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2. 붕당정치의 전개2) 제1차 예송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1. 사림의 득세
        • 2.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2. 붕당정치의 전개
          • 2) 제1차 예송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1)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1) 환국의 개념과 범주 및 연구 시각
          • 2) 환국의 실상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1) 언관권·낭관권의 형성
          • 2) 권력구조의 변화와 사화 및 붕당
        • 3. 천거제의 시행과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1) 수도 방위 군영
          • 2) 수도 외곽 방어 군영
          • 3) 왕권 수호의 금위군영
          • 4) 붕당정치와 군권
        • 6. 지방 군제의 개편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3)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2. 상평창·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 3. 인구의 감소
          • 1) 조선시대 인구 추정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2) 양전사업
        • 6.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변화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2) 내수사전과 궁방전의 확대
          • 3) 둔전의 확대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2) 대동법의 내용
            • (1) 대동세의 부과·징수
            • (2) 대동세의 지용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2) 시전의 변화
          • 3) 공인과 공계
          • 4) 장시의 발달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1) 군문·영문에 의한 군수공업의 성장
          • 2) 군수광업의 발전과 광산의 경영형태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2) 금속화폐의 논의와 주조
          • 3) 화폐정책의 난맥과 폐단
        • 5. 중개무역의 성행
          • 1) 임진왜란의 발발과 조명무역
          • 2) 임진왜란의 종식과 중개무역의 재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예론의 정치분쟁화

 허목의 상소로 야기된 예송은 송시열·송준길의 반박으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의견를 받는 한편 사관을 赤裳山 史庫에 보내 실록에서 전례를 찾아오게 하였다. 정태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국제를 근거로 기년을 고집했으나, 우의정 원두표는 당초의 견해를 바꾸어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였다.0152) 이 무렵 조야의 분위기는 상당히 삼년설에 기울어진 것 같았고0153) 현종도 내심 기년설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0154)

 그런데 이 때 윤선도의 상소가 들어감으로써 예송의 진행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윤선도의 복제소는 허목의 두번째 상소와 실록 고출로 제2차 수의가 진행중이던 현종 원년(1660) 4월 18일 승정원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내용을 미리 검토한 도승지 金壽恒 등은 그것을 곧바로 왕에게 올리지 않고 요지를 보고한 후 그것이 예론을 가탁한 음흉한 중상모략이라고 아뢰어 왕이 친람하지 않고 반려케 하였다.0155) 다음날부터 윤선도에 대한 삼사의 탄핵이 시작되어, 24일 權諰의 구원 상소에도 불구하고 25일 疏章을 불태우고 30일 삼수로 정배하게 되었다. 서인들은 이 때 그를 극형에 처하기 위해 논박을 계속했으나, 그가 오랫동안 효종의 師傅를 지냈던 인연때문에 겨우 극변유배에 그치게 된 것이다.

 그의 상소는 대체로 허목의 재최 삼년설을 지지한 것으로서 그 근거와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五服制의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고, 새로이 효종 적장자설을 내세웠다. 또 그는 이른바 嫡統宗統說을 제기하여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즉 그는 송시열 등의 중자설이 효종의 적장자 지위를 부정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종통과 적통을 분리시키려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또 여기에 덧붙여 송시열의 정치적 실책과 개인적 과오에 대한 심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0156)

 윤선도의<服制疏>는 제1차 예송의 전개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고 그가 제기했던 종통·적통설은 왕실 전례 논쟁을 정치문제화하여 정국을 변동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정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인조반정 이후 당시까지 견제와 비판의 원리에 의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서인 주도와 남인 참여의 정치틀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윤선도의 상소로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쌓이게 되었고, 결국 그가 서인들의 공격을 받아 삼수에 유배되고 난 직후에 우의정 원두표의 헌의가 뒤늦게 들어왔다.

 원두표는 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목의 삼년설을 변호하였다. 그의 논리는 대부분 허목의 것을 답습한 것이었지만, 윤휴와 윤선도 등의 예설에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요약해 보면 첫째, 장자를 위한 삼년복은 繼體와 承重을 위한 것으로 장차 계승할 자에게도 삼년복을 입으니 하물며 이미 계승한 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으며, 둘째 제왕가에서는 실제로 대를 이은 계통만을 중히 여기며, 셋째 종통과 적통은 나눌 수 없으며 종통이 있는 곳에 적통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와 같이 대신들 중에서 중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으므로, 왕은 또 다시 수의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원두표의 건의에 따라 李惟泰·尹鑴·沈光洙·許厚·尹宣擧 등 유현으로 알려진 재야 학자들도 헌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에 이유태는 기년설을, 심광수는 삼년설을 간단하게 진술하였고, 허후와 윤휴는 명백한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윤선거는 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윤휴·심광수·허후 등은 모두 삼년설을 주장하던 인물들이었으나 그들은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에 위압되어 제대로 의사를 개진하지 못하였다.0157)

