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상업
1. 도시상업
조선시대 도시상업의 성격을 구명한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지만,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이 방면의 문헌이 희소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으나, 과거 몇몇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참고로 하여 그 대표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六矣廛의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
육의전이라 하는 官府 어용상업기관은 한마디로 말하여 직업상인을 필요로 하였던 관인지배자들이 그들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상업경영을 보장하는 대신 그 代賞給付로서 과중한 국역을 부과시켜 상인계급의 이윤과 재산을 침해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다루어 보려는 육의전은 그 성립, 종류와 상품, 건축구조를 비롯하여 서구의 길드를 방불케 하는 조직과 어용상전으로서의 의무와 권리 등을 해명하고, 그 발전과정을 언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조선시대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은 국초 이래로 농본주의를 국시로 하여 공업의 발달을 억압하고 상업의 자유로운 신장을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 지방의 생산력이 빈약한 데다가 교통의 불편으로 상업거래가 번영치 못하였으며 아울러 상업상의 과세에서 가렴주구가 심하였고, 도시에서의 어용상인, 지방에서의 시장상인에게 각각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일반 商賈의 자유로운 발전을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상업은 농업과 가내수공업이 밀접히 결합되어 있던 만큼 극히 일부의 임시적인 교환이 각 개인간에 이루어진 것 이외에 전국적으로 1천여를 헤아리는 향시가 그 지배적인 형태였으나, 약간 진보된 상업 형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첫째, 도시 상업기관으로서 서울 公廊商店인 市廛과 거기에서 발달된 육의전, 그리고 개성·평양 등 도시의 상설점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정부 및 여러 관아의 수요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발생·유지된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객주·여각이 지방도시의 화물집산지에 존재함으로써, 화물의 도매·화물보관의 창고업·위탁판매업·화물의 운송업·고객의 편리를 도모하는 금융업 등을 겸하는 상업기관의 구실을 하였다.
셋째, 행상(주로 보부상)이 있는데, 이들은 상업집산지에서 구입한 일용잡화물을 등에 지거나 보로 싸서 지방 향시 또는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였다.
그 가운데 서울 시전은 그 기능으로 보아 도시상업의 대표적 존재였고 후에 발생한 육의전은 官府에 대하여 막대한 국역을 부담하는 반면, 그 판매하는 상품에 관하여 독점판매권을 행사하는 특수한 상업조합이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시전은 문헌상으로 신라 소지왕 12년(490) 3월에 이미 보이고 있으며0159) 그 뒤에 동시0160)·서시 및 남시0161)로 발달하였다. 이는 일본 京都의「동시」·「서시」나 당의「町」과 거의 동일한 상업기관으로서, 市典0162)을 두어 이것을 감독 영솔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의 日市(鄕市)로서의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상업이 있었음은≪新唐書≫신라전과≪鷄林類事≫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건국 초인 태조 2년(913) 3월에 이미 시전을 설립하였으며, 특히 그 위치를 도성 중심지에 택하여 일대 미관을 이루었다고 하며,0163) 더욱이 고려 말엽 개성 시전의 번영은 외국 사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0164)
고려시대의 시전에는 그 보호 감독기관으로서 개경에 京市署0165)를 설치하여 시전의 물가조절과 시전의 상황을 감독케 하였다. 경시서는 상행위의 감독만이 아니라 상품의 종류에 관하여도 통제를 가하여, 관이 허가한 물건 이외에는 임의로 매매할 수 없었으며, 이를 범할 경우에는 극형에 처했던 일도 있었다.0166) 또 경시서로부터 가격에 대한 평가를 받고 稅印을 찍은 후에 비로소 매매할 것을 허락한 일도 있었다.0167) 이와 같은 유래를 가진 시전은 조선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계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