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Ⅰ. 학문의 발전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3) 세계지도의 제작(1)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1) 성리학의 역할
          • 2) 5례·4례의 정비
          • 3) 문묘제도의 정비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5)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 6) 훈민정음과 관련된 사업들
        • 3. 역사학
          • 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
            • (1) 전대사의 체계화
            • (2) 고려시대사의 정리
            • (3) 전대사의 체계적 정리
          • 2) 춘추관과 당대사의 편찬
            • (2) 춘추관과 사관
            • (3) 실록의 편찬과 보관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1) 지리지의 편찬
          • 2) 국내지도의 제작
            • (3) 조선방역도
          • 3) 세계지도의 제작
            • (1)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
            • (2)≪해동제국기≫의 일본 및 유구국지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2) 자연신
        • 2. 불교
          • 1) 억불정책과 교단의 존폐
            • (1) 억불정책의 전개
            • (2) 양종과 승과의 폐지
          • 2) 도첩제와 부역승
            • (1) 도첩제의 강화와 폐지
          • 3) 왕실의 불교숭신과 불교행사
            • (1) 숭불의 왕과 그 불사
          • 4) 민간의 불교신앙
            • (3) 불탄일 연등과 수륙재
          • 5) 사찰재산과 승려의 경제활동
          • 6) 당시의 고승들
            • (1) 자초와 기화
            • (2) 세종대의 명승들
            • (3) 세조대의 고승들
        • 3. 도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지도 1>)

 이 지도는 태종 2년에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지도이면서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것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그 사본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지도는 轉寫과정에서 원래의 지도 발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지도 내용에 차이가 있는 사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지도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는 일본 京都에 있는 龍谷大學 소장본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비교적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다.444) 지도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는 용곡대학 지도가 유일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나, 1988년 4월에 일본의 九州 島原市 本光寺에서 지도의 발문이 있는 같은 지도가 발견되었다. 龍谷圖와 本光寺圖의 차이점은 본광사도가 용곡도보다 약간 크고 題名의 끝 부분이 용곡도는 ‘之圖’인데 반하여 본광사도는 ‘墜圖’ 즉 ‘地圖’로 쓰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곡도는 발문을 초서로 쓴 데 반하여 본광사도는 해서로 쓰여 있으며 내용의 일부에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나 전사과정의 차이에 불과하다. 권근의 발문이 결여되어 있으나 같은 계통의 지도로 일본 天理大學과 九州의 本妙寺 소장본인 大明國地圖가 있다.

가) 지도의 개관

 용곡대 소장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세로 171㎝, 가로 164㎝의 대형지도이며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사본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며 색채가 선명하다. 중국의 도시는 적색으로 채색하였고 省都名은 원형, 州縣名은 사각형으로 나타냈다. 하천과 담수호는 청색, 바다와 염분이 많은 호수(鹹湖)는 녹색으로 되어 있다. 이 채색방법은 아라비아의 地球儀445) 착색법과 일치하고 있어서 아라비아계 지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 크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횡서되어 있고, 그 밑에 역대제왕의 국도를 종서로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의 하단에 權近의 발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하는 아주 넓다. 안으로 중국에 밖으로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천만 리인지를 알 수 없다. 줄여서 이것을 數尺의 폭으로 된 지도로 만들면 상세히 하기가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로 만들면 대부분 소략하게 된다.

오직 吳門 李澤民의 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역대제왕의 國都沿革은 天台僧淸濬의 混一疆理圖에 잘 갖추어 실려 있다. 建文 4년(1402) 여름에 左政丞 上洛 金公(金士衡)과 右政丞 丹陽 李公(李茂)이 국정의 여가에 이 지도를 參究하고, 檢詳 李薈에게 명하여 자세한 교정을 가해 합쳐서 1圖를 만들게 하였다. 遼水 동쪽과 본국(조선)의 강역은 澤民의 도에도 많이 소략하였다.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門戶를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圖籍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治에 一助가 된다. 2公이 이 지도를 만드는 까닭은 그 규모와 국량이 큰 것을 알기 때문이다.

