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학과 기술
1) 조선 후기의 전통 과학기술
조선 초기 특히 15세기 세종 때에는 과학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의 높은 수준에 주목하다 보면, 그 후 특히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은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 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조선 중기 이후 유교가 득세하면서 과학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심해져 발달이 중단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임진왜란 등으로 정상적인 국가발전이 진행되지 못했다는 방향으로 역사를 해석하기도 한다. 또 세종대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했던 것은 유교사상의 틀 속에서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세종대의 놀라운 과학기술 발전은 새 왕조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고, 따라서 이런 과학기술의 활동은 조선왕조가 안정된 정권을 확립한 다음에는 그 필요성을 잃어갔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583) 그러나 조선 후기에 과학기술이 위축되었다면, 그 원인의 한 부분은 분명히 당시 사회의 특이한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유교사회가 안정되면서 진행된 신분의 차별화과정은 조선사회에 아주 특이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주었는데 中人과 賤人들에 의한 과학과 기술의 전문화현상은 그 하나라 하겠다. 바로 이런 현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그리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양반지배층을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외곽으로 밀려나 값진 추구대상이 되지 못했고, 전문화와 세습화의 과정에서 전담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양반층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었고, 그들에 의해 부분적인 발전이 이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을 위해 의학을 연구해야 한다거나,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이니 알 필요가 있다는 식이었고, 조상의 산소를 모시거나 집을 바람직한 곳에 짓기 위한 기초지식으로서의 풍수지리학이 중시되는 등 다분히「실용적」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과학기술은 대체로 세 가지 분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그것은 ① 과학사상, ② 과학 및 공학, 그리고 ③ 생산기술의 셋으로 구별지을 수가 있다. 이들 세 분야는 조선사회가 특이하게 발전시켜 온 신분층의 구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사회 네 계급이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네 계급이란 지배층인 양반과, 지배층의 보조계층이라 할 수 있는 중인, 그리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평민집단인 상인, 그리고 자유롭지 못했던 천인 등을 가리킨다. 과학사상이 제일 위의 지배계층인 양반의 몫이라면, 과학이나 공학에 해당하는 분야는 양반의 보조계층인 중인의 몫이었으며, 실제 생산에 필요한 기술은 가장 아랫사람으로 치부되었던 양민에서 천인까지의 몫이었다.
이런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과학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유교의 인간중심주의를 배경으로 조선시대의 지식층은 자연에 대한 일차적 관심을 자연 그 자체에서 찾기보다는 인간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찾도록 훈련받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관은 조선시대의 과학발달에 일정한 한계요소로 작용했다. 자연현상은 인간사회의 잘잘못을 반영하는 災異로 여겨졌고, 그 때문에 이런 자연현상을 관측하여 보고하고, 또 이에 대해 대책을 세워 행하는 일은 유교정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자연현상 그 자체만을 탐구하는 학문―지금 우리가 부르는「자연과학」―이란 조선시대 사대부계층의 학자나 지식층이 추구해야 할 그런 학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중인층으로 낮춰 평가된 것은 조선시대의 이와 같은 이념적 틀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583) | 이 문제에 관해서는 朴星來,<조선시대 과학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韓國史 市民講座≫16, 一潮閣, 1995), 145∼166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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