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계 문자사에서 본 훈민정음
인류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아득한 옛날이었다. 이에 대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호로 언어를 적는 방법을 발달시킨 것은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쯤의 일이다. 가장 일찍 사용된 문자는 수메르인의 쐐기문자, 이집트인의 神聖문자, 그리고 중국인의 한자였다. 이 세 문자에서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자가 유래하였다.
문자는 그림으로부터 발달하였다. 이것은 繪畵文字라 부르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자라고 할 수 없다. 기호들이 언어의 어떤 단위(의미의 단위 또는 음운의 단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자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表意文字(ideograph) 또는 表語文字(logograph)요, 둘째는 表音文字(phonograph)다. 표음문자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음절을 표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음소를 표기하는 것인데, 나중 체계는 알파벳(Alphabet)이라 불리고 있다. 이집트문자는 표어문자와 음절문자가 복합된 것이었는데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2천년 경에 이것을 받아 쓰다가 알파벳으로 탈바꿈하였고, 이것이 희랍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알파벳이 그 뒤 구라파에 퍼져 오늘날 세계의 대표적 문자체계가 되었다.
넓게는 세계 문자들 중에서, 좁게는 동아시아 문자들 중에서 정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첫째로 그 독립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음은 한자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음소문자이며 그러면서도 알파벳의 세계에서도 그 어느 계통에도 속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실상 정음과 같이 한 개인이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둘째로 그 과학성을 들 수 있다. 정음은 국어의 음소를 하나씩의 기호로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음소들의 발음 특징을 기호로 나타내고 있다. 가령 로마문자의 ‘M’은 본래 물(水)을 의미하는 표어문자에서 발달한 것으로 그 음소와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가 없는데, 정음의 ‘ㅁ’은 이 음소가 발음되는 입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음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문자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오랫동안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학자들이≪훈민정음≫(해례본) 출현 이후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정음의 우수성을 주장했을 때, 국제 언어학계와 문자학계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외침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런 냉소적 태도가 지난 60년대에 와서 바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포스가 영어로 쓴 논문에서 우리 나라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알파벳”이라고 소개하였고,154) 이 논문이 든 책의 서평을 쓰면서 미국의 맥콜리가 이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확인 한 것이 계기가 되어,155) 정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갑자기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영국의 샘슨은 그의 저서에서 일반 알파벳체계와는 따로 한글을 위하여 새로이 資質體系(featural system)를 세워 논한 바 있다.156) 우리 나라 학자들도 한글이 범상한 알파벳과는 다름을 느껴 왔었는데, 샘슨은 이 다름을 분명히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의 자질체계는 정음 창제에 보인 加畫의 원리를 특히 중시한 것으로 한글의 과학성의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의 과학성을 포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체계가 필요함을 느낀다.
154) | Frits Vos, Korean Writing:Idu and Han'gŭl. (Papers of the CIC Far Eastern Language Institute, University of Michigan, Ed. by J.K. Yamagiwa. Ann Arbor, 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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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 James D. McCawley, Review of Yamagiwa 1964 (Language 42, 1968). |
156) | Geoffrey Sampson, Writing Systems:A Linguistic Introduction(London, 19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