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학과 한문학
발해는 당나라와 가장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는 冊封을 받고 國喪을 알리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나, 교역과 같은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 않게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선진 문화의 수입이었다. 중국 문화를 수입하던 창구로는 장기간 현지에 머물렀던 유학생·宿衛 王族 등을 주로 이용하였을 것이지만, 일시적으로 파견되었던 사신들도 여기에 한몫을 하였다.
문헌에는 발해에서 당에 학생을 파견한 기록이 세 군데 보인다. 첫째는 714년에 발해 학생 6인과 신라 학생 7인이 당의 國子監에 입학하였다는 기록이다.384) 이로부터 100여 년을 뛰어 넘어 830년대에 학생을 파견한 기록이 다시 보인다.385) 당나라에 갔던 발해 사신 高寶英(高賞英)이 833년 정월에 학생들을 교체할 수 있도록 당나라 조정에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미 파견되어 있던 李居正·朱承朝·高壽海 3인을 새로 보낸 解楚卿·趙孝明·劉寶俊 3인으로 교체하였다. 셋째는 837년 3월의 기사이다.386) 발해 왕자 大俊明이 賀正使로 당나라에 갔을 때에 16명의 학생이 동행하였는데, 6명의 학생만 입학을 허락받고 10명은 되돌려 보내졌다고 한다.
당나라 賓貢科에 급제한 발해인들도 역시 국자감에 입학하였던 학생들임에 틀림없다. 당나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외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위해서 특별히 빈공과란 과거를 개설하였다. 여기에 합격한 발해인은 10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되는데,387) 이름이 알려진 것은 세 사람이다. 872년에 급제한 烏昭度(烏炤度),388) 892년에 급제한 高元固,389) 906년에 급제한 오소도의 아들 烏光贊390)이 그들이다.
이상의 사료로 보아 발해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생의 파견은 발해 문화를 꽃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는데, 이 사실은 다음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에 발해 왕이 자주 학생들을 파견하여 京師의 太學에서 고금의 제도들을 익히게 하니 이 때에 이르러 마침내 海東盛國이 되었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渤海).
즉 발해가 9세기에 해동성국이라는 영예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생 외에도 장기간 당나라에 머물면서 선진 문물을 습득하였던 사례로서 宿衛로 보내진 왕족들도 고려해야 한다. 발해에서 王子나 王弟를 숙위로 파견한 것은 12회가 확인된다.391) 이들뿐만 아니라 朝貢使나 賀正使와 같이 그때그때 파견되었던 사신들도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을 통해서 국가에서 필요한 문물들을 수집해 오도록 하였던 사례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학생이나 숙위 왕족·사신들을 통하여 당나라로부터 수입된 문물들은 여러 면에서 발해를 일신시켰다. 이렇게 수입된 당나라 문화로서 발해사회를 이끌어가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 儒學과 文學이라 할 수 있다. 유학은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 질서를 마련해 주었고, 문학은 국가를 이끌어 가던 귀족들의 소양을 한껏 높여 주었다.
384) | ≪玉海≫권 153, 朝貢 外夷來朝 唐渤海遣子入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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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 ≪冊府元龜≫권 999, 外臣部, 請求. ≪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
386) | ≪唐會要≫권 36, 附學讀書. |
387) | 宋基豪,<唐 賓貢科에 급제한 渤海人>(≪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443쪽. |
388) | ≪孤雲集≫권 1,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및 與禮部裵尙書瓚狀. ≪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
389) | ≪全唐詩≫11函 1冊, 徐夤. |
390) | ≪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
391) | 宋基豪, 앞의 글, 431쪽 표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