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Ⅲ. 발해의 대외관계1. 신라와의 관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2. 발해의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2. 당과의 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2) 경제구조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2) 미술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신라 하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루어진 남북국의 교섭은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와 당의 군사 협력을 계기로 하여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10대 宣王 大仁秀의 즉위와 함께 발해는 고구려 영토 수복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와 같은 발해의 정책은 신라와 당에게 모두 위협적이었다. 즉 이러한 정세는 신라와 당에게는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또 신라와 당의 밀착은 발해와 신라가 교섭을 단념하고 또다시 대립하도록 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교섭에서 대립으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은 신라와 당의 군사적 협력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도움이 필요하던 당은 그들 내부에서 일어난 李師道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신라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다. 즉 신라는 헌덕왕 11년(819) 당에서 일어났던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한 당의 지원요청을 받고 군대 3만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성덕왕 31년(732)에 발해의 공격을 받았던 당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사도는 본래 고구려계 사람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에 강제로 이주되었던 李正己의 손자였다. 따라서 당이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의 도움을 청하였던 것은 이사도를 발해계로 생각하여 남북국의 대립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신라와 당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밀착이 남북국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먼저 신라의 대내적인 면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원성왕계의 반발을 견제하기 위하여 헌덕왕의 측근에 대거 등용하였던 무열왕계에 대한 대탄압이 이루어졌다. 신라와 당의 밀착 이후 무열왕계 金周元의 아들인 金憲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헌덕왕이 그 무리 239명을 처형한 것은(822), 그만큼 왕권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음으로 신라의 대외관계에서 보자면, 신라가 중대 성덕왕 이후와 같이 당과의 밀착을 추구함으로써 남북의 관계는 대립적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즉 신라는 헌덕왕 18년(826) 1만여 명의 漢山 북쪽 주민들을 동원하여 발해와의 북쪽 경계에 긴 성을 쌓아 발해와의 대결을 각오하는 방향으로 외교노선을 전환하고 있었다. 신라와 당의 밀착은 결국 발해와의 대립관계를 심화시켰고, 내부 반대세력의 탄압으로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신라와 발해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승려 圓仁이 쓴≪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가 당에 조공사로 갔다가 거기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구법활동을 하며 기록했던 4권의 기행문으로서,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9년 반 동안의 여행기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신라인들이고 발해에 관한 기록도 있어 당시의 남북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기행문은 신라인들이 8월 15일이 되어서 백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3일 동안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는 사실과, 그러한 이유를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신라가 이겼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신라 노승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205) 원인의 이 기록이 839년에 나온 것이니까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839년 이전에 신라와 발해는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중국이나 신라의 어느 기록에도 양국간의 전쟁이나 신라의 승리 사실을 남기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신빙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206) 아무튼 오늘날 한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의 기원을 발해와 신라의 대결에서 신라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데에서 유래할 수도 있다고 한 점은207) 주목하여 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남북국의 대립관계는 당에서 있었던 두 나라의 외교관과 유학생들의 경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치원의<謝不許北國居上表>를 통해서 잘 알려진 신라와 발해 사신의 자리다툼사건(席次爭長事件)도208) 그 한 예이다. 즉 大瑋瑎 4년(897)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된 발해 왕자 大封裔가 당시 발해의 국세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발해가 신라보다 우선하여야 한다고 당 昭宗에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소종은 이것을 거절하고 신라 우선의 옛 관습대로 하였고, 이러한 소식에 접한 최치원이 당 소종에게 감사의 글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외교적인 면에서 양국이 대립하고 있었던 하나의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당이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한 賓貢科 시험에서도 있었다. 875년 발해의 烏昭度가 신라의 李同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자, 최치원은 이 사건이야말로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치욕스럽게 여겼다. 또한 906년에는 신라의 崔彦撝가 오소도의 아들인 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자기 아들의 순위를 최언위보다 올려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했던 적이 있었는데,209) 이러한 것은 모두 남북국의 대립의식에서 나왔던 사건이었다.

205)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 8월 15일.
206)이 기록을 당시의 신라인들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 신라와 고구려가 싸웠던 날을 신라와 발해가 싸운 것으로 착각하여 전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石井正敏,<朝鮮における渤海觀の變遷-新羅∼李朝->≪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0, 52쪽).
207)崔南善,≪朝鮮常識問答≫5, 名日.

依田千百子,<秋夕考>(≪白初洪淳昶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 1977), 2∼3쪽.
208)浜田耕策,<唐朝における渤海と新羅の爭長事件>(≪末松保和頌壽紀念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1978).

임상선, 앞의 책, 264∼265쪽.
209)≪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崔文昌侯全集≫文集 1, 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與禮部裴尙書瓚狀>.

金毓黻,<諸臣列傳>(≪渤海國志長編≫권 10, 華文書局, 193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