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제2차 예송은 효종비 仁宣王后의 상에 조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사건으로서 그 논쟁의 구조나 원리는 제1차 예송과 같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전자에서와 같이 본격적인 서인 대 남인의 쟁송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예송은 영남 유생 都愼徵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지만, 제1차 예송의 주역들인 남인들(허목·윤휴·윤선도·권시 등)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2차 예송은 현종 15년(1674) 2월 喪服을 처음 정할 때 같은 서인들 사이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0161) 주된 논쟁은 그 해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왕과 賓廳의 신하들(서인) 사이에서 있었고,0162) 3일 만에 왕은 독단으로 복제를 개정하고 빈청의 대표였던 영의정 金壽興과 禮官들을 처벌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지었다.0163) 이 복제논쟁은 결국 현종과 서인 조신들간의 논쟁이었다. 이 때 왕의 측근에서 복제의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왕비의 종형제였던 金錫冑였다. 김석주는 외척 청풍 김씨 일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현종말∼숙종초의 정국 운영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제2차 예송은 당시에 이미 김석주의 송시열 일파 제거 공작으로 이해되고 있었다.0164) 이를 위해 그는 허적·오정위·오정창 등의 남인들과 손을 잡았다.0165) 이리하여 국제기년복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던 송시열 일파의 서인 주류가 몰락하고, 청풍 김씨와 남인의 연립정권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에 걸쳐 다져졌던 서인정권의 지각을 붕괴시키고 정국의 구도를 재편한 초유의 정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