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군현제도
郡縣制는 전국에 동일한 政令을 가지고 행정구획을 정하여,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으로 하여금 국가의 물적 기반을 구성하는 토지지배 및 조부·공역의 수취체계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고려의 직권적 중앙 권력을 뒷받침해 주는 하부조직인 군현제에 관해서≪高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삼한이 처음 평정되어 아직 행정구역을 정리할 여가가 없었다가 태조 23년(940)에야 비로소 전국의 州府郡縣의 명칭을 고쳤고, 성종이 다시 州府郡縣과 關防, 驛站, 江河, 浦口의 명칭을 고쳐 마침내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12州에 각각 節度使를 두었다. … 그 관하의 州, 郡 총수는 580여 개였다. 우리 나라 지리가 이 시기에 가장 발전되었다. 현종 초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5都護와 75道 安撫使를 두었다. 얼마 후 안무사를 없애고 4도호와 8牧을 두었다. 이후로 전국을 五道 兩界로 정하여 楊廣·慶尙·全羅·交州·西海道와 東界·北界라 하였다. 모두 京 4, 牧 8, 府 15, 郡 129, 縣 335, 鎭 29이다(≪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序文).
이에 의거해 지리지는 현종조 군현제 개편 이후의 5도 양계 체제하의 520여 군현에 관한 연혁을 서술하고 있다.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고려의 지방 행정단위는 5포 양계 아래에 京·較·府·郡·縣·鎭등 여섯 체계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지리지의 구체적 서울은 5도 양계를 각기 京·牧·都護府 등의 대읍을 중심으로 하여 그 領邑 및 屬邑의 來屬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지리지는 소수의 州·府·郡·縣, 즉 「主邑」이 다수의 「屬邑」을 통할하도록 한 대읍 중심의 군현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려의 대읍 중심의 군현제는 태조·성종·현종 등 각 시대의 단계적 정이, 즉 군현명의 개칭과 관할구역의 재편성 등을 통하여 확립되기에 이르렀음을 위의 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신라와 고려의 양시대 군현 조직을 서로 비교해 볼 때 그 군현 단위의 면에서 그렇게 큰 변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군현 조직의 체계적 구조면에서 볼 때 큰 변화가 있었다. 일례를 들면 신라의 9주의 하나인 良州는 그 관내에 1小京·12郡·6停·34縣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태조 23년에 梁州로 개편되면서 安東大都護府-慶州大都督府의 관내 1州로서 편성되었고, 그 관내에 東平縣과, 東萊縣 領縣에서 이속한 機張縣의 단 2읍만을 속읍으로 거느릴 뿐이었다. 또한 신라시대 9주의 하나로서 관내에 15군·34현을 거느리면서 그 자체 3개의 영현을 갖고 있었던 武州는 태조 23년의 군현 개편으로 인해 단지 羅州牧 관내의 하나의 현으로 남게 되면서 그 자체 속읍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고려 태조 23년의 “始改諸州府郡縣名”은 단순한 명칭만의 개칭이 아니라 군현 조직의 구조적 개편작업이 단행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高麗史≫지리지에 나오는 年紀不明의 ‘高麗初’, ‘至高麗更今名’, ‘高麗更今名’ 등의 기사 중 대부분은 태조 23년을 전후한 시기, 혹은 성종조 이전에 군현의 구조적 개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볼 때 태조 23년의 군현제 작업은 이미 속읍을 주위의 대읍에 내속시키는 대읍 중심의 군현제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0416)
고려가 대읍 중심의 군현제로 나아가게 된 것은 신라와 태봉 등 그 이전시기의 군현 조직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나온 방안이었다. 신라의 경우 군·현이 설치된 지역은 모두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였다. 이 제도는 지방 군현의 농민층을 효과적으로 파악 지배하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그것이 곧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각 지방의 城主·將軍 등의 토호세력들의 반기와 농민층의 봉기는 바로 그 단점이 노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소규모의 군·현 단위로 租賦·貢役의 연대적 수취, 즉 族徵·隣徵의 강행으로 인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말려초의 농촌사회에는 많은 逋戶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여 본래의 田里로 환집시키는 정책 및 그 상태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바탕 위에서 그들을 파악 지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요컨대 나말려초에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포호, 또는 帳籍과 현 거주지가 각각 다른 농민층, 거주지와 농경지가 행정구획을 달리 한 경우 등을 통일적으로 파악 지배하는 데에는 소읍을 단위로 하는 것보다 여러 군읍을 단일적으로 파악 지배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정 여러 개의 군현을 통폐합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통폐합하게 되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세력들의 반발이 생기게 마련이다. 고려 초기에 이르러 귀순한 성주·장군 및 새 왕조의 창건을 지지 협찬한 제세력의 이해를 저버리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군현제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시대로부터 내려 온 유제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의 하나로서 고려 초까지 일반행정과 조세행정의 구역이 단일화되어 있지 않고 각각 달랐던 경우도 있었으므로, 고려왕조의 성립 이후에 이와 같은 相違를 가급적 일치시키고 또 이웃 다른 읍으로 유리 도산한 포호들을 효과적으로 파악 지배하기 위해서 대읍 중심의 군현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대읍 중심의 군현제는 태조 때에 그 기초가 이루어진 후 성종조 12목의 설치로 말미암아 더욱 발전하였다.
대읍 중심의 군현제는 현종 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성되어 소수의 州府郡縣, 즉 주읍이 다수의 속읍을 통치하도록 조직되었다. 이들 각 주읍 수령들은 품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각각 그 任內를 통치하는 목민관으로서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국가는 그 다수의 주읍들을 통일적으로 파악 통합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 주읍들을 효과적으로 감독 관장할 수 있는 관원으로 按察使 제도, 즉 道制의 설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안찰사는 각 지방의 수령들이 「奉行六條」를 잘 지키고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黜陟을 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출척의 대상자 중에는 그의 품계보다 높은 수령도 있었다. 이것은 고려 군현제의 미숙성 즉 안찰사제(도제)의 미숙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려 중앙정부의 고차원적 군현 지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양자를 서로 모순 대립케 하여 감시와 견제 및 상호 협조를 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들 사이의 수평적 야합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처럼 안찰사 제도 및 도제는 대읍 중심의 군현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대읍 중심의 군현제도의 상부조직인 도제와 안찰사 제도에 관해서는 별도와 항목에서 다루어지므로 이 글에서는 군현조직체계의 구조적 단위들에 관의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高麗史≫지리지에 나오는 군현단위인 京·都護府·牧과 郡·縣의 군현제 영역에 관해서 살펴 보고, 다음으로 특수 행정조직인 鄕·部曲·所·莊·處·驛에 관해 살펴 본 후,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의 구조 그리고 鄕吏·其人·事審官 등에 관해 살펴 보기로 한다.
0416) | 대읍중심의 군현조직의 성립과 그 변천에 관해서는 金潤坤의≪高麗郡縣制度의 硏究≫(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83) 및<麗代의 按察使制度 成立과 그 背景>(≪嶠南史學≫1, 嶺南大, 1984), 그리고<羅·麗 郡縣民 收取體系와 結負制度>(≪民族文化論叢≫9, 嶺南大, 1988) 등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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