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3) 왜변의 발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1) 훈구의 비리
            • (2) 훈구의 형성과 그 성격
          • 2) 권력구조의 모순
          • 3)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1) 국가기관 절수지
            • (2) 사처 절수지
          • 2) 농장의 확대와 병작영농
          • 3) 하층민의 동요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1) 장시성립의 기반
            • (2) 장시의 성립과 확산
            • (3) 화폐경제의 발달
            • (4) 상공인구의 증가와 상업정책의 변화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1) 공납제의 문제점과 폐단
            • (2) 공납제 개혁의 방향과 방납대응책
        • 4. 군역제도의 붕괴
          • 1) 보법의 문란과 피역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1) 갑사제의 쇠퇴
            • (2) 기정병의 보군화
            • (3) 보정병과 수군의 역졸화
          • 3) 대립제의 성행
          • 4) 방군수포제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1) 책봉체제와 동아시아 국제교역
            • (2) 중국과의 무역
              • 가. 조공무역
              • 나. 공무역
              • 다. 사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가. 조공무역
              • 나. 공무역
              • 다. 사무역
            • (4) 중·일 중개무역의 성격
          • 2) 여진과의 무역
            • (1) 조공무역
            • (2) 공무역
            • (3) 사무역
          • 3) 왜변의 발발
            • (1) 삼포왜란의 발생 배경
            • (2) 삼포왜란의 발생
            • (3) 삼포왜란의 결과와 임신약조
            • (4) 삼포왜란 이후의 왜변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1) 사림의 경제적 기반
          • 2) 사림의 사회적 기반
          • 3) 사림의 교육과 학통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1) 사림의 중앙진출
          • 2) 훈구세력과의 갈등
          • 3) 무오사화
          • 4) 갑자사화
          • 5) 기묘사화
          • 6) 을사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1) 학파의 형성
          • 2) 향당적 색채
          • 3) 사림의 성향과 특징
          • 4) 문묘배향운동
          • 5) 절의사상의 고취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1) 도학정치의 이념
          • 2) 언론과 경연활동
          • 3)≪소학≫실천운동
          • 4) 소격서 혁파
          • 5) 훈구파 탄핵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1) 관료제적 향촌질서의 한계
          • 2)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
          • 3)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
          • 4) 향촌질서 재편운동의 성과
        • 3. 서원건립활동
          • 1) 배경
          • 2) 서원의 건립과 사회
          • 3) 사액서원의 추세
          • 4) 초창기 서원의 성격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1) 성리서의 간행과 보급
          • 2) 초기의 성리학 연구
          • 3) 이기심성설 논쟁
          • 4) 학파의 분화
          • 5)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실천
        • 5. 경제개혁의 추진
          • 1) 농업장려와 농법개량
          • 2) 수리시설의 발달
          • 3) 한전론과 균전론
          • 4) 공납제 개혁론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3) 왜변의 발발

(1) 삼포왜란의 발생 배경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는 조선국왕과 幕府장군 사이의 對等交隣, 對馬島主를 매개로 한 그 밖의 통교자와의 羈縻交隣이라는 다원적·계층적 구조로 전개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통교자를 기미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통제책을 실시하였다.316)

일본인에 대한 통제는 태종 7년(1407) 浦所를 富山浦와 乃而浦(薺浦)로 제한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포소는 치폐를 거듭하다가 세종 8년(1426) 鹽浦가 추가됨으로써, 3포제도가 확립되었다. 三浦倭館은 일본인 도항자의 정박처·접대처·무역처의 기능을 하였다. 3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왕래를 허락하였으며,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였다. 다만 恒居倭人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는 잠시 잔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317) 그러나 일본인은 이를 어기고 계속 거류하여 그 수가 증가하였다. 15세기 후반 3포 항거왜인의 수는 대략 다음<표 1>과 같다.

연 대 제 포 부 산 포 염 포 합 계
세 종 초

(1420년대)

약정호수
30   20   10   60  
세 조 12

(1466)
300 1,200여 110 330여 36 120여 446 1,650여
성 종 5

(1474)
308 1,722 67 323 36 131 411 2,176
성 종 6

(1475)
308 1,731 88 350 34 128 430 2,209
성 종 25

(1494)
347 2,500 127 453 51 152 525 3,105

<표 1>15세기 후반 3포 항거왜인의 수

출전 : 中村榮孝,≪日鮮關係史の硏究≫(上)(東京;吉川弘文館, 1965).
村井章介,≪中世倭人傳≫(岩波新書 274, 東京;岩波書店, 1993), 85쪽.

세종초에는 항거왜인 수를 60호로 한정하였다. 그러나<표 1>에서 보는 것처럼, 1466년에 1,650여 명이던 것이 1475년에는 2,200여 명, 1494년에는 3,100여 명으로 늘어나, 1466∼1494년의 약 30년 동안에 약 2배 정도 증가하였다. 이처럼 급속히 늘어난 것은 생활의 안정을 찾기 위해 도항하는 일본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항거왜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났다.

