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노동수단의 발달
조선 전기 농업생산을 둘러싼 노동수단으로서는 역축, 농구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노동 수단이 조선 전기 전기간을 통하여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여러 농서들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 역축
조선 전기의 가장 주요한 力畜은 바로 ‘소’였는데, 15세기≪농사직설≫은 반드시 ‘두 마리의 소’를 한 조로서 작업에 동원할 정도로 풍부한 축력을 전제로 저술되었다. 그에 비해 같은 시대의 경기도 금양현 소빈농층의 농법을 기술한≪금양잡록≫에서는 “100家가 사는 마을에 농사 일을 맡을 수 있는 소가 겨우 몇 마리뿐이어서 사람이 소 대신 쟁기를 끌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축 소유의 불균등성은 지속되었을 것이지만, 소의 총수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함에 따라 점차 증가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16세기 전반의 농서인≪농서집요≫의 농법도 풍부한 축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16세기 말의 사정을 전해주는 17세기 초의 농서인≪농가월령≫에서도 소의 보유는 농업을 위해서는 사활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농가월령≫의<잡령>에서는 “농사는 전적으로 소를 키우는 데 달려 있으므로 겨울철에 미리 잘 키우고 보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이처럼 역축의 확보와 그에 의존하는 생산력 발달은 축력 이용과 廐肥 제조라는 두 측면에서 이 시대 농업 발전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그 결과 소의 증식과 이용은 점차 더욱 집약화되고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나) 경려와 농구
한편 15세기 농서인≪농사직설≫에 ‘耕地’편이 따로 독립되어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의 농업에는 쟁기질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른바 이 때에는 이미 ‘소에 의한 쟁기질을 전제로 한 농법’으로서의 경법을 논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15세기에 가장 일반적인 경법은 바로 ‘초경-재경’ 작업이었는데, 특히 벼와 9작물이 이러한 방식으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초경만을 행한 작물이나 쟁기질을 전혀 행하지 않은 작물도 역시 많았으므로 아직도 조방적인 경법이 일반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足種法’으로 파종한 주곡 작물들만은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집약적인 쟁기질을 하였던 것이다.
15세기에 가장 널리 사용된 쟁기는 바로 파종구 작성에 쓰인 볏(鐴)이 없는 作條犂의 ‘발외(把犂)’였으며, 또한 作畝用 쟁기인 ‘’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麻田의 ‘縱三橫三’경 등에 사용된 유벽번전려(有鐴反轉犂)도 등장하였는데, 특히 이 ‘보’ 쟁기는 쟁기 날이 좁았고 두 마리 소에 의해 견인되었다. 이와 같은 15세기의 농구 체계는 다양한 牛耕具와 手耕具를 분화 발달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쟁기와 축력 농구가 등장한 것에 비해, 소빈농층의 경기작업에서는 ‘보’ ‘삷’ ‘래’ 등의 빈약한 수경구만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15세기에는 쟁기 및 농구의 분화·발달이 아직도 불충분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조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6세기의 농서≪농서집요≫에서도 ‘경지’편을 따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긔경기”라 풀이하였다. ‘경(耕)-파(擺)-노(勞)’ 등의 축력 일관 작업을 한결같이 강조한 중국 농서들에 비하여,≪농서집요≫는≪농사직설≫과 같이 쟁기질한 다음 우리 고유의 농구인 밀개(推介)·쇠스랑(鐵齒擺) 등으로 熟治·摩田작업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이미 대소맥의 犂耕이≪농상집요≫의 수준을 넘고 있었다. 16세기 전반에 있어 가장 치밀한 경법을 행한 것은 麻田이었는데, 여기에는 가로로 세 번, 세로로 네 번 전면경하는, 모두 일곱차례의 전면번전경이 행하여졌다. 특히 이러한 麻田의 경법은 ‘反耕’이라 기록되었는데, 그러한 표현은 대소맥·교맥 등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어 15세기보다 有鐴反轉犂가 더욱 많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농구로서는 15세기의 그것과 같은 쟁기·쇠스랑(手秋郞)·밀개(推介)·작도, 써레(所訖羅)·호미(鋤)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처럼≪농서집요≫는 역축을 기본동력으로 하는 농구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아울러 독특한 우리 고유의 농구들이 적지않게 등장하였다. 특히 번경이란 이름의 유벽번전려에 의한 전면번전경의 사용이 널리 행하여졌다는 사실은 여경법의 발달을 확인해 주고 있다. 아직 16세기 전반기에서도 노동수단이 노동 생산성에만 의존하는 조방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마전의 새로운 경법은 보다 높은 수준의 집약적인 여경법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끝으로 16세기 말의 농법을 보여주는≪농가월령≫의 농구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농가월령≫은 ‘正月節 立春’조에 ‘비농기(備農器)’라 하여 ‘기본 농구를 준비하라’0156)고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약간의 농구가 존재0157)하였는데, 이는 15세기의 그것보다 더욱 분화·발전된 형태임이 분명하다. 이들 중 중려는 기경용(起耕用) 쟁기이고 소려는 천경용(淺耕用) 쟁기였는데, 이로 보아 아마 개간용(開墾用)의 대형 쟁기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여구는 ‘보습’이고 경철은 ‘볏’을 의미하였다. 병대삽은 ‘쌍가래’를 의미하며, 호치파는 ‘쇠스랑’이고 과미는 ‘괭이’, 서흘라는 ‘써래’, 번지판은 ‘번지에 부착하는 널판’이며, 시선은 ‘시선번지’였다. 이와 같은 다양한 쟁기류와 그 부품들 ‘쌍가래’, ‘시선번지’ 등의 존재는 16세기 말에야 이루어진 농구 체계에 있어 새로운 발전상이었던 것이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수전과 한전에서 모두 ‘秋耕으로서의 번경’이 행해졌는데, 이렇게 지력증진을 위한 전면경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15세기의 그것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천수답에 건파를 했을 때에는 시선번지를 끌어 토양의 모세관 현상을 차단함으로써 수분 증발을 억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력유지를 위한’ 初耕과 ‘作畝 작업을 위한’ 再耕에서도 有鐴犂에 의한 전면반전경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간종법을 위한 경기 작업으로 양무간을 천경할 때는 한 마리 소가 끄는 소형의 作條犂인 소려가 사용되었다. 이처럼≪농가월령≫의 단계에서는 토지이용율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는 근경법과 간종법이 널리 보급되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유벽려에 의한 전면번전경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발전된 양상을 드러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전기의 노동수단이 역축의 점차적인 보급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축력농구와 인력농구의 상호 보완적인 개발로 전개되었다. 특히 이는 쟁기의 다양한 분화와 더불어 전면반전경의 보편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노동수단 발달은 제언 개발에서 川防 관개로 전개된 수리시설의 확충과도 깊은 연관을 가졌다. 결국 이러한 노동수단의 발달은 생산 기술의 고도화와 맞물림으로써 이 시대 농업 생산력의 발달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