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객주-상회사의 설립과 정부의 상업수세정책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물화의 집산지인 읍이나 포구에는 상품매매의 중개, 위탁상품의 보관, 금융, 상품의 수집과 도매, 수세업무 등을 행하는 객주·여각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401) 객주 중 처음 출현한 것은 船商客主였다. 선상객주는 船旅客主人 또는 船旅閣主人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京江 및 沿江의 포구, 그리고 개항 이후에는 개항장에 분포하였다. 선상객주는 경강에서 처음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어물유통과 관련되어 출현하였다. 선상객주에 이어 화물객주와 여객객주도 발생하였다. 화물객주는 布木·紬羅 등 직물이나 일용품을 생산지 혹은 장시에서 수집한 상인이 이를 가지고 판매지의 객주에게 가면 객주가 이를 인수하여 가격을 살펴 판매하였다. 객주는 판매된 화물에 대해서는 수량이나 가격에 따라 약간의 구전 및 상객 체류중의 식비와 기타 잡비를 지불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물화만을 보내 판매를 위탁하는 일도 있었다. 화물객주 중 특히 미곡의 거래를 전담할 경우 이들을 미곡객주라 하였다. 미곡객주는 도매업·운송업·창고업을 행하였다. 이들은 연강이나 포구 등지에 옥사를 짓고 미곡과 그 외의 곡물류 식염·어류 등을 실은 선박이 입항하면 물화를 예치하고 창고사용료를 받거나 위탁받아 판매한 후에 구전을 받았다. 화물객주를 그들이 취급한 물종에 따라 공산물을 취급할 경우는 객주·농산물·어염류 등을 주로 취급하는 경우는 여각이라 칭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객객주는 보행객주로도 불렸는데, 상대하는 여객에 따라 보상객주와 부상객주로 구분되었다. 보상객주는 보상을 상대로 물화를 공급했으며, 부상객주는 부상을 숙박시키고 숙박료를 받거나 부상이 갖고 온 물화의 판매를 위탁받고 백분의 일씩 구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여행자의 여관도 경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402)
객주의 거래가 활발해지고 신용기관의 성격을 갖게 되면서 금융업을 주로 하는 換錢客主도 출현하였다. 환전객주는 각지의 객주와 연락하여 예금이나 대부 또는 어음할인 등 금융업을 행하고 의뢰자에게 이자를 지불하거나 혹은 수수료를 받았다. 객주가 자금을 대부하고 이식을 취하는 일종의 금융업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객주는 한 가지만을 전문으로 하지 않고 보통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종류를 서로 겸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03)
상업거래에서 객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에 대한 수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세는 객주의 구문 중에 수세분을 포함하거나 객주의 수입 중 일부를 징수하였다. 수세가 구문 중에 포함되어 그 일부로 징수되는 경우 이를 分稅 또는 抽分이라 하였다. 객주를 통해 수세할 경우 이를 主人例라 하였고, 객주가 분리되어 수세가 이루어질 경우 객주 이외의 특정인을 차정하여 주인으로 삼거나, 客主都中으로 하여금 관장케 하였고, 또는 객주 중 특정인을 주인례에 따라 궁방이나 관아에서 차정하여 징수하였다.404)
상업에 대한 수세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 액수가 증대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상업에 대한 수세가 각 宮과 각 司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모리배들이 이들 궁이나 사의 위촉을 빙자하여 향반이나 토호들과 함께 제멋대로 세의 명목을 붙여 수탈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와 같은 수세행위는 중앙정부의 재정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상업의 발달을 저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1876년 문호가 개방된 이후 외국상인의 진출이 본격화되고 외래상품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상업에 대한 수세제도의 정비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통리아문은 상업에 대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상업을 장려하는 것이 으뜸이며, 상업을 장려하는 방도는 상업을 보호하는 것이 으뜸이라” 하고 도고와 무명잡세를 혁파토록 하였다.405) 대신 통리아문은 상업세를 집중화하고 지역별·물종별로 전관하는 수세담당자를 차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상업에 대한 수세를 국가재정의 중요한 보용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406)
