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Ⅲ. 사림세력의 활동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2) 중국과의 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2) 여진과의 무역
          • 3) 왜변의 발발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경제개혁의 추진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초기의 성리학 연구

성리학적 세계관과 理氣心性論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16세기 사림의 등장, 그리고 勳戚과의 투쟁과정 속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훈척의 비리와 탄압에 직면하여 도덕성과 修身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킨 결과였다.

이에 비해 15세기 조선사회는 성리학의 철학적 측면에 관심을 집중적으로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홍건적·왜구의 침략과 명의 압력, 대토지 소유의 확대, 불교의 폐해와 민생의 피폐 등 고려시대부터 누적되어온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당시 건국세력의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성리학적인 명분론도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다. 易姓革命이기는 하지만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으며 나아가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건국세력이 명분적인 면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자성리학뿐만 아니라 漢唐儒學과 心學的 경향의 陸學(陸九淵의 학문), 博學·功利的인 경향의 呂學(呂祖謙의 학문)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法家的인 성격이 강한≪周禮≫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국가체제 자체가≪주례≫에 나오는 周代의 체제를 모범으로 하였으며 정치·경제·법률·예제 등 많은 분야에서 이것을 준거로 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다.634) 아울러 성리학 자체 내에서도 철학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윤리·의례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이 두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의 학자들이 이기심성론 등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체제의 골격을 마련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鄭道傳은≪心問天答≫·≪心氣理篇≫·≪佛氏雜辨≫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와 도교의 논리, 특히 불교의 輪廻說과 精神不滅說·因果應報說 등을 공격하는 과정 속에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고 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우 산만하고 단편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의 주장을 재구성해보면 우주론에서 심성론·經世論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체계적인 성리학적 이론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내용 역시 주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635)

즉 만물의 생성과정에 대해 그는, 천지만물이 있기 전부터 太極이 존재하였으며 태극에 천지만물의 理가 갖추어져 있고 이 태극에서 陰陽이 나오고 음양은 四象을 낳으며 千變萬化가 모두 그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理氣의 개념과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形而上者인 理가 形而下者인 氣보다 발생론적으로는 앞서고 초월적이지만 구체적인 만물에 내재해서는 기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636)

그리고 心과 性情·理氣와의 관계에 대해서, 심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태어난 바의 기이고 동시에 理가 그 속에 갖추어져 있으며 그 내재되어 있는 이가 바로 성이라고 보았다. 또한 심은 능히 성을 다할 수 있지만 성은 능히 그 심을 檢束할 줄을 알지 못하며 심은 능히 정과 성을 統攝할 수 있다고 하였다.637)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性理說에 관한 한 주자의 견해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이「왕자의 난」으로 제거된 뒤 조선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權近이었다. 그는 고려말 온건개혁파로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吉再처럼 끝까지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태종대에 출사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의 학문 계통에 대해서는 李穡의 학문을 계승했다든지638) 정도전의 영향이 더 컸다든지 하는639) 등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초기의 성리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이후 사상계의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제시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성리학에 관한 그의 저술로는≪入學圖說≫·≪五經淺見錄≫·≪四書五經口訣≫등이 있다. 정도전의≪學者指南圖≫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입학도설≫은 성리학의 중심 개념과 이론을 주돈이의<태극도설>과 주자의<中庸章句>說에 입각하여 도식화한 것으로 권근의 철학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 도설에서 그는 우주론·본체론뿐만 아니라 특히 심성론에 관심을 기울여 유학의 최고 이상인 天人合一이 인간의 心性 파악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심성에 있어서의 理氣와 四端七情·人心道心 등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640)

<天人心性合一之圖>·<天人心性分析之圖>라는 제목과, 그림의 전체적인 모양이 인간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특히 사단칠정론과 인심도심설에서 4단과 7정을 理와 氣, 인심과 도심으로 나누어 보거나 수양론에서 敬을 강조하는 것 등은 이황·鄭之雲 등 16세기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641)

또한≪입학도설≫의<五經體用合一之圖>·<五經各分體用之圖>에서 권근은 5경 전체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각 경전, 나아가 각 경전의 주요 내용을 全體·大用의 관계로 설명해 내려고 하였다. 5경에 대해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에서 주석을 붙인≪오경천견록≫은 바로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저술된 것으로 당시 중국 학자에 비해서도 수준이 뒤떨어진 것이 아니었다.642)

권근 이후 중앙의 사상계를 주도한 것은 金泮·卞季良·許稠 등 그의 문인들이었으며 여기에 趙庸 및 그 문인, 金叔滋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한계도 있지만 이 시기에 권근의 성리학 수준을 뛰어넘는 연구 업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학자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에 대한 연구보다는 국가의 문물제도의 정비와 성리학 이념의 교육과 보급에 더 관심을 갖게 했던 데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당시 학자들은 세종대 文衡으로 활약했던 변계량처럼 주자성리학의 이론틀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완전히 답습하지 않고 여러 면에서 다른 견해를 보이거나,643) 김반이나 尹祥처럼 성리학적 세계관에 충실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작업보다는 成均館에서의 교육에 더 힘을 쏟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644)

세종대≪사서대전≫·≪오경대전≫·≪성리대전≫의 도입과 간행은 그 동안≪대학연의≫와 같은 정치지침서와≪근사록≫과 같은 입문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주자의 저술들을 접해왔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성리학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뿐만 아니라 송·명대 학자들의 다양한 주석과 이론을 담은 이 책들은 송대 성리학을 폭넓게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난해함과 동시에 당혹감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645) 실제로≪성리대전≫은 경연의 과목으로 채택되었지만 중종대까지도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646)

