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훈민정음과 관련된 사업들
(1) 언문청과 정음청
정음과 관련해서 종래 큰 주목을 받아온 기관으로 諺文廳과 正音廳이 있다. 언문청의 이름은 세종 28년(1446)에≪태조실록≫을 여기에 두고≪용비어천가≫에 첨입하도록 했다는 기사에 처음 보인다.157) 다음으로는 세종 31년에 내린 교지에 언문청을 처음 설치했을 때 李賢老(善老)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말이 보인다.158) 이것은 이선로가 언문청에 관여했음을 확실히 말해 주는 것인데, 그는 세종 26년 2월에≪韻會≫를 번역하기 시작하였을 때 최항·박팽년·신숙주·이개·강희안과 함께 議事廳에서 일했고, 그 뒤≪훈민정음≫(해례본)·≪동국정운≫·≪용비어천가≫등의 편찬에도 위의 사람들과 성삼문도 함께 참여한 바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처음≪운회≫를 번역할 때에는 마침 그 일을 동궁이 관장하게 되어 동궁이 있는 의사청에서 일하다가 뒤에는 언문청을 따로 차리고≪훈민정음≫(해례본)·≪동국정운≫·≪용비어천가≫등의 편찬을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문종대에는 언문청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고 정음청이란 이름이 보이다가 세조와 성종대에는 그나마도 보이지 않으며 중종이 반정에 성공한 뒤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중에 언문청을 혁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159) 이로써 보면 언문청이 명목으로나마 있었던 모양이다.
≪문종실록≫에 처음으로 정음청이란 이름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주목을 끈다. 첫째로 정음청을 혁파하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대해 문종은 정음청이 자기가 세운 기관이 아니고 전부터 있어온 것이라고 밝혔다.160) 이것은 정음청이 세종대부터 있어온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여기서 정음청이란 사실상 언문청의 다른 이름이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정음청이 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로,≪문종실록≫의 가사에 의하면 정음청에서는 대군들이 주동이 되어 鑄字를 가지고 책을 찍어내는 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나타난 것은≪小學≫의 간행이었다.161) 신하들이 정음청은 필요 없는 기관이니 주자를 鑄字所에 돌리라고 거듭 주장하고 나선 까닭은 실은≪소학≫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印經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음의 연구 및 보급의 본거지라는 데서 이것을 혁파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문종은≪소학≫의 간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이유로 정음청 혁파를 미루고 끝내 응락하지 않았는데, 단종이 즉위한 후 정음청은 혁파되었다.162)
세조대에 언문청이나 정음청이 있었음을 암사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조가 스스로 관여했던 이 기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刊經都監의 설립으로 그것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