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창제자
정음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지하게 논의된 일이 없다.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親制說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을 도와서 만들었다는 協贊說이 있어 왔는데, 나중 설이 도리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이 협찬설은, 따지고 보면 아무 근거도 없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종이 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 25년말 이전이었으므로, 만약 이 통설의 근거를 찾으려면 그 때에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을 도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 증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정음과 관련된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세종 26년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세종으로서는 도저히 정음을 만들 수 없었으리라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런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이 협찬설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아마도 成俔이≪慵齋叢話≫에 적은 것이 그 시초가 아닌가 한다.
세종이 諺文廳을 설치하여 申高靈, 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드셨다. … 비록 배움이 없는 부녀자라도 쉽게 배울 수 있다. 聖人이 물건을 만드는 지혜는 사람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成俔,≪慵齋叢話≫권 7).
첫 부분은 분명히 비친제설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뒤에는 聖人을 말하여 임금이 만든 것으로 말하였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데, 전체적으로는 공동제작이라는 인상을 준다.
근대에 내려와서도 柳僖가 그의≪諺文志≫에서 “우리 세종대왕께서 詞臣에게 명하여 蒙古글자를 본뜨고 黃瓚에게 질문하게 하여 언문을 만드셨다”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야사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영향이 현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대개 정음이 세종 28년에 창제된 것으로 보고 26년 이후에 이와 관련된 편찬사업에 몇몇 집현전 학사들이 참여한 사실을 가지고 정음 창제의 일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많은 경우에 연대와 사업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없었던 것이다. 가령 성삼문과 신숙주가 遼東에 다녀온 사실이 전설처럼 전해져 왔는데, 이것은 실은 단종 3년(1455)에 완성된≪洪武正韻譯訓≫을 편찬하면서 중국어의 발음을 분명히 알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정음 창제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정음 창제 당시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창제자가 세종임을 말하고 있다. 우선 정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 12월 말미)의 기사에는 “임금께서 諺文 28자를 親制하셨다”고 분명히 말했고,≪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도 “계해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라고 하였다. 혹시 이런 말들을 모든 공로를 임금에게 돌리는 의례적인 표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결코 의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선 정음 창제가 비밀 속에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현전 학사들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세종 26년 2월에 최만리를 필두로 7명의 학사가 상소문을 올린 것은 정음이 세상에 알려진 지 두 달 뒤의 일이었다. 만약 집현전의 일부 학사들이 그 이전에 정음 창제의 일에 가담했다면 정원이 20명밖에 안되는 좁은 집현전 안에서 비밀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문이 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이 올린 상소문의 첫머리에 “신들이 엎드려 뵈옵건대 諺文 제작은 대단히 신묘하와 創物運智가 千古에 나오나”라고 한 것은 그들도 이것을 임금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상소문을 보고 세종이 한 말이다. 그 중의 몇 대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세종 26년 2월 기해).
㉮ 또 吏讀를 만든 본뜻이 곧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백성을 편케 하기로 말하자면 지금의 諺文도 또한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薛聰만 옳게 여기고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 또 그대들이 韻書를 아느냐. 四聲과 七音을 알며 字母는 몇이나 있는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 잡을 것이냐.
㉰ 또 상소문에서 이르기를 신기한 한 재주(新奇一藝)라고 하니 내가 늙마에 소일하기가 어려워서 책을 벗삼고 있을 뿐이지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해서 한단 말인가.
㉱ 또 내가 늙어서 국가의 서무는 세자가 도맡아서 하는 터에, 작은 일이라도 마땅히 세자가 참여하여 결정하거늘 하물며 諺文이겠느냐.
이 말들은 세종이 정음을 친히 창제하였음을 보여주는 무엇보다도 생생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직접 창제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중 ㉮는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 정음 창제의 본뜻임을 보여준 것으로≪훈민정음≫첫머리의<어제문>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요. ㉯는 이 상소문 직전에 세종의 명으로 중국의≪운회≫를 번역하는 일을 시작한 것을 상소문이 논란한 데 대하여 세종이 그들의 무지를 면박한 것이다. 운서에 관한 그의 연구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는 “신기한 한 재주”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음 창제가 예로부터의 학문을 꿰뚫은 데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이것은 정음 창제의 기본을 밝힌 중요한 발언이다. 끝으로 ㉱는 정음을 매우 중요시한 세종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음 창제는 세종 25년말에 발표되기 전에는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종이 혼자서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밀이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세종의 옆에서 이 창제의 일을 도운 사람, 또는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보다도 東宮(文宗)과 晋陽大君(世祖), 安平大君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이 가끔 이들에게 자기가 만들고 있는 정음에 대하여 설명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숙주가 쓴≪홍무정운역훈≫의 서문 중에 “文宗恭順大王께서는 동궁에 계실 때부터 聖人으로서 성인을 보필하여 聲韻을 參定하시었고”라고 한 것과 성삼문이≪直解童子習≫의134) 서문에서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것을 딱하게 여기시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모든 소리가 비로소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라고 쓴 것이 주목된다. 두 글의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정음 창제이후에 이에 관한 여러 사업에 가장 많이 참여한 이 두 사람의 말을 우리가 의심할 근거가 없지 않은가 한다. 아마도 문종이 가장 가까이서 세종을 도왔음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여섯째 조목에서 “이제 동궁께서 비록 덕성이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아직도 마땅히 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다만 선비의 六藝의 하나일 뿐이며 하물며 治道에는 조금도 이로움이 없는 것이온데, 이 일에 정신을 쓰시고 생각을 허비하시옴에 날이 마치고 때가 옮기어 실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될 학문을 닦는 데 손해가 되나이다”라고 하여 동궁이 정음의 일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지적한 것도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것은 상소문을 올리기 며칠 전에≪운회≫의 번역을 시작하면서 이 일을 동궁과 진양대군, 안평대군으로 감장하게 한 것과135)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따로 한 조목을 추가하여 말한 것은 동궁과 정음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운회≫번역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도 갓 발표된 정음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동궁 및 두 대군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끝으로, 세종이 정음을 창제할 능력이 있었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손에서 책이 떠난 때가 없었다 한다. 정음 창제의 기초가 된 것은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한 음운이론이었는데, 세종은 이 방면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이러한 일면은 최만리 등을 힐책하는 가운데 그 자신이 한 말에 나타나 있으며 정인지·신숙주·성삼문이 쓴 글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신숙주가≪홍무정운역훈≫의 서문에서 “世宗莊憲大王께서 韻學에 뜻을 두시어 깊이 연구하시고 훈민정음 약간자를 창제하시니”라고 말한 것은 정음 창제의 기초가 된 그의 학문을 바로 지적한 것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