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실록의 보관
고려 초기부터 여러 사서와 전적의 보관을 위해서 서울의 史館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존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320)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고종 14년(1227) 9월 당시≪명종실록≫을 추찬하여 사관과 海印寺에 각각 보관하도록 하였는데,321) 이것이 고려시대 외사고의 설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몽고족의 침입으로 내사고는 강화도로 옮겨졌고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태종 5년(1405) 9월 한양천도와 더불어 같은 해 10월 2일 景福宮 근정전 서랑에 봉안되어 조선의 내사고로 자리잡았다. 외사고는 해인사에 실록이 봉안된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彰善島로 옮겨졌다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珍島 및 내륙으로 옮겨져 공양왕 2년(1390) 忠州 開天寺에 자리잡아 조선왕조의 충주사고가 되었다.322)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사고제도를 계승하여 내외 양사고를 두었다. 태종 5년 한양천도로 경복궁에 자리잡았던 내사고는 태종 13년 思勳閣 齋宮으로 옮겨졌다가, 세종 22년(1440)에 춘추관이 경복궁내 尙瑞院의 서쪽에 자리잡게 되면서 독립된 사고를 갖추게 되었다.323) 조선 초기에는 외사고에 선대실록이 봉안되었으므로, 외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확충이 건의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21년에 사헌부의 상소를 받아들여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하였으며,324) 세종 27년에는 태조, 정종, 태종이 3대실록 4본을 만들어 1본은 춘추관의 실록각에, 3본은 충주·전주·성주의 사고에 분장토록 하여 조선 초기의「4대사고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325)
조선 전기의 사고는 대부분 성내 또는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외사고들이 전부 깊은 산간의 사찰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던 것과는 달랐다. 조선 전기의 외사고로서 충주사고는 客館의 동남에, 성주사고는 객관의 동북에, 전주사고는 성의 남문안에 있던 慶基殿의 동쪽 담안에 있어, 궁중에 있던 내사고와 마찬가지로 모두 성내의 객관이나 외방궁실 근처에 있었다.326)
사고의 구조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의 경우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잘 알 수는 없으나, 승려와 관계된 구조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27) 중종 33년(1538) 11월 성주사고에서의 화재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사각의 모습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즉 사고의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은 넓게 되었고, 돌 위에 사다리가 놓여 있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건물의 주위에는 담을 쌓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28)
그리고 사고의 관리는 조선 초기에는 守護官 5인, 別色戶長·記官·庫直 각 1인을 두어 관리케 하였다.329)
320) | 史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광종대에 史庫도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鄭求福, 앞의 글(1984), 143∼14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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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 ≪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4년 9월 경신. |
322) | 車勇杰,<實錄·史官·史庫에 對하여>(≪史庫址調査報告書≫, 國史編纂委員會, 1986), 23∼25쪽. |
323) | ≪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5월 을해. ≪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4월 병신. |
324) | ≪世宗實錄≫권 86, 세종 21년 7월 기유. |
325) | ≪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1월 경인. |
326) | ≪東國輿地勝覽≫권 2, 春秋館·권 33, 全州·권 28, 星州 및 권 14, 忠州宮室. |
327) | 金東賢·金東旭,<朝鮮時代 史庫의 建築樣式>(≪史庫址調査報告書≫, 1986). |
328) | 金興洙,<星州史庫의 沿革과 史庫址現況>(위의 책), 69∼70쪽. |
329) | ≪世宗實錄地理志≫권 149, 忠州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