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혜상공국의 설립과 상업수세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한 私商들의 활동은 국내외 물품을 교역하면서 개항 이후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개항 이후 외국상인들은 개항장만이 아니라 내륙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그들은 때로는 국내 상인들과 연결하거나 通詞를 내세워 현지인과 직접 접촉하면서 지방의 장시에까지 침투하였다. 이 같은 정세로 말미암아 원래 지방장시를 무대로 활동해 온 보부상들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지금까지 상업활동의 대가로 일정하게 정부의 요구에 봉사해 온 보부상들에 대하여 조선정부는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이래 점차 상업수세를 진행시켜 왔던 조선정부는 개항 이후 날로 늘어나는 사상들을 통제 장악함으로써 재원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1883년 가을 惠商公局을 설립하고 보부상을 관할하는 한편 이와 연계하여 사상들을 파악 통제하게 되었다.389)
봇짐장수나 등짐장수는 행상의 원초적인 형태로서 그 기원은 멀리 고려조 이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특히 18세기에 들어서 매 5일마다 개설되는 장시가 전국적으로 1,000여 곳을 헤아리게 되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그들이 돌아다니며 행상하는 지역내에서 일종의 행상길드인 보부상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때부터 상인길드조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 이들은 정부와 사이에 봉사와 포상의 관계를 맺었고, 각 지역에서 행상집단을 이루어 길드적인 조직을 갖추고 당시 민간에 널리 통용되던 接長의 제를 주축으로 삼았으나, 자신들의 圈域과 商權을 자위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390)
보부상들은 접장의 통솔 아래 상부상조하는 조직과 기율을 갖추고 지방 장시를 무대로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이나 권리가 미약하여 자본력이 우세한 사상 도고와 관권을 남용하는 吏校들로부터 상업상 이익을 침탈당하기 일쑤였다. 개항 이후 외국상인의 침투가 증대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될 기미를 보여주었다. 이에 한성부는 1879년(고종 16) 9월 보상들이 원래부터 갖추고 있던 조직을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는 조치를 통해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즉 보상에 대한 절목을 제정 발포하였다.
절목에 의하면, 서울에 8도 도접장을 두고 각도 각읍에 임소를 두어 각기 접장을 두며, 8도 도접장은 한성부에서 차출하되 圖書(印信)를 출급하여 8도의 행상·좌상을 통섭하도록 하였다. 각읍 임소의 접장은 해당 그 도의 접장에게 보고하고 차출하는데 각도 임소의 접장은 본도인으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지명하여 도접장에게 보고하여 驗帖을 발급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각도 각읍의 접장은 구역내의 행상인의 성명 등을 기록한 거주록을 도접장소에 보내어 도접장이 전국의 상원수를 파악할 수 있게 하고 행상인에게 名牌(驗標)를 발급하도록 하였다. 험표에는 업종·성명·거주지명·입록지(등록지)·임소명·도읍명·행처(행상처)를 기입하고 여기에 도접장의 도서를 찍도록 하였다. 이 같은 험표가 없는 자는 장시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점막에서 같이 머물지 못하도록 하였다. 官隷輩가 보상을 橫捉하는 경우에 험표를 제시함으로써 석방되게 하였다. 절목은 이외에도 각도 각 임소의 업무, 각종 사안에 대한 처리규정, 보상들의 상호부조규정, 보상에 대한 객주의 임무 등 각종 규정을 마련하였다.391)
정부는 1881년 윤7월에 다시<부상청절목>을 발포하여 서울에 도임방, 각도 각읍에 임방을 설치하여 전국의 부상들을 조직하고, 親兵營인 武衛所에 예속토록 하였다. 그리고 부상들에게 병자호란 때 세운 공훈으로 부여되었다고 전해지는 漁·鹽·水鐵·土器·木物 등 5종 물건에 대한 전매권을 부여하였다.392) 부상들은 이렇듯이 정부로부터 상업상의 권리를 보호받는 대가로 경제외적 봉사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무위소에 예속되었던 부상들은 무위소와 그 소속의 별기군 신설에 불만을 품고 구식군 군사들이 난(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이에 대항하여 조직을 동원함으로써 한때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정부는 즉시 삼군부를 부활하고 1882년 6월 12일 무위소에 예속되었던 부상들을 관할하게 하였다.393)
