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지도 1>)
이 지도는 태종 2년에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지도이면서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것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그 사본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지도는 轉寫과정에서 원래의 지도 발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지도 내용에 차이가 있는 사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지도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는 일본 京都에 있는 龍谷大學 소장본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비교적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다.444) 지도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는 용곡대학 지도가 유일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나, 1988년 4월에 일본의 九州 島原市 本光寺에서 지도의 발문이 있는 같은 지도가 발견되었다. 龍谷圖와 本光寺圖의 차이점은 본광사도가 용곡도보다 약간 크고 題名의 끝 부분이 용곡도는 ‘之圖’인데 반하여 본광사도는 ‘墜圖’ 즉 ‘地圖’로 쓰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곡도는 발문을 초서로 쓴 데 반하여 본광사도는 해서로 쓰여 있으며 내용의 일부에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나 전사과정의 차이에 불과하다. 권근의 발문이 결여되어 있으나 같은 계통의 지도로 일본 天理大學과 九州의 本妙寺 소장본인 大明國地圖가 있다.
가) 지도의 개관
용곡대 소장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세로 171㎝, 가로 164㎝의 대형지도이며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사본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며 색채가 선명하다. 중국의 도시는 적색으로 채색하였고 省都名은 원형, 州縣名은 사각형으로 나타냈다. 하천과 담수호는 청색, 바다와 염분이 많은 호수(鹹湖)는 녹색으로 되어 있다. 이 채색방법은 아라비아의 地球儀445) 착색법과 일치하고 있어서 아라비아계 지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 크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횡서되어 있고, 그 밑에 역대제왕의 국도를 종서로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의 하단에 權近의 발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하는 아주 넓다. 안으로 중국에 밖으로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천만 리인지를 알 수 없다. 줄여서 이것을 數尺의 폭으로 된 지도로 만들면 상세히 하기가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로 만들면 대부분 소략하게 된다.
오직 吳門 李澤民의 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역대제왕의 國都沿革은 天台僧淸濬의 混一疆理圖에 잘 갖추어 실려 있다. 建文 4년(1402) 여름에 左政丞 上洛 金公(金士衡)과 右政丞 丹陽 李公(李茂)이 국정의 여가에 이 지도를 參究하고, 檢詳 李薈에게 명하여 자세한 교정을 가해 합쳐서 1圖를 만들게 하였다. 遼水 동쪽과 본국(조선)의 강역은 澤民의 도에도 많이 소략하였다.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門戶를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圖籍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治에 一助가 된다. 2公이 이 지도를 만드는 까닭은 그 규모와 국량이 큰 것을 알기 때문이다.
近(權近)은 不才하여 參贊을 맡아 2公의 뒤를 따랐는데, 이 지도가 이루어짐을 즐겨 바라보게 되니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내가 평일에 方冊을 강구하여 보고자 했던 뜻을 맛보았다. 또한 내가 훗날에 退處하여 자택에서 누워 노닐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밑에 써서 말한다. 이 해 가을 8월 양촌 권근이 誌하다.
위의 권근의 발문 내용에 의해 어떤 지도를 바탕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지도가 제작되었는지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즉 이 지도는 좌정승 金士衡과 우정승 李茂가 연구·계획하였고 실질적인 편집과 작성은 이회가 맡았을 것으로 사료되며, 권근은 전체적인 후원과 발문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도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 모두 정부의 고관들이고 자료의 수집이 광범위한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순수한 개인적인 노력보다 국가적인 지도 제작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권근의 발문은 그의 문집인≪陽村集≫에도 실려 있다. 본문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지도의 제명에 차이가 있다.≪양촌집≫에는 歷代帝王混一疆理圖라고 되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疆理圖와 歷代國都에 대한 기록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는 뜻이다.≪양촌집≫의 圖誌도 그 순서를 바꾸었을 뿐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즉≪양촌집≫에서는 역대국도(역대제왕)를 먼저 가져오고 강리도를 뒤로 돌린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양촌집≫의 地圖誌에 따라서<역대제왕혼일강리도>라고 부르기도 하나 역시 지도에 쓰여 있는 제명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양촌집≫의 지도지는 실제 지도가 작성된 후에 적은 것이고 또 현전하는 2개의 지도에 쓰여 있는 제명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나)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인도·아프리카·유럽·조선·일본 등을 포함하는 舊世界 전체를 포괄하는 지도이다. 권근의 발문에서 李澤民의 聲敎廣被圖는 지도로서 매우 상세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부분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성교광피도는 이슬람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이슬람계의 세계지도와 아프리카 나일강 상류의 모양이 같으며 아랍어 지명을 증거로 들고 있다.446) 그리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 염분이 있는 내륙의 함호는 바다와 같은 녹색으로 표현한 것은 이미 위에서 이슬람계통의 지구의에 사용한 착색법과 동일함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바탕이 된 성교광피도는 중국에 도입된 이슬람계통의 영향을 받은 元代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원의 朱思本의 지도를 바탕으로 明의 羅洪先이 만든 廣輿圖의 아프리카 부분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주사본의 지도도 중국 이외의 부분은 이슬람계의 지도를 참고로 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인도가 반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그리스의 톨레미(Ptolemy)의 세계지도와 유사한 점이다. 실제로 그리스의 지리학이 중세에 아라비아에 전달되어 이슬람계통의 지리학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을 생각하면 톨레미의 세계지도는 이슬람계통의 세계지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인도·아프리카·유럽부분의 지도는 톨레미의 세계지도에서 이슬람계 세계지도로 이어지고, 다시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통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른바 비단길을 통해서 동서문화의 교류가 가장 왕성했던 원대에 이슬람문화의 전파에 따라서 지리에 대한 지식과 지도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다.