문물제도 정비의 경주, 그리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미확립을 특징으로 하는 이 시기 사상계의 경향은 세조대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세조의 왕위찬탈을 둘러싸고 중앙 학계가 소위 참여파와 반대파의 두 부류로 나뉘면서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학자들은 문물제도의 정비에 더욱 주력하면서 학문적 성격도 주자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공리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들을 강조하였다.647)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확고히 성립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 성리학의 역할과 비중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세조의 집권에 반대하고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도교·불교 등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사상적 조류를 이루는 三敎會通思想의 단초를 열어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金宏弼·鄭汝昌 등 영남학자들과 교류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쳐 이후 조선 성리학에서 의리와 도덕성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며 강조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648)

성종대에 들어서면서 고려말 온건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에 남은 세력들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영남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향촌재지세력이었던 이들의 등장은 그 때까지 지속되어온 초기의 학문적 경향과 전통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金宗直을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刑政보다 敎化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훈척의 비리와 전횡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였다. 이제 성리학이 훈척 중심의 기존 체제를 공격하는 사상적 무기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학문 풍토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먼저 修己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주자성리학 修身書인≪小學≫이 중시되었다. 14세기 후반 고려사회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조선 초기부터 사회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성균관과 鄕校 등 官學을 통하여 널리 보급되었으나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였으며 그나마 학생들에게는 일상의 내용만을 다룬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649)

그러나 본래 주자는 이 책을 성리학의 大綱을 서술해놓은≪大學≫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修身과 齊家의 학문이 아닌 ‘修己治人’과 天下를 다스리는 과정의 하나로 제시하였었다. 신진사류들은 바로≪소학≫의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당시의 학문 풍토를 일신하고 기존 체제를 바꾸어 나가는 출발점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훈척과 사림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평생토록≪소학≫만을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한 金宏弼이었다.650)

성리학에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道學的 성격의 강화와 함께 나타나는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주자 중심, 의리 중심의 道統論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651) 이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재야학자들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동시에 세조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이 학문에 반영된 것이었으며 훈척을 공격하는 효율적인 무기이기도 하였다. 文廟從祀論議에서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던 반면 李齊賢·이색·권근은 학문이 순정치 못하다든지 불교를 숭상했다든지 하는 이유로 점점 어렵게 되어갔던 것도 이러한 변화의 한 모습이었다.652)

영남사림의 이러한 사상적 특징은 조선 성리학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것은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심화가 아니라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였다. 더욱이 그 사회적 실천은 훈척의 강력한 반발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이론적 확립과 그 사회적 실현, 이 두 과제는 다음 시기로 미루어져야만 했다.

634) 文喆永,<朝鮮初期의 新儒學 수용과 그 性格>(≪韓國學報≫36, 一志社, 1984), 40∼47쪽.

韓永愚,<鄭道傳의 政治經濟思想-『周禮』와의 관계를 중심으로->(≪三峰 鄭道傳先生의 學問과 思想≫, 1992), 5∼9쪽.
635) 韓永愚, 앞의 책, 55∼86쪽.

李碩圭,<鄭道傳의 政治思想에 대한 硏究-儒敎的 民本主義의 추구방식과 관련하여->(≪韓國學論集≫18, 漢陽大, 1990), 9∼20쪽.
636) 鄭道傳,≪三峰集≫권 9, 佛氏雜辨, 佛氏眞假之辨, 佛氏昧於道器之辨 및 권 10, 心氣理篇, 理諭心氣.
637) 鄭道傳,≪三峰集≫권 9, 佛氏雜辨, 佛氏心性之辨.
638) 都賢喆,<牧隱 李穡의 政治思想硏究>(≪韓國思想史學≫3, 韓國思想史學會, 1990), 65∼67쪽.

金鎔坤,≪朝鮮前期 道學政治思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23∼35쪽.
639) 李丙燾,≪韓國儒學史≫(亞世亞文化社, 1987), 109쪽.

許南進,<朝鮮前期의 性理學硏究-변천과 역사적 기능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26, 國史編纂委員會, 1991), 188∼190쪽.
640) 尹絲淳,<朝鮮 初期 性理學의 展開>(≪韓國哲學史≫中, 韓國哲學會, 1987), 139∼142쪽.
641) 柳仁熙,<退·栗 이전 朝鮮性理學의 問題發展>(≪東方學志≫42, 1984), 193쪽.

裵宗鎬,<權陽村의 哲學>(≪權陽村思想의 硏究≫, 교문사, 1989), 243∼253쪽.
642) 金承炫,<五經淺見錄을 통해 본 陽村의 經學思想>(≪東洋哲學硏究≫4, 東洋哲學硏究會, 1983).
643) 김홍경,≪조선초기 관학파의 유학사상≫(한길사, 1996).
644) 李丙燾, 앞의 책, 116∼122쪽.
645) 許南進, 앞의 글, 192∼193쪽.
646) 金恒洙, 앞의 글, 144∼147쪽.
647) 韓永愚,<梁誠之의 社會政治思想>(≪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9).
648) 裵宗鎬,<梅月堂 金時習의 哲學思想>(≪大東文化硏究≫17, 成均館大, 1983).

鄭鉒東,≪梅月堂金時習硏究≫(民族文化社, 1983), 201∼214쪽.
649) 金駿錫,<朝鮮前期의 社會思想-『小學』의 社會的 機能 分析을 중심으로->(≪東方學志≫29, 1981), 130∼140쪽.
650) 李泰鎭,<士林派의 鄕約普及運動-16세기의 經濟變動과 관련하여->(≪韓國文化≫4, 서울大, 1983), 17∼23쪽.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266∼268쪽.
651) 池斗煥,≪朝鮮前期 儀禮硏究≫(서울大 出版部, 1994), 135∼190쪽.

金鎔坤, 앞의 책, 106∼135쪽.
652)≪成宗實錄≫권 82, 성종 8년 7월 무술.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