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농업생산기술의 고도화
조선 전기의 농업 생산기술은 크게 수전농법과 한전농법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조선 전기를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이들 두 농법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발전은 시비법에서도 두드러진다. 특히 이러한 발전은≪농사직설≫·≪금양잡록≫을 중심으로 한 15세기적인 농법이≪농서집요≫로 나타나는 16세기 전반의 농법, 그리고≪농가월령≫으로 기술되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농법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객관적으로 검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가) 수전농법의 발달
조선 전기 수전 농법에서의 생산 기술발달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이미 벼농사에 있어서는 우리의 독특한 기술인 수전 직파 연작법이 15세기 농서인≪농사직설≫로 정착되었다. 이 중 가장 특징적인 기술은 이른바「草茂密處」와「沮澤潤濕荒地」등의 황무지를 수전으로 개간하고 숙전화하는 기술이었다. 이처럼 이 시대에는 저습지를 수전으로 개간하는 작업이 널리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 전반적으로는 종래에 비하여 수전 면적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갓 개간되어 척박한 열등지에는 晩稻가 연작되었을 뿐 아니라, 기후가 가물어 수경법으로 직파가 불가능할 때는 한전 농법을 응용한 乾耕法에 의해서도 벼가 재배될 수 있었다.
이처럼≪농사직설≫에서 드러나고 있는 조선 전기의 벼농사 기술은 수전의 새로운 개간과 개간된 수전의 숙전화라는 이 시대 농업상과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른바 輪木 등의 농구들이 동원되어 생산의 외연적 확대에만 주목하는 시비법과 긴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이 시기 벼농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농사직설≫의 移秧法은 수리 및 생산의 기술체계에 있어서도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그 때문에 이앙법은 경상·강원의 두 도에서만 한계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마저도 노동력이 부족한 대농층의 제초문제 해결책이었거나 특수한 토양에서만 어쩔 수 없이 요구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정부는 이앙기에 가뭄이 발생되면 농사를 모두 망친다는 이유로 이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더욱 한계적으로만 존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農書輯要≫(중종 12년, 1517)에 실린 16세기 전반의 수전농법은 중국 농서인≪농상집요≫의 기술 수준보다 크게 앞서 있을 뿐 아니라, 이미 歲易농법을 극복하였다는 점에서≪농사직설≫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평가된다. 당시의 벼농사는 부족한 수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수전과 한전을 서로 교대하는 조선 특유의 回換農法이 이루어지는 윤답지대와 水稻만을 매년 경작하는 산곡의 常耕지대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었다. 윤답지대에서는 매년 전곡과 수도가 서로 돌려가면서 경작되었고, 가물어서 직파가 불가능 할 때는≪농사직설≫에서처럼 건경이 행하여졌다. 한편 상경지대는 골짜기여서 수전이 크게 부족하여 세역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앙법이 채택되고 있었다. 이처럼 이앙법은 상대적으로 좁은 골짜기란 지형조건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수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관개수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16세기의 이앙법도 오로지 제초문제 때문에 요구되었다는 점에서, 토지생산성만을 높이기 위한 18세기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이 시대 이앙법에서는≪농사직설≫의 수준을 앞서는 확실한 기술진전이 보여진다. 이른바 이 때부터 養苗處와 本畓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이앙이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우리 농구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전반의 수전농법은 아직도 부족한 수원 때문에 회환농법과 건경법이 불가피하였으며, 그나마 매년 연작되었던 산곡지대의 이앙법도 오직 ‘雜草茂盛’이라는 상황에만 대비하는 여전한 조방성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16세기 말의 농법을 담고 있는 17세기 초의 농서인≪農家月令≫(광해군 11년, 1619)의 벼농사 기술에 대해 살펴보자. 특히 여기에서는 건파법의 발달상이 두드러져서 파종·복토한 후에 번지의 일종인 ‘柴扇을 끌어 진압 처리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는 같은 작업을 ‘足種하라’고 지시한≪농사직설≫의 경우보다 훨씬 발달된 형태였다. 또한 여기에서는 密達租라는 건경에 알맞은 새로운 벼 품종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러한 건경법의 발달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이미 마른 못자리를 만드는 기술인「乾秧法」이 권장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의 전환이 보다 더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지만, 여기에서조차 이앙법은 제초 횟수를 4회에서 2회로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만을 가진 것으로만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15세기에 이르러 일단 완성된≪농사직설≫의 조방적인 수전농법은 16세기 전·후반으로 전개되면서 점차 발전하였다. 이른바 갓 개간된 넓고 척박한 수전을 대상으로 늦벼(만도)를 직파하며, 가물어서 그것조차 불가능할 때에만 건경을 행하던 15세기의 벼농사법은 이제 16세기 전반에 이르러 부족한 수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밭작물과 수도를 매년 교대로 경작하는「회환농법」을 출현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가뭄에 벼를 재배하는 독특한 우리 농법인 건경법은 더욱 발전하여, 16세기 후반에는 건파된 도종을 신속히 진압하기 위한 새로운 농구와 그에 알맞은 도종을 출현시키고 있었다.
