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당간과 지주
이 시기에 건립된 幢竿은 1기가 남아 있으니 淸州市 南門路의 龍頭寺址鐵幢竿이다. 당간과 그 支柱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오로지 이것 하나 뿐인데 이 철당간에는<龍頭寺鐵幢竿記>가 양주되어 있고, 그 말미에 “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이라 보이므로 광종 13년(962)에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고려를 통하여 많은 사찰의 창건과 함께 당간이 건립되었으나, 이렇듯 조성 연대가 확실한 철당간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용두사지철당간은 넓직한 기단과 간대 위에 철제 당간과 양지주가 세워져 있어 가 히 국보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당간은 같은 형태의 철통 20여 개를 연결시켰는데 밑에서부터 세 번째 철통 주위에 철당간기가 있다. 양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내측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으나 외면의 중앙에는 세로로 된 굵은 융기선이 장식되었다. 그리고 외면의 양측 緣邊에는 가늘게 음각된 線彫가 있어 융기선 좌·우쪽의 선조와 잘 어울리는 장식적인 의장을 보이고 있다. 앞·뒷면에는 주연을 따라 선조가 장식되었는데 柱頭에는 약간의 굴곡을 두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杆은 지주의 상단 내면에 마련되었으며 다른 곳에는 없다. 현재의 당간은 철통이 20개이나 본래는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현재의 높이인 12.7m보다는 더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羅州東門外石幢竿(보물 제49호)이 이 시기에 건조된 석당간으로 남아 있다. 이 당간과 지주를 살펴보면 당간과 그 상단부분은 완전히 남아 있으나 기단은 매몰되어 있음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석당간은 전체가 지주와 같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8각을 이루고 있는데 5매의 돌을 연결하여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8각의 옥개석과 보주를 놓았다.
석당간의 연접은 일반적인 방법을 따른 것으로 각 석재의 양단부를 가늘고 길게 깎아서 간주 두께의 꼭 반이 되게 하여 그 부분에 서로 결착시켰다. 그리고 그 접착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상·하로 두 곳에 둥근 구멍을 관통시켜 杆을 끼워 더욱 밀착되도록 하였다. 이 간주의 연접부분에는 둥근 구멍 밖으로 두 곳에 철대를 돌려 든든하게 하였는데 네 곳에 이러한 장치가 있다.
당간의 상단에 놓인 8각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는데 각 변에는 곡선이 있고 전각에도 반전이 많아 전형적인 고려식의 옥개형태라 하겠다. 그 위의 보주는 섬세한 작풍은 아니나 정상부의 장식으로 조화가 잡혀 있다.
양 지주는 낮은 편인데 지주의 내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외면이나 앞·뒷면에도 조각이 없어 간결 소박하고 견실한 지주라 하겠다. 지주의 정상부는 원면이 평평한데 거의 외면 가까이에 이르러 원호를 그리면서 외면과 접하는 곳의 각을 깎았기 때문에 앞이나 뒤에서 보면 그 곡선이 완연하다.
당간의 고정은 내면 상단에 간구를 파서 시설하였는데 당간의 아래를 鐵 製帶로 여러 번 돌려 양 지주의 간구에 끼워 고정시켰다. 이 석당간과 지주는 그리 큰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석당간과 지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에 세워진 철당간과 석당간, 그리고 그 지주를 살펴보았거니와 이 밖에도 석당간은 지정되지 않은 것이 몇 군데 있으나 그 기본양식은 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
이 시기의 당간 가운데에도 신라시대와 같이 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 상당한 수인데, 각 지역별로 몇 기를 예로 들면 瑞山 普願寺址幢竿支柱(보물 제103호)와 天原 天興寺址幢竿支柱(보물 제99호), 春川 槿花洞幢竿支柱(보물 제76호)와 洪川 希望里幢竿支柱(보물 제80호), 南原의 萬福寺址幢竿支柱(보물 제32호)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이들 지주의 양식은 거의 같은데 양 지주는 약 6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본래는 기단 위에 당간과 지주가 놓였었는데 현재는 기단과 간대석 등이 교란된 것도 있다. 양 지주의 하부는 하단에서 약 70cm까 지가 기단부에 묻히는 부분으로 곱게 치석하지 않아 거칠게 보인다. 마주 보는 양 지주의 외측은 종선대가 있으나 내측면은 조식이 없고 상단에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구가 있으며 중간에는 간공이 뚫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