으로 祠部의 牒이 없어 還俗된 자 가운데 신라승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0901)은 在唐 신라승들의 한 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인은 五台山 순례길에 오르면서 登州府 南街에 신라관이 있었다는 소식과 靑州府 龍興寺와 長山縣 醴泉寺의 신라원에서 유숙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0902) 당시 里程을 충실히 기록했던 원인도 청주 장산현에서 서북쪽 오대산으로 길을 바꾸었기 때문에 서남쪽 황하유역을 따라 장안에 이르는 간선도로변에 있었을 신라관·신라원에 관한 기록을 더 이상 남기고 있지 않다. 다만 후일 그의 후학 圓珍(814∼891, 5세 좌주)이 장안에 머물 때 左街 龍興寺의 신라원에서 기거한 적이 있어 그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따름이다.0903)

 지금의 晒字鎭 곤유산(烟台市 곤유산 林場 제2분장) 아래에는 신라승원이라 전해오는 無染院 절터가 있다. 우리 나라 禪門九山의 하나인 聖住山派의 조사 無染禪師(801∼888)가 세우고 기거하였던 곳이라 믿어진다.≪모평현지≫에는 光化 4년(天復 원년, 901) 3월에 세운「唐無染院碑」의 銘文이 수록되어 있다. 주로 무염원 重修 때 대시주들의 이름과 여기에 관계된 신도들의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鷄林人 金淸押衙」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 절의 중창을 주관했던 단월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승원에는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句當新羅所」까지 설치해야만 했던 文登의 땅에 그것도 적산촌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과「계림인 김청압아」가 대시주였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무염선사와 관계있었던 사찰임이 분명하다.0904)

 宋 道原의≪景德傳燈錄≫에는 과거 7佛에서 法眼文益(885∼958)에 이르는 禪僧 1,701명의 傳燈法系를 상술하고, 外國僧 43명도 함께 등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42명이 신라승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특히≪경덕전등록≫에 기재된 초기 승려들의 師承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지만 신라승의 경우는 대부분 唐末·五代의 일이라 믿을 만하다. 이 중 35∼36명이 강남 각지에서 習禪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禪門九山의 開山祖는 단 두분 즉, 京兆 章敬寺 懷惲法系의 玄昱(鳳林山, 경남 창원)과 蒲州 麻谷寺 寶徹法系의 無染(聖住山, 충남 보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長江유역에서 구법한 스님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다 曦陽山(경북 문경 鳳巖寺) 一山만이 四祖 道信의 法系이고 그 나머지는 曹溪法系이다. 그리고 또 조계법계 八山 가운데 須彌(황해도 해주 廣照寺) 一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江西馬祖의 법계를 잇고 있다.

 ≪嘉定赤城志≫권 2, 黃岩縣條에 보면 “신라방은 현 동쪽 1리에 있고 옛 志에 五代 때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으므로 이름하였다”고 있다. 지금의 黃岩市 城內의 柏樹巷 일대라고 추정한다.0905) 또 권 14, 寺院(黃岩縣)條에는 田 84畝, 地 6畝, 山 18畝를 소유한 제법 큰 사찰인 悟空院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寺院이 신라승원이라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天台全誌≫권 6, 寺院條에 보면 天台宗 本山 國淸寺 앞에 신라승 悟空이 세운「新羅園」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경 이 오공이 국청사에서 구법한 뒤 황암의 신라방에 이르는 길목에 오공원을 세워 상주한 바로 그 스님이라 믿어본다. 마치 山東의 赤山村에 新羅僧院인 法華院이 건립된 이치와 같다고 하겠다.