한편 법으로도 금지되고 기술적으로도 미비하였으며, 15세기 이앙법은 16세기 초에는 산곡지대를 중심으로 보다 발전하였으며,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마른 못자리 기술(건앙법)을 새로이 낳을 정도로 더욱 진전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조선 전기의 이앙법은 농사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제초 노동의 절약에만 주목함으로써 오로지 노동 생산성만을 높이기 위한 기술이란 한계를 드러내 보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수전농법의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발달은 이 시대 농업생산성 발전의 중요한 일환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나) 한전농법의 고도화
조선 전기 한전농업의 발달을 규명하기 전에 우리는 15세기 우리 농서들에 실린 당시 한전농법의 실상을 파악해야만 한다. 15세기의 한전 윤작체계를 살펴보면≪농사직설≫의 단계에서도 이미 건경이란「1년 2작식」윤작체계가 행해지고 있었으며, 또 일부 빈농층의 경우 작물이 자라고 있는 기간 중에 같은 한전의 묘간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간종법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한전 작부 체계는「1년 1작식」·「1년 2작식」·「휴한식」의 세 종류로 구성되었으며 그 지배적인 형태는「1년 1작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2년 3작식」의 근경법과 간종법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윤작 체계들은 우등지에서만 행해지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또한≪금양잡록≫에는 모두 56품종의 한전작물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기장과 조·콩·팥·피·밀의 순으로 품종수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맥류가 가장 적은 품종분화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두류 또는 高田作物들이 가장 풍부한 품종 분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기장·조·피 등의 고전 작물들이 압도적인 비중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세기 한전작물의 파종법은 足種法·條播法·撒播法의 세 형태가 있었지만 당시에 가장 널리 사용된 파종법은 바로 조파법이었다. 이는 곧 조선 전기의 파종기술이 노동생산성에 기초한 조방적인 것이었음을 웅변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15세기의 한전농법은「1년 1작」을 중심으로 한 중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중국 화북농법의 畎種法과 연결되는 노동 절약적인 조파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15세기 한전농법은 16세기 전반의≪농서집요≫단계에서도 그대로 견지되었다.≪농서집요≫에서는 중국 농서인≪농상집요≫와 달리 콩과 팥이 연작식 윤작체계에 깊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이른바 콩·팥의 경우 早種은「1년 1작식」으로 春種되었고, 晩種만이「1년 2작식」의 작부 체계에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농서집요≫에서는 麻에 대해서 매년 回換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농서집요≫나≪농사직설≫의 경우보다 매우 발전적인 기술이었다. 이처럼≪농서집요≫의 파종법은 그 대본이었던 중국 농서≪농상집요≫의 경우와 다르거나 15세기 우리 농서인≪농사직설≫과도 다른 독자성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계에서는 모든 작물의 파종이 犂耕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播種溝를 만드는 단순 작업보다는 反耕이라는 全面反轉耕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절약을 위해 作條犂에 의한 파종구 작성만으로 그친≪농사직설≫단계의 조파법을 크게 능가하는 새로운 기술발전이라 하겠다.