국가의 이러한 상업과 수세정책에 따라 객주들의 새로운 조직이 나타나게 되었다. 객주들의 조직은 객주도중·상회사·상업회의소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객주의 조직으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객주도중이었다. 객주도중은 여러 객주들의 업무를 조정하면서 상권을 보호하고 국가에 대한 납세를 조정하는 등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도중은 업무의 조정과 수세의 공동관리 등의 업무 이외에도, 조직원의 친목을 다지고 상호간의 예의를 함양하는 등 친목단체의 주역으로도 기능하였다. 도중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동 업종에 새로 참여하려는 자를 제한함으로써 기존 조직원의 권리를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객주들은 재래의 계의 형태를 띤 稧社조직을 갖추기도 하였다. 객주도중이나 계사조직은 특정지역 또는 특정물종의 유통체계에서 객주의 독점권을 보장하는 조직으로 기능하였다.407)
조선정부는 이들 조직을 통하여 세원을 확보하고 저율관세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통리아문은 중앙차원에서 전국에 걸쳐 지역별·물종별로 수세를 전관하는 都客主를 차정하고 乾口文·分稅 등의 명목으로 상업세를 징수케 하였다. 都客主는 首客主·都主人·都船主·都船主人·元客主·都稅監·都馬房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주로 객주로부터 수세를 징수하여 지정된 기관에 상납하였다. 도객주는 다수의 객주가 있는 지역 또는 물종에 주로 차정되었다. 도객주가 차정되어 수세를 담당하게 되면 이들에 의한 수세 이외의 다른 수세는 금지되었다. 물종별 도객주는 소금·젖갈·북어·목화·멸치 등 특정한 상품을 취급하는 객주로부터 분세를 징수하는 것을 업무로 하여 차정되었다. 또 지방별로 도객주는 특정한 지역의 船隻을 전관하며 대상으로 하는 지역과 거래하는 선상객주들로부터 분세를 징수하는 것을 임무로 하여 차정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특정한 대상지역을 한정하지 않고 상당히 넓은 지역의 선척을 관장하는 도객주도 있었다.408)
통리아문은 1885년 京江의 有文券主人에게 전관지역을 지정하고 이들로부터 ‘乾口文’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1889년에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경강 유문권주인의 ‘各邑分掌列邑之例’에 따라 개항장에도 지역별 전관지역주인(객주)을 지정하여 납세를 각 읍에 균분 배정하였다. 전관지역주인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해당 지역의 물화는 지역주인 즉 지정객주에게 구문과 분세를 납부함으로써 그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저율관세와 任自貿易(자유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의 무역과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측은 수호조규 제9관과 무역규칙 제18관등을 근거로 해관세 이외에 다른 세를 어떠한 명목이든 수입품에 부과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이의 철폐를 요구하였다.409)
1880년대에는 객주들의 조직으로 商會社가 출현하였다. 1880년 전후 개화정책 추진에 대한 필요성이 급격히 세를 얻게 되면서 서양의 상업조직과 운영의 원리도 배우고 수용해야 할 신문물과 제도의 하나로 지적되어, 1882년 가을 서울에 사는 幼學 高潁聞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하였다.
商會所를 설립하여 都下에 經商大賈를 초래하여 이익 되는 길과 편하고 불편함을 의논하게 하고 손익에 따라 징세 하도록 해야 한다(≪日省錄≫260책, 고종 19년 9월 22일).
