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무역
사무역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므로, 공무역에 편승하여 밀무역의 형태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무역은 처음에는 주로 사신으로 가는 고위관료나 譯官·軍官 등의 使行員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사행원들은 사행을 기화로 사치품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15세기말부터 견직물이나 그 原絲(眞絲·白絲)를 대량 수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사무역의 발달은 국내 사치풍조의 성행으로 사치품 수요가 늘어난 데 기인하였다.
사무역은 사라능단·백사·백저포 등 직물류와 珠翠·寶貝·珊瑚·瑪瑙 등 보석류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원래 사라능단은 尙衣院의 御衣·冠佩 등 법전에 규정된 수요에 한정하여 충당되었다. 그런데 사치풍조가 성행하자 그 수요는 급증하였다. 왕실·고관·지주·私商層들이 사치품 수요의 중심을 이루었다. 서민층에서도 혼수의 필수품이 될 정도로 수요층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1520∼30년대에 들어와 사무역은 종래 공무역에 편승하여 부수적으로 교역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대중국무역을 주도하였다. 사무역 발달의 배경으로는 지주제의 전개, 국내상업의 발달, 사치품의 수요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16세기 사무역은 주로 은무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은 15세기 중반에 地丁銀制를 시행하여 각종 조세를 銀納化시켰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국제교역에서 은이 결제수단으로 되어, 각국의 은이 중국으로 집중되었다. 은이 결제수단이 되면서, 국내 은광개발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276)
연산군 9년(1503) 金甘佛과 金儉同이 鉛덩어리에서 은을 분리·제련하는 鉛銀분리술을 발명하였다. 이 기술은 은광개발에 큰 도움이 되어 端川·江界·豊川 등에서 광산이 개발되었다. 함경도 단천은 보잘것없는 연 산지였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제일의 은광으로 개발되었다. 이 새로운 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16세기 중반 이후 北九州지방 은광개발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이후 鉛銀術·産銀處의 개발로 산은량은 증대하였으나, 사무역의 발달은 계속적인 은 부족사태를 초래하였다. 은 확보를 위한 富商大賈들의 潛採·濫採가 함경도에서 성행하였다. 은의 남채는 중종 25년(1530)을 전후하여 절정에 달하였다. 상인들은 잠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합법적인 채은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상인으로 하여금 일정량의 곡물을 납부하는 대가로 채은권을 부여하는 納穀採銀制나, 정부에서 직접 채은하여 곡식을 사들이는 採銀貿穀制를 실시하였다. 채은권을 획득한 부상대고들은 단천에서 채굴한 은을 사행원에게 판매하였다. 중국물화가 단천에 유입되면서 단천은 흥성함이 서울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정도로 번창하였다.277)
16세기 사무역의 주도세력은 宮禁·戚臣·權貴 등 특권세력과 부상대고들이었다. 궁금·척신·권귀들은 대외무역에 종사함으로써 척신정치의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종말∼명종초 척신정치가 전개되면서 궁중·재상 등 특권층이 본격적으로 사무역에 손을 댔다. 중종대 권신 金安老나 명종대 尹元衡의 사무역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의 교역품은 市廛商人에게 전매되어, 서울시전이나 지방으로 유포되었다. 사무역 금지정책 아래에서 역관들은 자신들을 비호해 줄 권력이 필요하였다. 중국무역의 이권 때문에 왕실·권세가 등이 비호세력으로 등장하여, 양자의 결탁이 쉽게 이루어졌다. 사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역관들은 부상대고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국내상업 발달과 함께 새로 등장한 부상대고들 중에는 양반 사대부는 물론 賤庶까지 포함한 전 계층이 속하여 있었다. 16세기 사무역은 역관·군관 등 사행원과 함께 京商·平壤상인·開城상인·義州상인 등 부상대고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무역의 팽창은 궁금·척신·권귀, 경상을 중심으로 한 부상대고, 사행원들의 활발한 무역활동의 결과였던 것이다.
부상대고의 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부상대고들은 사행원과 결탁하여 점차 물주로 되어 갔다. 부상대고들은 16세기 이후 발달하는 유통질서를 장악하여 상업자본을 축적한 뒤 이를 대외무역 자금으로 재투자하였다. 부상대고의 상업활동과 자본축적의 배후에는 왕실·권세가를 비롯하여 관청의 서리·下隷 및 역관 등 봉건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상인들의 상업자본 축적이 아직 미숙하였으므로 사무역은 국가권력과 결탁된 특권무역의 성격을 띠면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16세기 사무역은 15세기 국가 주도의 공무역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시키고 그 속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15∼16세기에 부상대고의 주된 상업활동과 초기 자본축적 과정은 納穀·防穀과 같은 정부재정운영과 관련된 부문이나, 양반가의 사치품 수요를 위한 대외무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축적한 상업자본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상인지주로 성장하여 갔다.
부상대고들은 16세기 이후 서서히 부상하는 유통경제를 장악하면서 貢物防納, 惡布사용, 常平倉穀冒收, 納穀受價, 곡물 매점매석 등의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갔다. 의주의 大同島를 비롯하여 獐島·海狼島나 安州·鐵山 등은 서울·의주·개성상인 등이 밀무역을 하는 거점이었다. 특히 개성상인은 서울상인과 함께 가장 조직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상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의주는 대외무역과 관련된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은 산지인 단천 역시 중국과의 무역이 성한 곳이었다. 16세기에는 대외무역의 확대에 따라 지방에서 상업도시가 발전하고 있었다.278)
| 276) | 사무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여 요약·정리하였다. 韓相權, 앞의 글, 450∼483쪽. 李泰鎭, 앞의 책(1986), 294∼295쪽 및 312∼313쪽. 柳承宙,≪朝鮮時代鑛業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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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7) | 韓相權, 위의 글, 461∼471쪽. 柳承宙, 위의 책, 121∼161쪽. 李泰鎭, 앞의 글(1994), 177쪽. 백승철,<16세기 부상대고의 성장과 상업활동>(≪역사와 현실≫13, 한국역사연구회, 1994), 260쪽. |
| 278) | 이상 사무역에 대한 서술은 백승철, 위의 글, 252∼273쪽 및 韓相權, 위의 글, 455∼484쪽을 참고하여 요약·정리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