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3. 사회·경제구조1) 사회구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2. 발해의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2. 당과의 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2) 경제구조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2) 미술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사회생활

 발해의 혼인풍습으로≪金史≫에 보이는 搶婚은 발해인 가운데서도 말갈족의 혼인풍습으로서 일종의 약탈혼이라고 할 수 있다.303) 한편 발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계 주민의 혼인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이전의 옛 고구려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04) 발해의 가족은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다. 그것은 발해인들의 무덤 발굴에서도 확인되며, 문헌상으로도≪松漠紀聞≫에 잘 나타나 있다.

부인은 모두 사납고 妬忌하였다. 大氏와 다른 姓이 결합하여 10자매가 되었는데 번갈아 그 남편을 살피고 則室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교제하는 것을 들으면 음모를 꾸며 毒으로 총애하는 여인을 죽이려 하였다. 한 남편이 잘못을 범하였으나 부인이 이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있으면 나머지 9인이 함께 모여 꾸짖었다. 질투와 시기로 서로 다툼이 심하였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女倡이 있고, 그 나라의 良人들이 모두 小婦·侍婢를 거느렸으나 오직 발해만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305).

 또한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은 冑子監과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는 “女師”라는 여성 교사의 개인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발해의 儒家思想에 대한 이해의 폭은 당시 중국의 학문수준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06)

 발해의 법률은 발해 멸망 뒤 거란이 그 유민들을 발해법이 아닌 漢法을 적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와 거의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07) 즉 738년 당에서≪三國志≫·≪晋書≫·≪三十六國春秋≫와 함께≪唐禮≫를 베껴왔는데, 이 당례는 바로≪大唐開元禮≫로서 당 현종 때 蕭嵩 등이 현종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대당개원례≫는 황제를 중심으로 群臣 百僚와, 아래로는 지방관원에 이르는 모든 범위를 포괄하고 있으며, 무릇 제사·儀典·冠婚·喪葬 등의 의식과 함께, 외국에 대한 조공 수속 및 외교 의례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大玄錫초에는 “자주 학생을 보내어 京師의 太學에 나아가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혔다”는≪新唐書≫발해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율령격식의 수입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발해는 옛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말을 타며 활쏘는 것을 좋아하여 수렵활동이 활발하였다. 발해에는 오늘날의 하키와 비슷한 打球의 습속이 있어 일본에 간 발해 사신들이 일본 궁정에서 타구를 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에 전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폴로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라는 놀이도 성행하였는데, 이 격구는≪遼史≫蕭孝忠傳에 의하면 발해인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일환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渤海樂은 8세기초 일본과 교류가 시작된 이후 渤海樂師와 樂生들에 의해서 일본의 궁중에 渤海舞와 함께 전해졌고, 일본은 內雄을 발해에 파견하여 “音聲” 즉 발해악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뒤 발해악은 일본 궁정 음악의 하나가 되어 항상 연주되었다고 한다. 또한 발해의 왕립음악기관인 太常寺에서 연주된 악기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악기들을 계승한 것이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渤海琴으로 알려진 玄琴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무용수들의 후예들인 渤海敎坊은 금나라에서 발해무를 계승하였다.308) 이 밖에 발해인들이 즐겼던 놀이로는 오늘날의 우리 나라 풍속에 전하는 강강수월래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踏鎚가 있었다.≪契丹國志≫에는 발해의 풍속에는 歲時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노는데,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士女들이 따르면서 서로 화답하며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고 하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하였다.

 발해 관리들의 복식에 관해서는≪신당서≫발해전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品으로써 차등을 두는데 3秩 이상의 服色은 紫色으로 하고, 牙笏과 金魚를 장식하였다. 5秩 이상은 緋色 옷에 아홀과 銀魚를 장식하였다. 6질과 7질은 엷은 비색, 8질은 녹색옷에 모두 木笏을 사용하였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이러한 발해의 복식제도는 唐制를 모방한 것으로서 등급에 따라 관복의 색깔과 홀, 패식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정효공주묘의 벽화에는 발해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벽화속의 인물은 뺨이 둥글고 입술은 붉으며 얼굴이 크고 살이 쪘다. 머리에는 幞頭나 수건을 쓰고, 靑·紅·紫·白·赭色의 목 둘레가 둥근 袍에 가죽허리띠를 차고, 발에는 가죽신이나 삼으로 엮은 신을 신었다. 이러한 모습은 남자로 분장한 여자들의 묘사에 가까우며, 이것은 唐 則天武后의 男裝 풍습이 발해에 전래된 영향으로 보인다.309)

