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임오군란」의 전개과정에서 하층민들이 달성하려 했던 요구와 공격 목표는 단계적으로 바뀌면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초기단계의 요구는 等訴의 형태를 취했다. 비제도화된 통로이기는 했지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일 뿐, 기존 사회제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등소를 통한 요구는 도봉소사건으로 잡혀간 군병들의 석방과 급료의 정상적 지급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하층민들은 곧 비폭력적 방식을 포기하고 무력행사에 돌입하게 된다. 일단 운동수단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하층민세력이 가장 먼저 공격했던 대상은 급료의 지급문제와 직접 관련된 선혜청 책임자 민겸호와 김보현이었다. 이들은 부패한 관료의 상징이며 가장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하층민들이 믿고 있던 인물이었다.
하층민들의 운동은 대원군의 명확한 목표 제시를 통해 자극 받아 점차 체제변혁의 차원으로 발전해 갔는데 이에 따라 공격대상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공격대상은 ① 이최응·민창식을 비롯한 민씨 척족세력의 관료 대신, ② 별기군 책임자 윤웅렬을 비롯한 개화파관료 및 이와 관련된 자, ③ 중인 부호, ④ 서울 근교의 사찰과 巫覡, 그리고 ⑤ 일본세력이었다.675) 실제로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 중인 부호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일본세력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하층민들의 목표는 자신들의 생활을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민씨 척족정권과 개화파 그리고 이와 연결되어 이익을 챙기며 일본을 끌어들이던 중인 부호세력을 제거하고 일본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정당성을 잃고 있는 기존 지배층과 외세를 제거한 바탕 위에 하층민들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전개하리라 기대되는 정치권력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임오군란」을 통해 표현된 도시 하층민들의 요구가 이처럼 봉건적 사회체제를 공격, 붕괴시키려는 측면을 강하게 지녔으면서도, 왕조 자체를 그리고 양반지배층을 전체적으로 이념의 차원에서까지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민씨 척족관료와 개화파관료들을 공격, 살해하고 궁궐에 들어가 이른바 국모인 민비를 제거하려 했던 사실은 왕조 존숭의식이 크게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봉건관념으로는 국왕이 있는 궁궐에 침입한다거나 왕비를 살해한다는 것은 왕조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국왕을 해치려는 생각은 없었고 지배층에 대한 공격도 대원군세력을 비롯한 다른 양반관료계층은 공격하지 않은 선택적인 것이었다. 하층민들의 중세적 사회의식이 크게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극복단계는 아니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고 있지도 못했다. 이는 도시 하층민들이 안고 있는 한계였다. 또한 도시 하층민세력을 지원하는 다른 사회세력이나 도시 하층민의 이익을 반영시켜 개혁이념을 제시하며 실현시킬 정치세력 역시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도시 하층민의 저항운동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변혁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보수적인 한계를 안고 있던 대원군정권에 의존하는 데 머물렀던 것이며, 새로운 근대적인 이념과 개혁안을 제시하는 운동이기보다는 중세사회체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힘을 발휘했으며,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지만 근대사회 체제형성의 계기로서보다는 중세사회체제의 붕괴, 해체를 촉진시키는 운동이 되었던 것이다.
675)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11일. 鄭 喬,≪大韓季年史≫, 고종 19년 7월. 朴周大,≪羅巖隨錄≫3책, 宣惠廳紛擾, 임오 6월 11일, 國史編纂委員會 編, 282쪽. 이 중 사찰과 무당은 민비가 국가재정을 남용하여 求福불공을 드리고, 무당들을 궁궐로 불러들이던 일들과 관련하여 도시 하층민들의 표적이 되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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