또한 1883년 10월부터 발간된≪漢城旬報≫는 여러 사람이 자본을 합하여 農商工賈의 사무를 辦理하는 조직으로 상회사가 있음을 말하고, 철도회사·선박회사·제조회사·개간회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410) 조선정부는 이러한 상업조직을 통하여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상업수세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개항장 객주들의 새로운 조직으로 商會·商議所·商法會社 등이 출현하게 되었다. 즉 1883년 원산에는 상민들의 청원에 의하여 상의소가 설치되었고. 1885년 인천항에는 상회가 설립되었다. 1888년에는 원산·부산 등지에 均平會社가 설립되었고, 1889년 7월에는 부산항 객주도중을 중심으로 상법회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산 동래의 하단과 엄궁, 양 포구의 객주들도 1893년 하단엄궁상회사를 조직하였다.411) 이는 조선정부가 회사의 설립을 적극 후원하면서 종래의 收稅監官의 제도를 객주상회사의 허가를 통한 영업세 징수형태로 바꾸어 나가는 방향으로 수세정책을 취함에 따라 객주들이 이에 부응한 결과였다. 이들 조직은 아직 자본을 모아 영업을 하는 ‘結資營商’의 근대적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 상업에 대한 수세를 조정하고 객주들의 상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상업활동을 공동으로 영위하는 ‘結社營商’의 조직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12)
1880년대에 이르자 개항장 인천을 비롯하여 상업이 성행하는 곳에는 종래의 객주·여각과 달리 대소 상인들이 새로운 상점을 개설하여 각기 ‘商號’를 쓰는 상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상업을 末業으로 경시했던 상황에서 이제 양반도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공식으로 허락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었으므로 사회변화에 민감한 자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모아 상회나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업수세를 통해 재정확충을 기하고자 했던 통리아문은 새로 생겨나는 상회의 창설자가 자본을 모으고 장정을 마련하여 보내오면, 憑標를 주어 그 설립을 허가하고 소정의 납세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이들이 상업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지방에 있어서의 잡세나 분세를 징색하지 못하도록 보호조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이후 많은 私營의 상회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413)
이들은 객주·여각과 같이 독점적으로 물화의 매매를 중개하고 알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직접 물화를 구입하고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도모하였다.414) 그런데 객주와 새로 출현한 상회 사이에는 분쟁이 자주 야기되었다. 그것은 객주와 상회가 서로의 영업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허다한 데다가, 객주가 25객주분장열읍제에 근거하여 상회가 자기자본으로 구입해 온 물건의 경우에도 객주의 해당 읍의 물화에 대한 분장권을 내세워 침탈하는 경우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객주와 상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분쟁에 대하여 상회가 자기자본으로 구입해 온 화물인 경우 상회에 귀속되도록 하고, 객주분장읍의 土商화물인 경우 그 읍주인(객주)에게 귀속토록 조치하고, 어떠한 사람이든지 자본을 마련하여 점포를 개설하고 영업을 기도하는 자에 대해서는 官許文憑을 발급하여 자유로 영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상회와 객주는 각기 영업세 납부의 의무를 준수하도록 지령하였다.415)
401) | 객주와 여각은 별개의 유래를 갖고있으나 상업거래와 관련하여 양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韓㳓劤, 앞의 책, 1980, 172∼1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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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 柳承烈,≪韓末·日帝初期 商業變動과 客主≫(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11∼17쪽. |
403) | 위와 같음. |
404) | 柳承烈, 위의 글 19쪽. |
405) | ≪高宗實錄≫, 고종 20년 6월 23일. |
406) | 韓㳓劤, 앞의 글. 柳承烈, 앞의 글. |
407) | 柳承烈, 위의 글. |
408) | 柳承烈, (앞의 글), 44∼53쪽. |
409) | 柳承烈, 위의 글, 52쪽. |
410) | ≪漢城旬報≫3호, 1883년 11월 20일,<會社說>. |
411) | 柳承烈, 앞의 글, 43쪽. |
412) | 韓㳓劤, 앞의 글, 219∼232쪽. |
413) | 韓㳓劤, 위의 글, 204∼232쪽. |
414) | ≪統理衙門日記≫, 고종 26년 11월 16일. |
415) | 韓㳓劤, 앞의 글, 210∼21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