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가) 지도의 개관
이 지도는 그 제목으로 보아 전술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매우 유사한 명칭이다. 즉 ‘歷代國都’와 ‘疆理’의 순서를 바꾸어 놓았고 끝부분의 ‘之圖’를 ‘地圖’로 고쳤을 뿐이다. 따라서 역대국도지도와 강리지도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 지도라는 뜻에서 용곡대 소장본과 매우 유사한 명칭이다. 용곡도에서와 같이 지도제작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중국에서 중국과 그 주변의 지도를 도입한 후 우리 나라와 일본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제작과정을 거친 지도이다. 용곡도를 대표로 하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전부 일본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지도도 거의 전부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것으로 일본의 京都 妙心寺 麟祥院, 동경 宮內廳 彰考館 소장본이 있고, 우리 나라에는 1980년대에 일본에서 구입해온 仁村紀念館 소장본과 지도의 명칭과 楊子器의 서문이 결여된 같은 유형의 지도가 奎章閣에 海東古地圖의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리 나라에 소장되어 있는 인촌기념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仁村圖(<지도 3>)는 세로 179㎝, 가로 198.5㎝의 대형지도이며 2폭의 가리개로 되어 있다. 지도의 상단에 ‘混一歷□□□疆理地圖’라고 예서로 지도의 명칭이 쓰여 있다. 그 중 ‘代國都’ 3자는 파손되어 있다. 고지도의 명칭에서 ‘之圖’ 또는 ‘地圖’의 2종류를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之圖’와 ‘地圖’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같은 지도에서도 필사자에 따라서 바꾸어 쓰는 일이 종종 있다. 인촌도의 전서로 된 ‘地’자는 墜理圖의 ‘墜’의 상부 우측의 ‘豕’의 전서체로 해석되고 있다.456) 지도의 명칭 밑에는 역대제왕국도를 명대의 지명 밑에 옛 명칭을 밝히고 黃帝·堯·舜 등 역대제왕이 도읍했던 곳을 열거하고 있다. 이 역대제왕국도이 기록은 용곡도와 그 형식·순서·내용에 이르기까지 전혀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지도부분은 중국을 중앙에 위치시키고 그 동쪽에 우리 나라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휠씬 크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용곡도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인촌도에서는 원형의 섬에 일본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지도 하단에는 명나라의 衛所名이 기록되어 있고 지도를 만들게 된 동기를 쓴 양자기의 발문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자세한 범례가 있으며, 끝부분은 파손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나 같은 유형의 지도에서 嘉靖 5년(1526)의 刊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촌도는 양자기가 만든 大明國地圖에 우리 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추가하고 중국의 역대제왕국도의 이름을 지도의 상단에 열거하여 완성한 지도이며, 우리 나라의 서울을 ‘京都’라고 표시한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 만든 사실이 확실한 지도이다.
나) 양자기의 대명국지도
인촌도의 중국부분은 楊子器의 대명국지도이다.457) 이 지도는 우리 나라 부분을 제외하면 지도의 윤곽, 명의 위소, 발문, 범례 등이 인촌도의 중국부분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범례의 말미에 “嘉靖 五年 歲次丙戌春二月吉□”458)라고 쓰여 있는 것까지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촌도의 중국부분의 원도는 양자기의 대명국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大連圖書館의 대명국지도에도 역대국도가 열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촌도는 우리 나라에서 역대제왕의 국도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인촌도와 같은 유형인 경도의 妙心寺圖와 동경에 있는 궁내청 지도에도 역대국도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고지도는 전사과정에서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수정·보충 또는 일부를 삭제하기도 한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라는 지도의 명칭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묘심사와 궁내청 지도의 원도에는 역대국도가 열거되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인촌도가 유일하게 지도의 명칭에 부합되며 원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대명국지도의 범례 말미에「嘉靖 5년(1526)」이라고 적혀 있으나 원저자 양자기는459) 이미 1513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인촌도의 중국부분 원도로 추정되는 대련도서관의 대명국지도는 양자기 사후에 전사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변천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양자기가 대명국지도를 작성한 시기는 늦어도 正德 7년(1512) 이전이라고 추정된다.460)
양자지의 발문에 의하면 정치에 지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太一統志≫즉≪大明一統志≫및 관계를 참고하여 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대명일통지≫에 삽입된 지도는 매우 간략하므로 당시의 여러 지도를 참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양자기의 대명국지도의 원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지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명대의 대표적인 중국지도인 廣輿圖는 가정 20년경에 작성되었으므로 양자기의 중국지도가 광여도를 바탕으로 했을 리는 없다. 따라서 양자기의 중국지도는 원대의 어떤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수정 보충한 것으로 사료된다. 원대의 지도로 잘 알려진 一統圖는 明一統圖와 같이 간략하여 양자기의 중국지도의 원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기의 중국지도의 바탕이 된 지도는 광여도의 원본이 된 朱思本의 輿地圖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양자기의 중국지도의 내용은 대명일통지도보다 광여도에 더 가깝다.
