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의상의 화엄사상
의상의 화엄사상은 화엄학의 핵심을 간추려 모아 상징적인 圖印으로 형상화시켜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붙인≪一乘法界圖≫에 잘 드러나 있다.1083) 이 체계적인 저술을 통해 의상은 새로운 불교철학 형성에 노력하던 당시 신라 불교계에 元曉가 이룩한 사상체계와 더불어 통일 이전보다 한 단계 진전된 사상 체계를 제시하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일승법계도≫는 화엄종의 宗旨인 一乘法界緣起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의상은 법계연기의 핵심 개념에 통하면서 또 한편으로 실제적 수행의 면모를 지니는 210자의 法界圖詩를 엮었다. 나아가 그는 법계도시를 더욱 상징적으로 형상화시킨 法界圖印을 만들어 모든 세계의 법을 다 포용해 들이고자 했다. 즉 의상은 화엄철학의 정수인 法界緣起를 이 하나의≪法界圖≫로 집약시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1084)
법계도시는 첫 구절을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는 法性은(法性圓融無二相)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깨달아 알 수 있는 경지에 다름 아니다(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심오하고 미묘한 眞性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의상은 緣起의 本體라고 풀이하였다.
다음에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며(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一卽一切多卽一)” 이치 곧 一多가 相入相卽한다고 한 것은 緣起陀羅尼 理法의 작용을 엮은 것이다. 또 “한 티끌 속에 十方世界를 모두 머금고 있고(一微塵中含十方) 일체의 모든 티끌이 또한 그렇다(一切塵中亦如是)”는 이치는 현상면에서, “한없는 긴 시간이 한 생각이요(無量遠劫卽一念)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시간이며(一念卽是無量劫) 九世 十世의 과거 현재 미래가 相卽한다(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는 것은 세상의 시간에 따라, 그리고 “처음 發心할 때 곧바로 깨달음을 얻어(初發心時便正覺)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生死涅槃常共和)”는 것은 계위에 따라, 각각 연기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理와 事를 따로 나누어 볼 수 없어(理事冥然無分別) 스스로 깨달은 十佛과 화엄의 行願의 주체인 普賢보살의 경지인(十佛普賢大人境)”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는 조금의 걸림도 없는 진실의 세계인 무장애세계를 그 무대로 한다.
법계도시의 마지막 귀절은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 옛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하네(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이다. 첫 귀절의 ‘無二相’은 마지막 귀절의 ‘中道’와, ‘諸法不動’은 ‘舊來不動’과 정확한 대응을 보임으로써, 처음과 끝이 긴밀하게 상응하는 치밀한 구성을 잘 나타낸다.
一中多 多中一 그리고 一卽多 多卽一의 相入相卽의 연기다라니법은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으로서, 의상은 數十錢 등의 비유를 들어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微塵과 十方世界의 걸림없는 융통을 말하는 ‘事’는 법계연기의 공간적 전개이다. 一念과 無量劫의 융통 그리고 중첩되는 과거·현재·미래의 九世와 총체적인 十世로 엮은 ‘世’는 법계연기의 시간적 전개이다. 初發心한 보살과 正覺을 이룬 부처 그리고 生死와 涅槃의 융통을 六相說로 풀이한 ‘位’는 수행의 因果를 보인 것이다.1085) 그리고 이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理와 事가 무분별하여 모든 自性에 고착됨이 없이 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기의 도리가 된다.
의상의 스승 지엄은 법계연기의 相入相卽의 이치를 十門玄이라는 열가지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의상은 이 내용을 집약시켜 一多의 相入相卽, 微塵과 十方, 一念과 無量劫, 初發心과 正覺 및 生死와 涅槃으로 구성된 陀羅尼 理用·事·世時·位의 4가지 범주로 정리하여≪법계도≫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원효가 普法의 특징으로 세운 大小·促奢·動靜·一多의 四門 체계와 유사한 구성이기도 하였다.1086) 이는 지엄 교학보다 요점이 집약되면서 일승의 의의를 충분히 드러내는 성과가 신라 교학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과 다의 상입상즉을 밝힌 구절 즉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다. 의상 자신의 표현도 이 범주를 “다라니 즉 연기법의 이법의 작용”이라고 하고 있다. 이 中과 卽의 이론을 가지고 다양한 현상세계와 동일한 이치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하나에서 열까지의 개체들인 동전에 비유하는 數十錢喩로 구체적으로 설명될 만큼 法界緣起의 핵심을 이루는 연기다라니법의 대의이다. 그리고 나머지 범주는 이의 시간 공간적 전개이다.