混一疆理圖는 역대제왕의 국도연혁이 상세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중국 재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지도로 사료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상단에 열거하고 있는 역대제왕의 국도와 萬里長城 등은 淸濬의 지도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는 김사형에 의해서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사형은 정종 원년(1399) 정월에 明惠帝 즉위 때 賀使로 入朝하였다가 동년 6월에 귀경하였다.447) 발문을 쓴 권근은 2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온 기록이 있으나 발문의 내용으로 보아 김사형이 중국에서 2개의 지도를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이른바 天下圖 또는 華夷圖는 지도의 대부분이 중국이고 그 변두리에 간략하게 주변국들을 표시하거나 명칭만 기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것은 주변지역의 정보가 확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나 중국인들의 세계지도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에 기인한 것으로 사료된다. 김사형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세계지도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유럽·동남 아시아 부분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으나, 중국을 제외한 동부아시아는 여전히 소략하거나 결여된 상태의 지도였다고 사료된다.
다) 이회의 8도지도(<지도 2>)
위에서 언급한 우리 나라와 일본이 결여되었거나 혹은 들어 있어도 다른 부분과의 형평에 어긋난 세계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자세하게 추가한 사람은 李薈로 추정된다.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이회가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고 했으나, 우리 나라와 일본지도를 추가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맥과 권근의 지위로 보아, 권근이 우리 나라와 일본지도를 추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시 정부의 檢詳으로 있던 이회가 우리 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여 새로운 세계지도를 완성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이 지도의 조선 부분은 현존하는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세종대에 시작된 전국적인 지도 제작사업이 아직 시작되기 이전의 지도이므로, 고려시대 후기의 우리 나라 전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조선지도의 원도에 대하여 살펴보면, “의정부에서 바친 本國地圖”(≪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5월 무술)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태종 2년(1402)은 바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발문을 쓴 建文 4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양성지의 上奏文에 의하면, “국초에 이회의 八道地圖가 있었다”(≪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고 하였다. 양성지는 세조 9년(1463)에 정척과 같이 東國地圖를 찬진한 사람이다.448) 국초에 이회의 8도지도가 있었다는 기록과 태종 2년 5월에 의정부에서 본국지도를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본국지도는 양성지가 말하는 이회의 8도지도로 추정된다. 이회는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실제로 편집·제작한 사람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우리 나라 지도는 이회의 8도지도를 옮겨놓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8도지도는 그 윤곽과 지도의 기법을 통해서 조선 초기의 지도학 발달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지도이다. 그러나 일본이 용곡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의 8도지도는 태종 2년에 작성된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이 지도에는 세조 원년(1455)에 폐군된 閭延·茂昌·虞芮에 ‘古’자를 붙여서 폐군된 것을 밝히고 있고, 세조 12년에 폐군된 隋川郡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 원년에서 세조 12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449)
라) 일본의 행기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국지도의 유래는≪세종실록≫에 일본에 통신관으로 건너간 朴敦之가 건문 3년(1401)에 일본의 備州守 源詳助로부터 日本國圖를 얻고 그 지도에 一岐와 對馬 두 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여 예조판서 許稠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450) 이 기록으로 보아 일본국지도는 박돈지가 일본에서 가져와 예조에 보낸 것을 바탕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돈지가 일본국도를 구득한 해가 바로 혼일강리역대국지도가 완성되기 1년 전이라는 것도 위의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지도에 실려 있는 일본국지도는 일본의 고승 行基가 만들었다고 전하는「行基圖」의 유형에 속한다. 일본의 고지도 전문가 秋岡의 분류에 의하면, 제Ⅱ형에 속하나 四國과 本州 사이에 있는 바다표시가 제작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지도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 방위이다. 즉 일본국지도는 서쪽이 북쪽이 되도록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박돈지가 가져온 일본국도 자체가 서쪽이 지도의 상부로 되어 있는 西上方位의 행기도였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지도에는 대부분 방위표시가 없다. 이러한 관계로 일본국도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보충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추가했다고 가정하면 일본국도의 방위의 오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지도에서도 북상방위가 아닌 지도를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와 울릉도 지도에서도 남상방위의 지도가 비교적 많다. 이러한 지도는 육지에서 섬을 바라보고 그린 지도로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일본열도를 우리 나라에서 건너갔다고 생각하면 서상방위의 지도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다만 지도 전체로 보면 방위상의 모순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451)