 ≪赤城志≫권 28, 禪院에 의하면 오공원은 황암현 東鎭山(東南 300里 海中)에 있는 禪院이다. 後晋 天福 6년(941)에 건립되어 宋 英宗 治平 3년(1066)에 賜額된 사찰이다. 이 동진산은 唐 武后 永昌 원년(689) 이후 해상교통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台州에서 明州를 거쳐 신라·고려로 행하는 航線上의 요충지였던 것이다.≪적성지≫권 20에는 ‘縣東 240리’에 위치한다고 있어 앞의 내용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면 바다 가운데 큰 돌이 돌출해 있는데 배를 타고 고려로 가는 자는 반드시 이 돌을 길잡이로 삼았다’고 있다. 오공원과 신라방 그리고 신라·고려에 이르는 항선을 고려한다면 동진산 오공원과 국청사 신라원을 세운 스님은 같은 오공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 밖에≪天台全誌≫권 7, 釋條에는 唐 景福 원년(892) 天台山 平田寺에 留錫한 신라승 道育에 관한 흥미있는 기사도 남기고 있다. 중국에 유학하여 天台敎義를 學習한 新羅高僧 7명 가운데 後晋 天福년간(936∼941, 아마 漢周년간)에 국청사에 와서 높은 학덕을 닦아 천태 16대의 祖師가 된 고려승 寶雲尊者가 있다는 사실이다.0906) 異國僧으로 중국의 천태법통을 계승하였으니 그의 학문의 심오함을 족히 짐작할 수 있겠다.

 신라 下代의 불교를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도 강남에 유학하여 習禪하였던 많은 스님들의 역할에 생각이 미친다. 선문9산의 근원지이며≪祖堂集≫편찬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강남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935년 신라가 망한 뒤에도 계속 이곳에 남아 구법하여 五代 江南佛敎의 발전과 신생 고려국가의 불교문화 번창에 이바지한 승려들의 역할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하다.

 이와 같이 신라승들은 광대한 중국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는 황량한 서역에서까지도 寺院의「職僧」으로 師僧으로 혹은 譯經場의 학문승으로 또는 山間村落의「化俗法師」로 홍법활동에 전념하였다. 唐僧 海雲의≪兩部大法相承師資付法記≫에 “신라승 수만이 몸을 잊고 勝法을 구하러 入唐하였다”고 한 내용에서 저간의 소식을 알 만하다.

0893)≪海東高僧傳≫권 2.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0894)위와 같음.
0895)≪三國遺事≫권 4, 義解 5, 圓光西學.
0896)崔致遠撰,<眞鑑國師碑銘幷序>(≪海東金石苑≫권 1).
0897)≪三國遺事≫권 4, 義解 5, 歸竺諸師조에는 실명승 2명을 포함 도합 10명이 된다.
0898)高柄翊은<支那入學僧表>(李能和,≪朝鮮佛敎史≫, 朝鮮史講座分類史, 조선사학회, 1926, 53쪽)를 교정 보완하여<新羅僧求法入唐表>(高柄翊,≪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65∼68쪽)를 작성하여 약 90여 명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嚴耕望은 당에 머물며 구법하던 僧徒들을 종파별로 분류하여 130여 명을 찾아 내고 있다(嚴耕望, 앞의 글, 678쪽).
0899)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2, 開城 5년(840) 정월.
0900)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3, 會昌 3년(843) 정월 27일.
0901)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會昌 5년(845) 4월 15일.
0902)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2, 開城 5년(840), 3월 2일·21일, 4월 5일·6일.
0903)圓珍,≪行歷抄≫.
0904)金文經, 앞의 글(1993), 107쪽.
0905)林土民,<唐·吳越時期浙東與朝鮮半島的通商貿易和文化交流之硏究>(≪고·중세시대의 한중문화교류사≫, 문화체육부, 1993), 57쪽.
0906)≪佛敎統紀≫권 8, 寶雲尊者義通·≪天台全誌≫권 7, 釋.

嚴耕望은 중국에 유학하여 天台敎義를 學習한 新羅高僧들을 佛祖統紀에서 찾아내어 그들 7명의 師承관계를 밝히고 있다(嚴耕望, 앞의 글, 659∼660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