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1. 동학농민군의 재기
동학농민군은 9월 중순에 들어와 다시 무장 봉기를 결정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난 후 3∼4개월 동안 정국은 급변하였다. 동학 조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합류해 왔고, 지방관아의 농민 통제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장악한 지역에는 民政기관인 집강소가 설치되어 농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폐정을 개혁하는 전례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조선 국토 안에서 벌어진 청일 간의 전투로 인해 경기도·충청도·평안도 지역의 백성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행한 사실도 그때 그때 전국에 알려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한 속에서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 재봉기는 지역면에서 볼 때 1차봉기와 크게 차이가 났다. 제1차 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부 군현에서 시작되었지만 재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일시에 궐기한 것은 물론 경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많은 군현에서도 봉기하였다. 동학교단은 1차봉기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재봉기에는 교주 崔時亨이 起包令을 내려 전국의 조직을 참여시켰다.
전국에 걸친 대규모의 재봉기가 이처럼 가능했던 것은 우선 斥倭라는 명분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동학과 사회여론은 斥倭의 명분 아래 일치하였다. 민간에는 壬亂 이후 남아있는 적개심 위에 다시 국왕을 위해한 경복궁 습격사건으로 반일감정이 격화되었고, 일본의 再侵 우려가 고조된 속에서 성립된 민족종교인 동학이 조직과 이념을 제공하면서 對日戰爭에 앞장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