16세기 전반의 경우「1년 2작식」작부 체계에 가장 깊이 편입된 작물은 바로 콩과 팥이었지만, 이들 두 작물은 전년도의 穀根田에 춘종되거나 오뉴월에 보리와 밀을 수확한 바로 그 兩麥根田에 만종되고 있었다. 이를 보면 16세기 전반에는「1년 1작식」작부체계와 ‘양맥(콩·팥)’이라는「1년 2작식」작부체계가 병존하였으며, 이는 아직 작부체계 고도화가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16세기 전반의 우리 농업은 최소한「1년 1작식」의 작부체계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특히≪농사직설≫에서조차 ‘田多的歲易’이란 말로 휴한을 권하였던 麻田에까지 매년 회환하는 회환농법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농서집요≫의 단계에서는 이미 휴한법을 거의 극복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농업이 이미 휴한법을 극복한 상경농업의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17세기 초의 농서인≪농가월령≫을 통해 16세기 말의 한전농법을 살펴보면 사정은 크게 변하였다.≪농가월령≫에서는 추맥의 파종이 모두 근경법이나 간종법과 관련되어 있는데, 麥根田에 추맥을 연작하는≪농사직설≫과≪농서집요≫의「1년 1작식」농법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맥작이 반드시 다른 작물의 윤작에 동원되는「1년 2작」또는「2년 3작식」의 작부체계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농가월령≫에서는 黍·豆·粟·木麥根田에서 火耕法을 통해 추맥을 재배하는 15세기≪농사직설≫의 조방적인 농법이 완전히 整地한 뒤 파종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였음도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이 단계에는 추맥이 실패했을 때 파종하는 얼보리(凍麥)의 파종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었다.
또한 조나 콩의 경우에도 파종 및 작무법에서부터 새로운 기술 변화가 나타났다.≪농사직설≫에서는 한전에다 두둑(畝)을 만들어 그 두둑 위에다 이들 작물을 파종하고 있었지만, 그와는 달리≪농가월령≫에서는 熟治한 후 고랑을 내고 거기에 보리·조·콩·들깨·참깨 등을 파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맥전에 콩과 조를 간종하는 ‘골고리’란 間種法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이 ‘골고리’ 농법은 그 작무법에서부터 기술 혁신을 실현하였다. 이른바 ‘反耕旱田 作小骨巷’이라 하여, 한전을 번경으로 갈아 엎은 뒤 작은 고랑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은 고랑은 쟁기가 한번 起耕하여 만든 15세기적인 파종구인 畎이 아니라, 한전을 전면경한 뒤 숙치하고 그 위에다 기경하여 만든 작은 파종구였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미 16세기 말이 되면 作畝·整地法에서부터 새로운 기술혁신이 일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있어 한전 농법은「1년 1작식」작부 체계가 확립된 15세기부터 끊임없이 발전하여 16세기 말에 이르면 근경과 간종이 일반화되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그러한 발전은 번경이란 전면번전경의 보편화에 따른 숙치·작무법의 혁신과 점차 집약적인 시비법의 개선에 크게 의존하였다. 16세기 말의 사정을 보여주는≪농가월령≫의 집약농법은 그러한 지속적인 한전 농법 발전의 산물이었으며, 결국 그 흐름은 토지 생산성에 주목하는 조선 후기 농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 시비법이 발달
조선 전기 농업기술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앞서 고찰한 수전 및 한전 농법 뿐만 아니라 시비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선 15세기 비료의 존재형태에 대하여 알아 보자. 15세기 농서들을 통해 밝혀진 당시의 비료는 크게 보아 전혀 가공을 하지 않은 것들과 어떠한 형태로든지 일차 가공을 가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비량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당시의 토지 비옥도는 전반적으로 척박하였으며, 비록 이러한 초보적인 비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15세기의 시비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전 농업에서는 客土와 草木肥를 중심으로 한 시비가 행하여졌다. 