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 귀족항쟁기의 남북교섭
발해와 신라가 대립에서 교섭으로 국면을 전환하는 것은 신라 정계의 변동에서 비롯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① “원성왕 6년(790) 3월에 一吉飡 伯魚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고 하고, 또 ② “헌덕왕 4년(812) 9월에 級飡 崇正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북국이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신라에서 북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만 되어 있을 뿐, 사신의 파견배경과 그 경과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북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백어와 숭정이 어떠한 인물이었고, 그들이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이들이 적어도 6두품 내지 진골 출신의 높은 신분이었음은 일길찬과 급찬이라는 그들의 관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제37대 宣德王이 된 金良相과 제38대 원성왕이 된 金敬信은 혜공왕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귀족항쟁기의 신라 하대를 열었던 장본인들이다. 특히 김경신은 왕위계승 제1후보자였던 金周元을 누르고 스스로 왕이 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결여된 상황에서 통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지지세력이 없던 원성왕은 4년(788)에 讀書三品科라는 일종의 관리 채용시험제도를 채택하여 자신의 관료들을 선발해 보려 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라 중대 이후 당으로부터 받아 왔던 책봉을 통한 외교적 승인절차도 없었으므로 더욱 불안한 정치를 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그의 정치적 도덕성은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원성왕은 이제까지 대립적이었던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즉 내부의 불만과 정치적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에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발해에서 신라 사신이 어떠한 활약을 하였고 발해가 신라 사신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원성왕 6년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을 때 발해는 문왕 大興 54년으로 문왕 치세의 말기였고, 수도도 발해국의 정치제도가 완성되었던 上京 龍泉府(흑룡강성 영안현)로부터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동경 용원부(吉林省 琿春)로 옮겨 와서 5년 정도가 지난 후로써 발해도 ‘國人’으로 불리는 귀족들의 권력 항쟁기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러나 발해는 동경 용원부시기에 李元泰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는(786∼787) 등 불안정한 내정과는 달리 외교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최초 사신파견이 있었던 해는 바로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갔다 온 지 3년이 지난 때였다. 남북국의 교섭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려고 했던 사실은 양국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발해의 외교가 궁극적으로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발해가 신라 사신을 결코 소홀히 대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동기야 어떻든 신라의 발해에 대한 사신파견 결과는 신라쪽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그 당시 남북국의 대립관계가 특별히 나타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성왕이 신라 하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13년간이라는 장기집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성왕 6년 이후 발해로의 사신 파견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교섭이 그 이후에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몇 번의 교섭이 있었으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단지 원성왕 이후의 외교가 당 및 일본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정책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 원성왕대의 남북교섭 역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원성왕에 이어 즉위한 昭聖王이 1년 만에 죽자 신라 제40대 哀莊王이 즉위하였다(800). 그러나 애장왕대의 외교는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803년) 일본국과 사신을 교류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전하는≪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라와 일본의 이러한 관계변화는 발해와 일본의 외교가 두절될 정도까지 되었다. 애장왕대 신라의 이와 같은 당·일본에 대한 이중외교는 당시의 남북교섭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나타내 준다. 특히 신라는 당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을 테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당에 접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자기 조카였던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憲德王 金彦昇은 더욱 더 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성왕대의 정치적 위기가 중대 세력과 하대 세력의 대결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헌덕왕대의 분쟁은 하대 세력간의 다툼이었다. 이것은 원성왕이 겪었던 것 이상의 정치적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원성왕대와 같은 정치적 위기상황이 헌덕왕대에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원성왕대와 차이가 있었다면 대외관계에서 애장왕대가 일본 위주였다면 헌덕왕대는 당 위주의 외교였다는 점이다. 헌덕왕은 그가 즉위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왕자 金憲章을 당에 보내어 금은불상과 불경 등을 전하였는가 하면, 당 역시 원성왕대와는 달리 헌덕왕에 대하여 왕의 즉위와 동시에 외교적 책봉을 이행하였다. 이와 같은 헌덕왕의 대당외교와 함께 이루어졌던 것이 발해에 대한 사신파견이었다. 헌덕왕의 발해에 대한 사신파견 역시 위기에 처했던 내정에 대한 관심을 외부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헌덕왕이 외교를 통하여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 한 노력은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발해에 대한 기대가 신라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당시 발해는 내부적으로 귀족항쟁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정에 있어서는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신라를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신라가 발해와의 접촉을 시도한 것은 그 만큼 원성왕계 내부의 저항이 컸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