近(權近)은 不才하여 參贊을 맡아 2公의 뒤를 따랐는데, 이 지도가 이루어짐을 즐겨 바라보게 되니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내가 평일에 方冊을 강구하여 보고자 했던 뜻을 맛보았다. 또한 내가 훗날에 退處하여 자택에서 누워 노닐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밑에 써서 말한다. 이 해 가을 8월 양촌 권근이 誌하다.

 위의 권근의 발문 내용에 의해 어떤 지도를 바탕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지도가 제작되었는지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즉 이 지도는 좌정승 金士衡과 우정승 李茂가 연구·계획하였고 실질적인 편집과 작성은 이회가 맡았을 것으로 사료되며, 권근은 전체적인 후원과 발문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도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 모두 정부의 고관들이고 자료의 수집이 광범위한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순수한 개인적인 노력보다 국가적인 지도 제작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권근의 발문은 그의 문집인≪陽村集≫에도 실려 있다. 본문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지도의 제명에 차이가 있다.≪양촌집≫에는 歷代帝王混一疆理圖라고 되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疆理圖와 歷代國都에 대한 기록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는 뜻이다.≪양촌집≫의 圖誌도 그 순서를 바꾸었을 뿐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즉≪양촌집≫에서는 역대국도(역대제왕)를 먼저 가져오고 강리도를 뒤로 돌린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양촌집≫의 地圖誌에 따라서<역대제왕혼일강리도>라고 부르기도 하나 역시 지도에 쓰여 있는 제명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양촌집≫의 지도지는 실제 지도가 작성된 후에 적은 것이고 또 현전하는 2개의 지도에 쓰여 있는 제명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도 1>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참고이미지

나)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인도·아프리카·유럽·조선·일본 등을 포함하는 舊世界 전체를 포괄하는 지도이다. 권근의 발문에서 李澤民의 聲敎廣被圖는 지도로서 매우 상세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부분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성교광피도는 이슬람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이슬람계의 세계지도와 아프리카 나일강 상류의 모양이 같으며 아랍어 지명을 증거로 들고 있다.446) 그리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 염분이 있는 내륙의 함호는 바다와 같은 녹색으로 표현한 것은 이미 위에서 이슬람계통의 지구의에 사용한 착색법과 동일함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바탕이 된 성교광피도는 중국에 도입된 이슬람계통의 영향을 받은 元代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원의 朱思本의 지도를 바탕으로 明의 羅洪先이 만든 廣輿圖의 아프리카 부분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주사본의 지도도 중국 이외의 부분은 이슬람계의 지도를 참고로 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인도가 반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그리스의 톨레미(Ptolemy)의 세계지도와 유사한 점이다. 실제로 그리스의 지리학이 중세에 아라비아에 전달되어 이슬람계통의 지리학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을 생각하면 톨레미의 세계지도는 이슬람계통의 세계지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인도·아프리카·유럽부분의 지도는 톨레미의 세계지도에서 이슬람계 세계지도로 이어지고, 다시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통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른바 비단길을 통해서 동서문화의 교류가 가장 왕성했던 원대에 이슬람문화의 전파에 따라서 지리에 대한 지식과 지도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다.

 混一疆理圖는 역대제왕의 국도연혁이 상세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중국 재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지도로 사료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상단에 열거하고 있는 역대제왕의 국도와 萬里長城 등은 淸濬의 지도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는 김사형에 의해서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사형은 정종 원년(1399) 정월에 明惠帝 즉위 때 賀使로 入朝하였다가 동년 6월에 귀경하였다.447) 발문을 쓴 권근은 2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온 기록이 있으나 발문의 내용으로 보아 김사형이 중국에서 2개의 지도를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이른바 天下圖 또는 華夷圖는 지도의 대부분이 중국이고 그 변두리에 간략하게 주변국들을 표시하거나 명칭만 기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것은 주변지역의 정보가 확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나 중국인들의 세계지도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에 기인한 것으로 사료된다. 김사형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세계지도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유럽·동남 아시아 부분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으나, 중국을 제외한 동부아시아는 여전히 소략하거나 결여된 상태의 지도였다고 사료된다.