한편 한성부에 예속되었던 보상은 1882년 11월 그 관할권이 의정부로 이관되었다. 의정부는 褓商都所의 호소에 의하여 절목을 마련하여, 보상에 대한 험표를 商理所에 두고, 보상소의 험첩으로 각도에 반급하되 보상은 험첩대로 5전씩 수납하게 하였다. 대신 험첩은 매년 일차씩 갱신케 하고 都賈名色의 각항 수세를 혁파토록 각 도에 공문을 보내 보상으로부터 일체의 수세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상도소는 전국의 보상들에게 험첩대로 5전씩 징수하여 그 중에서 매년 5월 5,000냥씩 상납하도록 하였다. 즉 보상들은 매년 5전씩의 험첩대를 납부하는 대신 여러 종류의 징세침탈로부터 보호받도록 조치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보부상에 대한 통제가 이완되어 경향 각지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자 정부는 1883년 8월 1일 군국아문으로 하여금 보부상을 관장토록 하였다.394)
정부가 군국아문으로 하여금 보부상을 관할토록 하자 보부상들은 이를 기회로 보부상을 위한 기구를 특설하여 국가가 상업을 보호하는 특단의 조처를 취해주도록 호소하였다. 이러한 보부상들의 호소에 기초한 좌의정 김병국의 계청으로 국왕 고종은 1883년 8월 19일 보부상을 관할할 혜상공국 설립을 명하였다.395) 그리고 그 해 11월<혜상공국절목>이 발포되었다.396) 조선 후기 이래 그 중요성이 지적되어 오던 상업은 개항 이후 더욱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윤음이 내려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397) 보부상들은 세계정세를 내세워 상업에 대한 정부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부 또한 중요 산업으로 자리매김 하기 시작한 상업을 관할할 기구를 설립하게 된 것이었다.
혜상공국이 설립되자 보부상들은 행상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새로이 행상업에 종사하려는 자는 혜상공국의 관할을 받는 보부상단에 가입해야만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신참 보부상도 상당수 증가하였다. 보부상들은 信標를 반급 받고, 신표대금으로 매장에 2냥씩 납부하는 대가로 校吏輩나 土豪無賴輩·邑奴令輩의 침탈로부터 보호받았을 뿐만 아니라 場市의 지배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이외에 보부상들은 黨賊과 도둑의 단속 및 牒報, 국가유사시 盡忠報國의 의무를 지는 한편 장시세 징수에도 관여하여, 이들에 의해 징수된 稅錢은 각도의 도접장들을 통하여 서울로 상납되었고, 그것은 수령에 의해 정부에 첩보되었다.398)
보부상이 이렇듯 어용독점행상으로서 권한을 갖게 되자 보부상을 남칭하며 폐단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많이 생겨나 많은 이로부터 원성을 사게되었다. 이에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개화당은 혜상공국을 혁파대상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399) 따라서 고종은 1885년 8월 보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폐단을 척결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절목을 마련토록 지시하였다. 국왕의 명에 따라 혜상공국은 內務府 商理局으로 개편되고, 새로<상리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 발급되었던 신표는 전부 회수되었다. 原褓負商에 대한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여 상리국 명의의 신표를 새로 발급함으로써 보부상을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들을 엄중 단속하는 한편 縇布商·鍮油商·馬牛商 등은 보부상과 같은 절목을 적용하지 않도록 조처하였다. 이는 보부상 조직을 통해 모든 상인을 장악하려 했던 시도에서 일부 후퇴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부상 조직을 통해 이루어지던 지방장시에 대한 수세는 監考를 따로 파견하여 징수토록 하였다.400)
389) | 韓㳓劤,<負褓商-惠商公局의 設立과 그 餘波>(≪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一潮閣, 1980), 142∼1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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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 朴元善,≪負褓商≫(韓國硏究院, 1965), 57∼63쪽. |
391) | 韓㳓劤, 앞의 글, 151∼164쪽. |
392) | 韓㳓劤, 위의 글. |
393) | ≪備邊司謄錄≫263책, 고종 19년 6월 12일. |
394) | ≪日省錄≫268책, 고종 20년 6월 2일 및 270책, 고종 20년 8월 1일. |
395) | 韓㳓劤, 앞의 글, 152쪽. |
396) | 朴元善,<惠商公局節目>(앞의 책, 附錄, 1965). |
397)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12월 28일. |
398) | 韓㳓劤, 앞의 글, 159쪽. |
399) | 金玉均,<甲申日錄>, 政綱14條. |
400) | ≪日省錄≫295책, 고종 22년 8월 10일. ≪統理機務衙門日記≫, 고종 22년 3월 25일, 4월 29일, 10월 10일 및 23년 2월 3일 등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