 발해인들의 주거도 각양각색이었다. 지배층은 상경성의 궁전에서 보듯이 화려하게 유약을 바른 넓직한 건물에서 살았으며, 왕의 숙소로 쓰였던 곳에서는 온돌시설도 발견되었다.310) 온돌이 ‘ㄱ’자형으로 방의 두 개 벽면을 따라서 설치된 것으로 보아 잠자리에 들 때만 온돌을 이용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입식생활을 한 것 같다. 일반인의 경우는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발견된 주거지를 통하여 그 일단을 알 수 있다. 주거용 건물은 지상에 설치된 가옥과 반지하식 가옥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선사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움집 형태이다. 대체로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그 면적이 지상 가옥의 경우 전기에는 12∼28㎡이다가, 후기에 이르면 50㎡에 이르고, 반지하식 가옥은 조금 작았다. 전기에는 화덕으로 난방을 하다가 후기부터 1∼3개의 고래가 달린 부분적인 온돌 난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11)

 발해인들은 왕이나 왕족, 귀족들은 산에 陵墓를 쓰거나 陵園에 매장하였으나, 일반 평민들은 공동묘지를 이용하였다. 발해 무덤들은 대체로 5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312) 土坑封土墓는 火葬을 하고 목관을 사용하였다. 石壙封土墓는 안에 목관을 두고 위에 봉토를 하였으며, 石棺封土墓는 큰 돌을 천장에 덮었다. 石室封土墓는 봉토가 높고, 천정은 抹角天井으로 된 것도 있고, 큰 돌로 평평하게 덮은 것도 있다. 塼室石頂封土墓는 정효공주무덤과 같이 천정은 판석으로 덮고 그 위에 塔式 건축물이 있기도 하다.313) 발해 무덤의 형식은 초기에는 이 지역 石棺墓의 전통과 고구려 석실봉토묘의 형식을 계승하였지만,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당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매장습속상의 목관장, 화장, 합장,314) 2차장은 발해 민족의 복잡한 구성, 계급과 지위의 차이 및 매장습속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발해와 관련된 전설로는 “남자는 智謀가 뛰어나고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용맹스러워 발해인 3명이면 호랑이 한마리를 당한다”는≪송막기문≫의 기록과 새나 짐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薩多羅에 대한 것이 있으며,315)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발해인의 총명함과 용감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303)≪金史≫권 7, 本紀 7, 世宗 大定 17년.

창혼의 풍속이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씨족사회로 향하던 과도기에 남아 있던 풍속이라는 지적을 보더라도 이것이 고구려인보다는 말갈족에 가까운 혼인형태였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宋德胤,<渤海民俗論>,≪社會科學戰線≫1985­1 ; 崔茂藏 역,≪渤海의 起源과 文化≫, 藝文出版社, 1988, 290∼292쪽).
304)≪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傳에는 “혼인에는 폐백을 쓰지 않고, 받은 자는 수치로 여긴다”고 하였고, 또≪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傳에도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바로 행하고,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낼 뿐 재물로 맞는 禮가 없다. 혹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305)한편 왕족인 대씨와 자매를 맺은 ‘다른 姓’은 귀족일 것이며, 왕족과 귀족들이 첩을 두지 않은 것은 역사발전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므로 ‘대씨’는 ‘大氐’의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최태길,<“송막기문”의 발해무첩설을 론박함>,≪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182∼191쪽).
306)방학봉,<정효공주묘지에 반영된 유가사상 연구>(≪발해문화연구≫, 이론과실천, 1991), 91∼108쪽.
307)발해의 법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島田正郞,<新出土史料による渤海國史の新事實>(≪遼朝史硏究≫, 創文社, 1979), 472∼475쪽

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78∼79쪽

魏國忠·朱國忱, 앞의 글, 106∼107쪽.
308)宋芳松,<渤海樂 小考>(≪東洋學≫14, 檀國大, 1984) 참조.
309)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249쪽.
310)상경성 이외에 온돌이 발견된 발해유지로는 흑룡강성 東寧縣 團結遺址, 러시아 연해주의 콘스탄티노프카와 아난예프스카야 유적,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유지 등이 있다(韓圭哲, 앞의 글, 87∼88쪽).
311)송기호,≪발해를 찾아서≫(솔, 1993), 63∼64쪽 참조.
312)李殿福·孫玉良,≪渤海國≫(文物出版社, 1987), 124∼130쪽.
313)무덤 위에 건축물을 짓는 것은 왕실귀족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의 형식이었다고 한다(정영진,<발해무덤연구>,≪발해사연구≫1, 연변대학출판사, 1990, 116쪽).
314)발해 무덤의 주요 특징인 多人葬은 혈친관계가 있는 가족뿐 아니라 주인에게 예속된 노비들도 함께 매장한 결과이다. 발해의 다인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송기호, 앞의 글(1984).

엄장록·박룡연,<북대발해무덤연구>(≪발해사연구≫2, 연변대학출판사, 1991).

연변박물관,<동청발해무덤발굴보고>(≪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315)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

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1, 士庶列傳.

이외에도 오늘날의 경박호 주변에 발해 홍라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송덕윤 저·최태길 역,<발해의 속담과 전설>,≪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