다) 이회의 8도지도(<지도 2>)

 위에서 언급한 우리 나라와 일본이 결여되었거나 혹은 들어 있어도 다른 부분과의 형평에 어긋난 세계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자세하게 추가한 사람은 李薈로 추정된다.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이회가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고 했으나, 우리 나라와 일본지도를 추가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맥과 권근의 지위로 보아, 권근이 우리 나라와 일본지도를 추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시 정부의 檢詳으로 있던 이회가 우리 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여 새로운 세계지도를 완성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이 지도의 조선 부분은 현존하는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세종대에 시작된 전국적인 지도 제작사업이 아직 시작되기 이전의 지도이므로, 고려시대 후기의 우리 나라 전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조선지도의 원도에 대하여 살펴보면, “의정부에서 바친 本國地圖”(≪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5월 무술)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태종 2년(1402)은 바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발문을 쓴 建文 4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양성지의 上奏文에 의하면, “국초에 이회의 八道地圖가 있었다”(≪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고 하였다. 양성지는 세조 9년(1463)에 정척과 같이 東國地圖를 찬진한 사람이다.448) 국초에 이회의 8도지도가 있었다는 기록과 태종 2년 5월에 의정부에서 본국지도를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본국지도는 양성지가 말하는 이회의 8도지도로 추정된다. 이회는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실제로 편집·제작한 사람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우리 나라 지도는 이회의 8도지도를 옮겨놓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8도지도는 그 윤곽과 지도의 기법을 통해서 조선 초기의 지도학 발달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지도이다. 그러나 일본이 용곡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의 8도지도는 태종 2년에 작성된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이 지도에는 세조 원년(1455)에 폐군된 閭延·茂昌·虞芮에 ‘古’자를 붙여서 폐군된 것을 밝히고 있고, 세조 12년에 폐군된 隋川郡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 원년에서 세조 12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449)

<지도 2>李薈의 八道地圖

라) 일본의 행기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국지도의 유래는≪세종실록≫에 일본에 통신관으로 건너간 朴敦之가 건문 3년(1401)에 일본의 備州守 源詳助로부터 日本國圖를 얻고 그 지도에 一岐와 對馬 두 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여 예조판서 許稠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450) 이 기록으로 보아 일본국지도는 박돈지가 일본에서 가져와 예조에 보낸 것을 바탕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돈지가 일본국도를 구득한 해가 바로 혼일강리역대국지도가 완성되기 1년 전이라는 것도 위의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지도에 실려 있는 일본국지도는 일본의 고승 行基가 만들었다고 전하는「行基圖」의 유형에 속한다. 일본의 고지도 전문가 秋岡의 분류에 의하면, 제Ⅱ형에 속하나 四國과 本州 사이에 있는 바다표시가 제작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지도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 방위이다. 즉 일본국지도는 서쪽이 북쪽이 되도록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박돈지가 가져온 일본국도 자체가 서쪽이 지도의 상부로 되어 있는 西上方位의 행기도였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지도에는 대부분 방위표시가 없다. 이러한 관계로 일본국도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보충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추가했다고 가정하면 일본국도의 방위의 오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지도에서도 북상방위가 아닌 지도를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와 울릉도 지도에서도 남상방위의 지도가 비교적 많다. 이러한 지도는 육지에서 섬을 바라보고 그린 지도로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일본열도를 우리 나라에서 건너갔다고 생각하면 서상방위의 지도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다만 지도 전체로 보면 방위상의 모순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451)