인촌도와 용곡대 소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비교하면 용곡도의 중앙아시아·인도·아프리카·유럽 등을 제외한 중국지도는 그 윤곽이 매우 비슷하다. 인촌도의 山東半島와 遼東半島는 용곡도의 그것보다 윤곽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黃河와 揚子江의 유로는 인촌도가 보다 정확하다. 용곡도와 인촌도의 비교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는 만리장성이다. 전자에서는 秦代의 장성에 속하며 宋代에 만든 墜(地)理圖461)에 나타나는 장성과 매우 비슷하다. 淳祐 7년(1247)에 석각한 이 지도의 장성과 용곡도의 원도가 되는 李澤民의 聲敎廣被圖의 장성이 같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인촌도의 장성은 용곡도와 비슷하기는 하나 명대의 蘭州에서 북쪽으로 嘉峪關까지 연장시킨 부분이 나타나고 있어서 명대의 장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인촌도와 용곡도의 또 다른 점은 전자는 모두 명대의 지명이고 후자는 상당한 수의 원대 지명을 그대로 남겨 놓고 있다. 인촌도에서는 지명의 표기와 범례에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즉 범례에서 행정구역 단위의 고하에 따라 표시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京師八其角以控八方也”라고 범례에 적혀 있고, 이 범례에 따라 北京과 南京을 2중의 8각형 테두리로 만들고 그 외부에 성벽표시를 하여 성곽으로 둘러싸였음을 알게 하고 그 내부에 北京順天府와 南京 應天府라고 쓰고 있다. 省都·府·州·縣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부호를 쓰고 있다. 그리고 행정수도의 구별을 부호로 표시하는 대신에 ○○府 ○○州의 부와 주를 지명표기에서 생략하였다. 이러한 범례의 방법은 좁은 지면에 많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후대의 지도표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 조선지도
인촌도에 나타난 우리 나라 부분은 세조 9년(1463)에 정척과 양성지가 작성한 東國地圖型보다 이회의 八道地圖型에 더 가깝다. 인촌도는 제작년대를 보면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보다 약 80년 후에 만들어졌으나, 태종 2년(1402) 이회의 8도지도형을 따르고 있다. 특히 두만강의 유로와 함경도의 윤곽은 인촌도의 우리 나라 부분과 이회의 8도지도가 동일계통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지명에 있어서는 인촌도의 우리 나라 지명이 용곡도의 우리 나라 부분보다 상세하다. 그뿐 아니라 인촌도에서도 각 군현의 표시를 도별로 일정한 색으로 통일하고 있다. 즉 전라도는 紅, 경상도는 白, 강원도는 綠, 함경도는 靑, 경기도와 충청도는 黃, 황해도는 白, 평안도는 灰白色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도계의 표시를 따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계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인촌도의 이러한 방법은 이회의 8도지도에는 없었던 것으로, 양자기의 중국지도 범례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표기법으로 추정된다. 군현명의 바탕색으로 도별을 표시하는 방법은 후대 8도지도의 군현표시 방법에 널리 이용되었다. 지형표시에서는 개개의 산이 아니고 산맥을 주로 표시하였다. 산맥의 모양과 내용은 용곡도에 나타난 이회의 8도지도의 내용과 유사하다.
우리 나라의 지명 변천을 통해서 본 인촌도의 제작 연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지도의 원도가 제작된 嘉靖 5년(1526)에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강등된 명종 4년(1549) 사이로 추정된다.
456) | 같은 전서체의 ‘地’자는 일본 九州 本光寺소장의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高麗大學校 소장 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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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 靑山定雄,<古地誌地圖の調査>(東京;≪東方學報≫第五冊 續篇, 1935), 147∼152쪽에서 楊子器의 중국 지도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
458) | 靑山定雄, 위의 글에는 “歲次丙戌春二月吉”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宮內廳本에는 “二月吉州”로 되어 있어서 이 서문을 쓴 장소가 밝혀진 셈이다. |
459) | 楊子器의 諱는 子器이며 字는 名文, 浙江省 慈谿 사람이다. 成火 23년(1487)에 進士가 되고 崑山·高平의 知縣을 거쳐 1495년에 常熟知縣이 되어 水利를 講했으며 常熟縣志 4권을 편찬하였다. 河南左布政司로 正德 8年(1513)에 타계하였다. 양자기는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水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宮崎市定,<妙心寺麟祥院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について>,≪神田博士還曆記念論集≫, 1957, 577∼582쪽). |
460) | 靑山定雄, 앞의 글, 147∼152쪽. |
461) | 曹婉如 外編,≪中國古代地圖集 戰國∼元≫(北京;文物出版社, 1990), 圖版 72, 墜理圖墨線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