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선방역도의 특징
지도의 크기는 전체가 가로 63㎝, 세로 138㎝이다. 좌목을 제외한 조선전도 부분만은 가로가 63㎝이고 세로는 98.5㎝이다.≪경국대전≫에 기록된 周尺이 21.04㎝였으므로,439) 이 척도에 의하면 가로가 3자이고 세로가 4.5자 정도이다. 이 지도의 바탕은 비단이며 채색안료로 그려졌다. 평안도지방은 주현을 표기한 부분이 바래져서 그 명칭을 판독할 수 없으나,≪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여 42개 주현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
조선방역도의 제작목적은 8도주현과 우리 나라 전역의 산천형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대의 국가적인 지원하에 대대적으로 지도 제작사업을 추진한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 지도는 양성지와 정척이 합동으로 만든 동국지도를 기초로 하여 제작된 듯하다.
이 지도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방역도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동람도는 해악독신과 명산대천신들에게 제사지내는 34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형태에는 그리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혼일강리도의 조선도는 고려시대의 5도양계도를 그대로 계승하였기 때문에 북방지역이 소략하다. 이에 비하여 조선방역도는 해안선이 현재의 해안선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
둘째, 두만강의 위치가 동람도와 조선도보다 위도상으로 북쪽에 표기되어 현재 지도에 보다 가깝게 그려져 있다. 셋째,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되지 않았다. 해안선 주위의 조그마한 섬들도 거의 표기하였는데 왜 울릉도와 독도의 표기가 빠져 있는지는 규명할 수 없다. 넷째, 조선방역도는 8도주현도인데≪동국여지승람≫의 행정구역과 비교해 보면 빠진 데가 있다. 경기도 행정구역 중 水原과 龍仁이 원으로 그려져 있으나 행정구역 명칭은 표기되지 않았다. 경상도는 청도와 울산의 주현명칭이 표기되지 않았으며, 전라도에는 順天과 長興의 주현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興陽縣 쪽에 병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되었던 병영인 듯하다.
끝으로, 만주지역과 대마도가 표기된 점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영토의식이 있었다. 단지 바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관리가 어려워 空島政策을 써서 비워 두었는데, 왜구들이 강점하였다고 여기고 있었다.440) 그러므로 우리 나라 고지도에는 대마도가 예외없이 표기되었다.
만주지역까지 포함하여 그린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아 북방에 대한 지식이 불확실했기 때문일 것이며, 또 다른 이유는 만주가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토라는 강한 영토의식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지리학의 제일인자였던 양성지는 압록강을 우리의 국경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나라를 ‘萬里의 나라’441)라고 생각하고≪고려사≫지리지,≪訥齋集≫등에서 그렇게 표현하였다. 또 盧思愼도≪동국여지승람≫箋文에서 우리의 국토가 10,000리라는 표현을 썼다.442) 또 徐居正도≪동국여지승람≫서문에서 고려는 서북지방으로 압록강을 못넘었지만 동북지방으로는 先春嶺을 경계로 해서 고구려지역을 더 넘었다고443)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우리 나라의 영토가 만주까지 포함하는 10,000리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것이 조선방역도이다.
조선방역도의 문화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지도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도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원본지도이다. 이 지도의 제작시기가 명종 12년(1557)경으로 밝혀졌으므로, 이와 유사한 다른 지도들의 편년도 밝힐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둘째, 이 지도의 발견으로 정척과 양성지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동국지도의 윤곽을 어림할 수 있으며 조선 전기의 지도제작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산천형세의 파악 등이 비교적 상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 지도에서는 만주를 포함하여 그렸고 또 대마도를 명기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들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생각하였던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넷째, 16세기 유행했던「계회도」형식으로 제작된 이 지도는 16세기의 회화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李相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