의상은 지엄이 화엄경 구절에 근거하여 토대를 세운 一과 多의 相入相卽의 논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법계연기의 핵심으로 집약시켰다. 이 一多의 相入相卽을 핵심으로 하는 의상의 연기설은 당시 불교교학의 진전 과정에서 볼 때 상당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의상이≪법계도≫에서 상입상즉의 대의를 설명하기 위해 數十錢喩를 적극 채용하여 구체화시킨 것이 화엄사상의 중요한 교학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의상은 六相說의 의리가 연기의 무분별한 이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그로 인해 一卽一切의 논리에 이른다고 함으로써 이를 법계연기의 중심 교설로 정착시켰다. 그는 六相이 不卽不離하고 不一不異하여 항상 中道임을 이끌어 一乘과 三乘이 궁극적으로 主伴相成하여 利益衆生하며 오직 中道에 있음을 강조하였다.1087)육상은 삼승 방편으로서 차별의 제법상을 일으키나 원교일승에서는 그 차별이 없어져 하나로 되므로 이 육상원융사상은 의상 교학의 융섭적인 성격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1088)
의상은 여기에다 利他行과 아울러 修行方便과 得益의 修行門을 추가하여 강한 실천적 성격을 드러내 보였다. 이는 법계도시를 圖印으로 형상화시켜 실제적 수행에 쓰이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의상이 지녔던 화엄 법계연기설의 이해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
의상은 一切緣生法의 本義 곧 연기의 핵심을 中道義로 파악하였다. 緣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제법은 연을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어느 하나도 일정한 自性이 없다. 自性이 없으므로 자재롭지 못하고 生하되 不生하고 不住하니 이것이 中道이다. 因緣所生法의 도리인 空=中道義는 無分別을 의미한다.1089) 緣成의 一切 제법은 어느 것도 일정한 自性이 없어서 不卽不離하고 不一不異한 것인데, 그 도리가 양 극단을 융섭하는 無分別의 이치인 중도인 것이다.1090) 의상의 화엄사상은 후학들에 의해 橫盡法界觀으로 특정지워져 법장의 堅盡法界觀과 비교되었다. 연기된 제법상의 차별을 인정하고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법장의 수진법계관에 대해 의상은 근본적인 하나를 중시하고 그 하나의 이해로써 전체를 파악하려는 횡진법계관을 가졌는데 이는 곧 性起論적인 융섭사상이었다는 것이다.1091) 의상은 연기된 제법의 生과 不生, 無說과 言說을 융합하여 空觀을 융회적인 것으로 발전시킴으로써 中觀을 성립시킨 것이었다.1092)
의상이 제시한 화엄 연기사상은 원효의 방대한 불교사상의 체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이후 전개되는 신라교학의 왕성한 연구 분위기의 문호를 여는 뚜렷한 성과였다.
한편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은 唯識說과 中道空觀說을 나란히 등장시키는데 그침으로써 그와 꾸준히 교유하던 元曉와는 달리 당대 불교사상의 제일 선결 과제였던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극복하고자한 사유구조를 체계적으로 밝히지 못한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상이 가장 관심있게 추진한 것은 그들 대립되는 과제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그들을 포용하는 학설을 상징화시켜 華嚴一乘의 원융한 논리를 천명하고는, 보다 중점적으로 실천적인 敎化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는 의상이 상입상즉의 화엄 연기사상을 中道의 뜻으로 파악한 것과 관련이 있다. 중도의 본래 입장은 모든 것을 독립자존적인 고정적 존재로 한정짓지 않고 상대적으로 성립해 있다고 보는 것이고, 따라서 세간의 常과 無常 그리고 有邊과 無邊의 절대부정적인 不可得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는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참된 知見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실천성이 짙게 내포되어 있다. 교화 중심의 의상의 교단 활동은 이러한 배경에서만이 그 의미를 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1093)
1083) | 義相,≪一乘法界圖≫(≪韓國佛敎全書≫2, 8쪽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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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4) | 李箕永,<華嚴一乘法界圖의 根本精神>(≪新羅伽倻文化≫4, 嶺南大, 1972 ;≪新羅佛敎硏究≫, 韓國佛敎硏究院, 1982, 465∼506쪽). |
1085) | 義相,≪一乘法界圖≫(≪韓國佛敎全書≫2, 3쪽中). |
1086) | 元曉,<晉譯華嚴經疏序>(≪韓國佛敎全書≫1, 995쪽上). |
1087) | 義相,≪一乘法界圖≫(≪韓國佛敎全書≫2, 1쪽下). |
1088) | 김두진, 앞의 책, 142∼151쪽. |
1089) | 義相,≪法界圖≫(≪韓國佛敎全書≫2, 6쪽中). |
1090) | 鄭炳三, 앞의 글(1993b), 52∼57쪽. |
1091) | 金杜珍,<義湘의 橫盡法界觀>(≪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앞의 책, 191∼202쪽). |
1092) | 金杜珍,<義湘의 中道實際思想>(≪歷史學報≫139, 1993;앞의 책, 164∼170쪽). 이러한 융합사상은 성기론적 입장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
1093) | 鄭炳三, 앞의 책, 1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