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훈민정음과 우리 민족의 문자생활
정음 창제의 가장 큰 실천적 의의는 그로 말미암아 국어의 전면적 표기가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정음 창제 이전에는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해 보는 길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극히 불완전하였고 단편적이었다. 실제로 우리 선조들은 한자의 음뿐 아니라 그 새김(‘天 하늘천’의 ‘하늘’)까지 빌어 쓰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서 항구적인 국어의 표기방법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한문으로 문자생활을 영위하는 길을 걷게되었다.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고 글을 쓸 때에는 한문을 쓰는 기형적인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그러니 문자생활은 극히 일부 계통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국어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표기하고 싶은 소망이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 사이에 쌓여 온 것이다. 정음의 창제는 이 민족적 소망을 성취한 것이었다. 여기에 정음 창제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정음의 창제로 국어의 전면적 표기가 가능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반포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문자생활을 완전히 혁신하지는 못했다. 그 주된 원인은 한자·한문의 사용이 상류층에 그대로 존속된 데 있었다. 많은 선비들은 정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정음을 아는 선비들도 주로 한문으로 글을 썼다. 다만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정음을 사용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정음 창제는 본래 한문을 배척할 의도는 갖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특히≪훈민정음≫(해례본)의<어제문>에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새 문자를 만든다고 한 말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또 세종이 최만리 등에게「便民」을 강조했을 때, 이「民」도 역시 평민을 가리켰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정음은 당초부터 한문의 결함을 보충하는 것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창제 당년부터 사용된「諺文」이란 이름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창제자로서는 정음의 사용 범위를 확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도 않았으나 그 시대상황에서는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15∼16세기에 정음의 보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깊은 일이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충분치 못하고 그나마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없다. 다만 연산군대의「언문 匿名書」사건을 통하여 그 편모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 때에 범인을 잡기 위하여 ‘언문을 아는 사람’을 모두 모이게 하여 그들의 필적을 조사했다고 하니 그 수효가 그렇게 많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崔世珍은≪訓蒙字會≫(중종 22년;1527)의<凡例>에서 지방사람들 중에 언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16세기 전반에 언문의 보급 범위를 알려주는 중요한 증언이다.
느리기는 했으나 언문의 세력은 차츰 커져 갔다. 이 문자는 마침내는 한문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의 문자가 될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정음 창제의 구극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고 글로는 한문을 쓰는 기형적인 생활은 영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그 이름이「國文」으로, 다시「한글」로 바뀌면서 언문일치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음 창제가 지향해 온 구극적 목표를 실현시킨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끝으로, 정음이 하나의 문자체계로서 거둔 성공의 비결은 그 과학성과 함께 그 실용성에 있음을 덧붙여 둔다. 그 과학성에 대해서는 위에서 자세히 설명했거니와, 문자는 날마다 널리 사용되는 것이어서 실용에 간편한 것이어야 하는데 정음은 이 점에서도 아무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