특히 수전에서는 저습한 토양에 완전히 腐熟되지 않은 비료를 넣어 쟁기질로 골고루 갈아 그 부숙을 촉진하였다. 또한 한전에서도 初耕 전후의 시비법, 그리고 파종시와 파종후의 시비법이 있었지만, 가장 많이 행해진 糞種의 경우까지도 주로 열등지만을 중심으로 시비되었다. 단지 최우등지인 麻田에서만 牛馬糞을 농지 전체에 시비하였는데, 이러한 발전적인 시비법은 17세기 농서인≪농가월령≫단계에서야 더욱 보편화되었다. 결국 15세기에는 비옥한 우등지에는 거의 시비를 행하지 않은 채 척박한 땅에만 여러 종류의 비료를 한계적으로 시비하는 糞種法이 널리 행해졌었다. 아직 당시의 시비법은 경작의 외연적 한계를 넓히는 조방적인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방적인 시비법은 16세기 전반의≪농서집요≫단계에서야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농서집요≫의 耕地편에서는≪농상집요≫가≪제민요술≫말미의<雜說>을 인용한 대목을 번역하면서 새로운 본격적인 廐肥를 전지에다 시비하는 획기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농서집요≫이두문에서는 추수·타작 후에 남은 부산물과 춘하절에 刈取하여 쌓아둔 산야잡초를 매일 외양간에 3寸씩 깔아 두었다가, 매일 아침 우마분과 함께 꺼내 적재한 뒤 12∼1월 사이에 척박한 전지에 糞田하는「糞收貯法」이란 새로운 廐肥 제조법이 실려 있다. 이 시비법은 봄과 여름 사이에 가는 버드나무 가지를 베어 외양간에 깔아두었다가 시비하는 15세기≪농사직설≫의 麥糞田法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反耕으로 草肥·入糞 시비하라’는 대소맥의 경우와 달리, ‘水稻에 불을 질러 기경하는 시비’나 蕎麥의 ‘잡초를 反耕하는 시비’, 참깨(胡麻)의 분종법 등에서는 조방적인 시비법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 전반까지 아무리 중요한 주곡작물이어도 척박한 땅에만 분종하였고, ‘反耕’ 등을 통한 잡초의 비료화가 시비법의 기본 원리를 이우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전체 농지에다 시비하는 분전법이 예외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6세기 말의 농법을 보여주고 있는≪농가월령≫에서는 무엇보다 그러한 시비법의 한계가 여러 측면에서 깨뜨려졌다. 이 시대에는 이미 한전에서의 根耕과 間種이 일반화되어 있었으므로,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하기 위한 시비법의 발달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적 요구는 바로 ‘맥전에 대한 糞灰 및 구비 시비’와 ‘녹두의 掩耕’, 그리고 ‘春牟 종자를 위한 雪汁漬種法’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16세기 말의 시비법은 15세기의 그것을 개량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특히 한전 비료의 주종을 이루는 ‘분회’의 재로는 草木灰였는데,≪농가월령≫에서는 이를 모으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아궁이 재를 모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15세기처럼 지력 유지를 위하여 기장·조를 재배한 한전을 이듬해에 녹두·동배·소두전으로 교대할 것을 권유할 정도로 작부 체계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한편≪농가월령≫에서는 수도작의 비료로 ‘早稻秧基의 비료’ ‘조도·차도·만도를 수경한 수전의 基肥’ ‘모내기한 本畓에의 追肥’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조도앙기의 비료로서는 구비를 가장 중요시하였는데 비해, 나머지 수전에서는 초목비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16세기의 수전 시비법은 초목비로 사용된 비료의 원재료도 풍부해졌을 뿐 아니라, 이를 인분뇨·廐尿 등과 혼합하여 추비로 만든, 이른바 광의의 구비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발전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농가월령≫말미의<잡령>에서는 厠間구조의 개량을 통한 인분뇨 수집법을 서술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 시비법의 발달 과정은 전반적으로 보아 구비의 발달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벼 농사의 경우는 이앙법의 점차적인 보급에 따른 조도앙기의 새로운 비료 개발을 위해 지속적으로 고양되어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시비법 발전이야말로 바로 조선 전기의 농업발전의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