이런 문제들 중에서 공무역으로 국가재정이 궁핍해지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성종 6년(1475)에 일본인에게 지급된 면포는 서울에서 9,827필, 경상도에서 17,381필이었다. 다음해에는 서울에서 21,588필, 경상도에서 15,833필로 증가하였다. 성종 25년에는 일본국왕사신이 가지고 온 私進物이 면포 28,839필분으로 算定되었다. 조선정부는 이러한 재정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어, 사진을 일체 금지하는 억제책을 실시하였다.318)

한편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라도·경상도를 중심으로 邑城·鎭城의 축조가 성종 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5세기 후반의 읍성 축조는 성종 8년과 성종 17∼23년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水軍營鎭의 축성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319)

항거왜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토지를 점유하여 그 경작지가 크게 늘어났다. 그래서 성종 25년에는 경작지에 대한 수세 조치가 취해졌다. 뿐만 아니라 호구조사의 실시 등 일본인에 대한 통제가 점점 엄격해졌다. 연산군 때는 국가재정이 파탄에 처하자 일본인이 받던 세금까지 탈취하는 등 일본인에 대한 정책이 일관성을 잃어 갔다.320) 또 통교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하고, 관리의 횡포와 접대위반이 빈번해져 일본인의 불만이 높아졌다.321) 중종 원년(1506)에는 통교와 접대를 癸亥約條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악화와 접대비용 과다로 4년 후에는 다시 긴축재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통제가 강화되자 일본인의 저항도 강해져, 성종 5년에서 중종 4년 사이에 왜구의 약탈이 12회나 있었다.322)

연산군 6년(1500)에는 대마도주가 구리 115,000여 근을 보내왔는데, 조선정부는 양이 많다고 하여 1/3만 사고 나머지는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동왕 8년에 다시 나머지를 가지고 왔으나, 구리 5근 반=면포 1필 반의 공정가격을 5근=1필 값으로 깎고 1/3만 사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측은 공무역값의 새 비율에 불만을 가지고 대가를 받지 않고 돌아갔고 중종 3년에 옛 비율로 사기를 요청하였다.

1506년 中宗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종은 受圖書人의 정리를 단행하여, 공로가 뛰어난 자를 제외하고는 도서를 받은 지 50년 이상되는 자의 통교를 거부하였다. 일본인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조선인과의 충돌이 잦아져 중종 3년 11월 제포에 인접한 加德島에서 해적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경상도경차관 金謹思를 파견하여 3포의 頭倭에게 경고하였다.

가덕도왜변을 조사중인 중종 4년(1509) 3월 전라도 甫吉島에서 濟州貢馬船이 왜선 5척에게 습격당하였다. 조선정부는 유능한 인물을 수령·邊將에 선임하여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 때 3포의 수령·변장을 당상관으로 지명하려 했지만, 실현된 것은 부산첨사 李友曾뿐이었다. 이우증은 항거왜인의 접대, 도항선의 조사, 상행위의 단속 등을 엄격하게 하였다. 이 밖에 제포첨사 金世鈞, 웅천현감 韓倫 등 3포의 책임자는 조정의 방침에 따라, 일본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반감을 샀다.323) 이러한 불만의 증가는 三浦倭亂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의 법규위반과 침략에 대해서 규제 논의가 있었으나, 조선정부는 항상 미봉책과 회유책으로 일관하였다. 정책의 일관성 결여 또한 삼포왜란의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항거왜인이 기동성과 무력을 겸비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무력도발이 쉬웠던 점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324)

316) 孫承喆, 앞의 책, 51∼90쪽.

河宇鳳,<朝鮮前期의 對日關係>(≪講座 韓日關係史≫, 현음사, 1994), 274∼278쪽.
317) 中村榮孝,≪日鮮關係史の硏究≫(上)(東京;吉川弘文館, 1965), 481∼498쪽.
318) 村井章介, 앞의 책, 130∼131쪽.
319) 車勇杰,<행성·읍성·진성의 축조>(≪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190∼195쪽.
320) 村井章介, 앞의 책, 131쪽.
321) 中村榮孝, 앞의 책(上)(1965), 653∼665쪽.
322) 河宇鳳, 앞의 글, 278쪽.
323) 田中健夫,<朝鮮との關係の推移と貿易權の對馬集中>(≪日本歷史大系≫2, 井上光貞 外編, 東京;山川出版社, 1985), 970쪽.

村井章介, 앞의 책, 145쪽.
324) 中村榮孝, 앞의 책(上)(1965), 665∼681쪽.

李鉉淙, 앞의 책, 268∼273쪽.

村井章介, 위의 책, 131쪽.

河宇鳳, 앞의 글, 278∼280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