 원두표의 건의로 이루어졌던 유신들의 헌의가 미진하였으므로, 예조의 건의에 따라 왕은 최종적으로 대신들의 수의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모두 고례는 불문하고 당초 헌의한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확정할 것을 청하였고, 실록을 상고한 결과도 일찍이 삼년복을 행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은 다수 의견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여 마침내 기년제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현종 원년(1660) 3월 허목이 제기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삼년설은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주장했던 고례에 의한 기년설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역시 조정에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정태화 등이 고수한 國制(≪經國大典≫)에 의한 기년설이 국가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효종의 장자·차자 지위를 구별하지 않아도 좋은 일종의 편이주의적이며 절충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목전의 문제를 무마하기에는 적당한 처사였으나 문제의 불씨는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더구나 서인들은 국제이든 무엇이든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그들의 예론이 승리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 일파의 기년설은 고례에 근거한 것으로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므로,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 기년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서인들의 승리에 대한 이러한 착각 때문에 그들은 제2차 예송에서 패배를 자초하게 되었다.

 제1차 예송에서 최대의 파란을 일으킨 윤선도의<복제소>는 남인들의 집단적 의사 표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일으킨 물의는 곧 당론이라는 집단적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로 인해 미증유의 정치적 위협을 느낀 서인들은 이론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윤선도를 중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이 처사를 부당하게 생각한 남인들, 즉 권시·조경·趙壽益·洪宇遠 등이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를 변호·구원하고 기년설의 오류를 논변하다가 처벌되었다. 이 문제는 또한 조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성균관 및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격론을 유발시켜 전국적인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현종 2년 성균관 학생들의 집단상소,0158) 현종 7년의 영남 유생 柳世哲 등 1,400여 명의 연명 상소0159) 및 이에 대한 관학 유생과 호서·호남 유생들의 반박 상소 등이 그것이었다.0160) 이들에 대한 서인정권의 처분은 단호하여, 삼년설을 옹호하거나 윤선도·조경 등을 두둔하는 관원들과 유생들은 가차없이 조정에서 추방하여 폐고시키거나 정거 처분하여 출사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 때문에 허목·윤휴·윤선도·조경·홍우원·조수익·趙壽基·洪汝河·吳挺昌 등의 명망있는 남인들과 권시·金壽弘 등 삼년설에 동조한 서인 일부가 현종대 15년간 폐고되어 벼슬에 나오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인들의 타격은 컸으나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許積과 柳赫然 등 예송에 가담하지 않았던 남인 일파는 여전히 요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이들은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고 人事薦望權을 포함한 대부분의 권력은 서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상의 전개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제1차 예송의 성격을 정리해 보면, 이 예송은 당초 남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발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효종의 비정상적 왕위계승이 안고 있었던 종통문제의 필연적인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송은 북인출신으로서 남인보다 서인과 친했던 윤휴에 의해 문제화되었지만, 실상 인조와 효종간의 종통문제는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또 이 복제예송은 17세기에 이르러 급속하게 발달한 조선 예학의 서로 다른 두 경향의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시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던 王朝禮 중심의 분별주의적 예학과, 1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게 된≪가례≫중심의 보편주의적 예학의 왕실종통에 대한 인식차이가 문제를 일으킨 주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송은 당초 경전 해석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논쟁으로 전개되었으나, 윤선도의 상소에 의해 종통문제를 건드리게 됨으로써 미묘한 정치적 금기를 촉발하여 극단적인 당파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특히 그의 송시열·송준길에 대한 인신공격도 양파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파간의 불신이 깊어지게 되었고 일부 남인들에 대한 폐고 조치는 그들의 원한을 증대시키고 붕당적 결속을 가져오게 하였다. 정태화가 주도했던 당시의 조정은 양측의 장자·중자설을 모두 버리고≪經國大典≫과≪大明律≫을 근거로 한 이른바 국제기년복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효종의 장자·중자 지위를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편리하고도 절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 때 장자·중자의 위상을 명백히 밝혀 놓지 못했던 것이 바로 제2차 예송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 채택한 국제기년복은 송시열 등이 주장한 고례기년복과 같은 기년복이었으므로 제1차 예송은 서인측의 승리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 예송에서 서인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패배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제1차 예송은 문제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 둠으로써 또 한 차례의 예송을 예비하고 있었다 하겠다.

0152)≪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정유.
0153)尹 鑴,≪白湖全書≫권 26, 書宋貳相小說後(慶北大本 中卷, 1,053쪽).
0154)현종은 같은 복제 개정 문제로 3차례나 대신·유신들에게 수의케 하였는데, 이는 삼년설에 상당히 동요된 증거라 하겠다.
0155)≪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임인.
0156)尹善道,≪孤山遺稿≫권 3, 論禮疏.
0157)≪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5월 정미.
0158)≪顯宗實錄≫권 4, 현종 2년 5월 병진.
0159)≪顯宗實錄≫권 12, 현종 7년 3월 계묘.
0160)≪顯宗實錄≫권 12, 현종 7년 3월 을사·4월 기사 및 5월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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