마) 천리대와 본묘사 소장 대명국도
권근의 발문이 결여되어 있는 같은 계통의 지도로 일본의 天理大學과 九州本妙寺에 소장되어 있는 大明國圖가 있다.452) 여기에는 권근의 발문뿐 아니라 지도의 제명과 역대국도의 기록도 없다. 따라서 대명국도라고 부른 것은 지도자체에 쓰여 있는 지도의 명칭이 아니고 소장자가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龍谷大 소장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전혀 별개의 지도로 보지 않고 같은 계통의 지도로 보고 있다.453) 중국부분을 용곡도와 비교해 보면 河系網과 지명의 배열이 거의 일치하고 있으나, 원대 지명을 명대 지명으로 고쳤고 명대의 탐험 결과를 黃河源에 반영시켰다. 즉 만주지방의 지명도 용곡도와 거의 같으나 명대 지명이 보충되어 있고, 몽고지방의 지명은 용곡도와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다.454) 즉 명대의 지도를 기준으로 중국과 동북부지방 즉 만주지방의 지명이 수정 또는 보충되었으나, 명의 지배 밖에 있던 몽고지방의 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일본과 琉球부분은 용곡도에서 범한 방위의 오류를 정정하였으며 지도의 윤곽이 많이 생략되기도 했으나, 申叔舟의≪海東諸國紀≫의 지도를 바탕으로 한 흔적이 뚜렷하다. 일본의 본주 모양은 매우 부정확하나 琉球圖는≪해동제국기≫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유구국을 일본의 구주보다도 크게 그리는 오류를 범하였다. 일본 내부의 지명에서도 용곡도에는 봉건제하의 국명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으나, 天理大圖에는 日本國都·鎌倉殿·富士山·畿內·七道名만이 기재되어 있을 정도이고 지방명의 기재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우리 나라 지도는 다른 부분보다도 훨씬 크게 그렸다는 점과 지도의 윤곽으로 보아 용곡도와 대부분이 동일하다. 그러나 차이점을 찾아보면 용곡도에서는 豆滿江이 하류에서 남류하는 유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천리대도에서는 이 부분이 바르게 수정되었다. 산맥의 표시에서 용곡도에서는 굵은 선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천리대도에서는 산의 표시 ∧를 연속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산맥의 표시에서 선으로 표시하는 방법과 산의 표시를 연속해서 산맥을 표시하는 방법은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병행되어 사용해 온 표시 방법이다. 천리대도에서는 용곡도에서 언급한 폐군된 군현의 이름이 없는 대신 명종 4년(1549)에서 선조 즉위년(1567) 사이에 개명 강등되었던 惟新縣(忠州)이 들어 있으므로, 천리대도의 작성연대가 16세기 중기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천리대도는 태종 2년(1402)에 완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도보다 약 160년 후에, 그리고 용곡도보다 약 100년 후에 작성된 지도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산지와 바다의 녹색, 하천의 청색이 풍기는 강렬한 인상은 두 지도가 모두 같은 계통의 지도이고, 조선시대 화공들의 전통적인 地圖描法을 느끼게 하는 걸작품이다.
구주의 本妙寺圖는 천리대도를 필사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유사한 지도이다. 천리대도와 본묘사도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가 하나의 대륙으로 되어 있고 그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났다. 그러나 두 지도는 각기 다른 지도에서 필사한 것으로, 두 지도가 서로 모사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455) 본묘사도는 원색사진에 의하면 그 색감이 매우 엷으며 천리대도와 용곡도에서 느끼는 밝은 녹색을 느낄 수 없다. 본묘사도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加藤淸正이 豊臣秀吉에게서 받은 지도를 본묘사에 봉납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채색법으로 보아 일본에서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444) | 小川琢治,≪支那歷史地理硏究≫(弘文堂書房, 1928), 59∼66쪽에서 龍谷大의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학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
---|---|
445) | 小川琢治, 위의 책, 6쪽. |
446) | 高橋 正,<東漸せる中世イスラム世界地圖>(≪龍谷大學論叢≫374, 1963), 77∼95쪽. |
447) | ≪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정월 계유·6월 병인. |
448) | ≪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11월 병인. |
449) | 李 燦,≪韓國의 古地圖≫(범우사, 1991), 325쪽. |
450) | ≪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2월 계유. |
451) | 李 燦. 앞의 책, 324쪽. |
452) | 混一疆理圖型에 속하는 지도 중 九州 島原市 本光寺 소장본은 龍谷圖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며 또 내용을 검토하지 못해서 이 글에서 따로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北京 古宮博物館所藏 大明混一圖는 Walter Fuchs가 소개한 소형사진만 볼 수 있어서 개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
453) | 海野一隆,<天理大所藏本大明國圖について>(≪大阪學藝大學紀要≫6, 1958), 60∼67쪽. |
454) | 海野一隆, 위의 글. |
455) | 海野一隆, 위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