마) 천리대와 본묘사 소장 대명국도

 권근의 발문이 결여되어 있는 같은 계통의 지도로 일본의 天理大學과 九州本妙寺에 소장되어 있는 大明國圖가 있다.452) 여기에는 권근의 발문뿐 아니라 지도의 제명과 역대국도의 기록도 없다. 따라서 대명국도라고 부른 것은 지도자체에 쓰여 있는 지도의 명칭이 아니고 소장자가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龍谷大 소장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전혀 별개의 지도로 보지 않고 같은 계통의 지도로 보고 있다.453) 중국부분을 용곡도와 비교해 보면 河系網과 지명의 배열이 거의 일치하고 있으나, 원대 지명을 명대 지명으로 고쳤고 명대의 탐험 결과를 黃河源에 반영시켰다. 즉 만주지방의 지명도 용곡도와 거의 같으나 명대 지명이 보충되어 있고, 몽고지방의 지명은 용곡도와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다.454) 즉 명대의 지도를 기준으로 중국과 동북부지방 즉 만주지방의 지명이 수정 또는 보충되었으나, 명의 지배 밖에 있던 몽고지방의 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일본과 琉球부분은 용곡도에서 범한 방위의 오류를 정정하였으며 지도의 윤곽이 많이 생략되기도 했으나, 申叔舟의≪海東諸國紀≫의 지도를 바탕으로 한 흔적이 뚜렷하다. 일본의 본주 모양은 매우 부정확하나 琉球圖는≪해동제국기≫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유구국을 일본의 구주보다도 크게 그리는 오류를 범하였다. 일본 내부의 지명에서도 용곡도에는 봉건제하의 국명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으나, 天理大圖에는 日本國都·鎌倉殿·富士山·畿內·七道名만이 기재되어 있을 정도이고 지방명의 기재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우리 나라 지도는 다른 부분보다도 훨씬 크게 그렸다는 점과 지도의 윤곽으로 보아 용곡도와 대부분이 동일하다. 그러나 차이점을 찾아보면 용곡도에서는 豆滿江이 하류에서 남류하는 유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천리대도에서는 이 부분이 바르게 수정되었다. 산맥의 표시에서 용곡도에서는 굵은 선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천리대도에서는 산의 표시 ∧를 연속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산맥의 표시에서 선으로 표시하는 방법과 산의 표시를 연속해서 산맥을 표시하는 방법은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병행되어 사용해 온 표시 방법이다. 천리대도에서는 용곡도에서 언급한 폐군된 군현의 이름이 없는 대신 명종 4년(1549)에서 선조 즉위년(1567) 사이에 개명 강등되었던 惟新縣(忠州)이 들어 있으므로, 천리대도의 작성연대가 16세기 중기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천리대도는 태종 2년(1402)에 완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도보다 약 160년 후에, 그리고 용곡도보다 약 100년 후에 작성된 지도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산지와 바다의 녹색, 하천의 청색이 풍기는 강렬한 인상은 두 지도가 모두 같은 계통의 지도이고, 조선시대 화공들의 전통적인 地圖描法을 느끼게 하는 걸작품이다.

 구주의 本妙寺圖는 천리대도를 필사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유사한 지도이다. 천리대도와 본묘사도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가 하나의 대륙으로 되어 있고 그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났다. 그러나 두 지도는 각기 다른 지도에서 필사한 것으로, 두 지도가 서로 모사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455) 본묘사도는 원색사진에 의하면 그 색감이 매우 엷으며 천리대도와 용곡도에서 느끼는 밝은 녹색을 느낄 수 없다. 본묘사도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加藤淸正이 豊臣秀吉에게서 받은 지도를 본묘사에 봉납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채색법으로 보아 일본에서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444) 小川琢治,≪支那歷史地理硏究≫(弘文堂書房, 1928), 59∼66쪽에서 龍谷大의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학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445) 小川琢治, 위의 책, 6쪽.
446) 高橋 正,<東漸せる中世イスラム世界地圖>(≪龍谷大學論叢≫374, 1963), 77∼95쪽.
447)≪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정월 계유·6월 병인.
448)≪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11월 병인.
449) 李 燦,≪韓國의 古地圖≫(범우사, 1991), 325쪽.
450)≪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2월 계유.
451) 李 燦. 앞의 책, 324쪽.
452) 混一疆理圖型에 속하는 지도 중 九州 島原市 本光寺 소장본은 龍谷圖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며 또 내용을 검토하지 못해서 이 글에서 따로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北京 古宮博物館所藏 大明混一圖는 Walter Fuchs가 소개한 소형사진만 볼 수 있어서 개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453) 海野一隆,<天理大所藏本大明國圖について>(≪大阪學藝大學紀要≫6, 1958), 60∼67쪽.
454) 海野一隆, 위의 글.
455) 海野一隆, 위의 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