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농촌의 집 구조와 생활
일년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종하고 모를 내고, 추수하여 타작하는 등 쉴사이 없이 바쁜 농부들의 집에는 마루가 없다. 대신 맨바닥의 토방 또는 봉당이 있는데 이는 신발 신은 채로 드나들게 하려는 배려에서였다. 농부들은 이 봉당에서 갈무리하거나 비를 피해서 하는 작업 등을 하였다. 대개 죽담 위에 설치된 봉당은 마루가 생략되었을 뿐이지 차지하는 위치나 공간 기능은 마루나 대청의 구실을 그대로 하였다.
客舍의 殿牌(또는 闕牌)를 모신 정전도 마루를 깔지 않고 方塼을 부설하기도 한다. 壁大廳이라 부르는데,584) 살림집의 봉당이 맨바닥인 점에서 보면 훨씬 고급스러운 치장이다. 방전은 민무늬이기도 하고 연화나 보상화로 무늬를 놓아 장식하기도 한다. 무늬 있는 방전은 주로 절의 金堂에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로 방전 위로 마루가 깔리기 시작하며, 無爲寺 極樂殿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585) 이후 살림집의 봉당에도 마루가 깔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어 이제는 숨은 고 장 아니고는 봉당집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봉당집은 토담으로 짓는 집에서 흔히 본다. 이런 집은 대부분 소박하며 전문가에 의해 지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이웃 주민들이 협동하여 짓는다. 이러한 소박한 모습은 후대에 조성한 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하회마을에 있는 봉당집처럼 방 한 칸에 투덕투덕한 벽, 그리고 지붕 아래의 공간이 다 열려 있는데 맨바닥이 전부이다. 특히 마당에서 훨씬 높게 맨바닥의 토방이 조성되어 있어 그 용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풍속도 등을 통해 보여지듯 밥을 먹을 때도 봉당에서 신발 신은 채 먹었 다. 그리고 방은 잠을 자는 장소로 요긴하였다.
지붕은 대부분 초가이다. 초가삼간이라 하면 보통 안채를 지칭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집에서는 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를 모으거나 농기구들을 말끔히 씻어 가지런히 두었다가 다시 쓸 수 있게 보관하는 시설로 헛간이 있다. 좌우와 앞쪽은 터놓고 뒷쪽에만 벽체를 쳐 잿간이라 하였다. 잿간은 한 편에 부춛돌을 놓아 측간을 설치하기도 한다.
측간을 2층처럼 만들어 층층다리로 올라가 일을 보면 아궁이에서 거두어 온 재나 깔아놓은 풀과 함께 퇴비로 이용한다. 물론 아래층에도 문이 있어 퇴비를 꺼내기 좋도록 하였다. 또 외양간은 소가 쉬는 장소이나 호랑이와 같은 큰 짐승들로부터 소를 보호하여 주는 기능도 지녔다. 그 밖에 돼지우리와 닭장도 시골집의 구조 가운데 하나인데, 특히 돼지우리를 멋지게 짓고 여러 마리를 키우는 것이 개성지방의 풍속이었다.
노적 가리를 쌓을 형편은 못되어도 곡식을 저장할 곡간은 있어야 한다. 그만도 못한 처지이면 뒤주를 만들어 낱알을 저장하였다. 뒤주는 가을에 가득하게 채워 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꺼내다 쓰도록 시설되어 있다.
형편이 좋으면 말을 키을 마굿간이나 달구지나 수레를 넣어 두는 수렛간 도 있다. 사인교나 말안장 등을 넣어둘 마판도 시설된다. 일하는 匠人의 집 이라면 일간도 있다.
이런 시설이 갖추어진 집도 초가삼간이라 부른다. 대소의 차이와 넉넉하 냐 부족하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초가삼간이 결코 적거나 단순한 집은 아니었다. 당당한 초가는 구조도 장중하여서 기와로 바꾸어 이면 곧 기와집이 될 만하였다. 우물과 수채시설도 있고 장독대도 있다. 둘레에 담장을 쌓아 짐 승들 접근을 방지하였다.
그런데 동네에 낙향한 지식인들이 경영한 집 또는 別墅(또는 別業)나 墓幕 같은 것이 있으면 지방 토호들의 집은 이에 자극받아 더욱 충실해지게 된다.
향리의 제택에도 정자를 부설하였다. 울타리 안에 짓기도 하나 경치가 뛰 어난 자리를 골라 조영한다. 외딴 곳에 지은 정자에는 廚舍를 부설하여 수 발들 수 있게 마련하였다. 논둑에 茅亭을, 밭둑에 원두막을 세운다. 이것들 은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이런 점에서는 도시의 집들에 비하여 더 활기찬 기운이 시골집과 살림에 넘쳐 흘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