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5권 신문화 운동Ⅰ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2. 한국어 연구1) 언문일치의 첫걸음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1. 근대 교육의 성립
          • 1) 근대 교육 성립의 역사적 배경
            • (1) 개화정책의 추진과 신교육 수용론 대두
            • (2) 동도서기주의적 신교육 수용의 실패
            • (3) 선교사의 교육활동과 교육평등의식 계몽
            • (4) 변법개화파의 국민교육론 전개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의 성립
            • (1) 교육제도와 관리등용제도의 개혁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 정립
        • 2. 근대 교육의 발전
          • 1) 근대 교육의 이념
            • (1) 실용주의 교육 지향
            • (2) 자강주의 교육
              • 가. 국가자강주의
              • 나. 국민자강주의
              • 다. 민족자강주의
          • 2) 근대 학교의 설립
            • 가. 정부의 근대학교 설립
            • 나. 전·현직관료 및 황제 측근세력들의 사립학교 설립
            • 다. 개항장 상인 및 유지 신사들의 사립학교 설립
            • 라. 요호·부민·유생 층의 학교 설립
            • 마.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
            • 바. 구국계몽단체·학회 및 관련인사들의 학교 설립
            • 사. 불교와 천도교 종단의 사립학교 설립
          • 3) 근대 학교의 교육내용
        • 3. 근대 교육의 확대
          • 1) 통감부의 교육 침략
            • (1) 우민화교육 방침
            • (2) 동화정책의 방법으로서의 보통학교 확장
            • (3) 일본어 보급
            • (4) 교과를 통한 친일교육
            • (5) 일본인 교원배치
          • 2) 민족사학의 발전과 설립 이념
            • (1) 민족사학의 발전
              • 가. 사인 중심의 사학발전
              • 나. 학회중심의 사학 발전
            • (2) 민족사학의 설립이념
          • 3) 여자 교육의 발전
            • (1) 미션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2) 관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3) 민간인 사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4) 고등교육의 성립
            • (1) 민립대학의 설치운동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 가. 민립대학의 설치운동
              • 나. 식민지 통제를 위한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 (2) 기독교계 전문학교의 대학승격운동
              • 가. 이화학당의 연합기독교여자대학안
              • 나. 연희전문학교 중심의 종합대학안
          • 5) 교육내용의 추이
            • (1) 애국교과와 훈화를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2) 창가와 체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1) 근대 교육의 성격
            • (1) 근대 교육의 성격
            • (2) 근대 민족 교육의 확대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1) 사립학교의 설립
            • (2) 설학취지문의 검토
            • (3) 간도지역의 민족교육운동
            • (4) 역사교육의 확대
            • (5) 체육교육의 보급과 운동회의 개최
            • (6) 애국가와 독립가의 보급
        • 5.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
          • 1) 근대 교육 성립기의 교과서
          • 2) 근대 교육의 발전과 교과서
            • (1) 근대학교의 교육내용<교과목>
            • (2) 정부의 교과서 편찬
            • (3) 민간인에 의한 교과서 편찬과 실태
            • (4) 교과서의 내용
          • 3) 통감부하의 교과서
            • (1) 일제의 교육침략정책
            • (2) 학제의 개편
            • (3) 통감부의 교과서 통제
              • 가. 통감부의 교과서 편찬 방향
              • 나. 교과서사용규정의 제정
              • 다. 교과용도서검정의 실시
              • 라. 교과서검정의 성격과 교과서검정의 실태
            • (4) 구국교육운동과 민간의 교과서 편찬
            • (5) 교과서의 실태
            • (6) 교과서 사용 실태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1) 서양 근대 학문의 세 수용통로
          • 2) 서양철학의 수용
          • 3) 사회진화론의 수용
          • 4) 사회과학의 수용
          • 5) 서양 인문사회과학 수용의 특징과 문제점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1) 두 문체의 대립
            • (2) 국한문체
            • (3) 국문체
          • 2) 초기의 국문 연구
            • (1) 지석영의<국문론>과<신정국문>
            • (2) 리(이)봉운의≪국문졍리≫(국문정리)
            • (3) 주시경의<국문론>과 그 뒤의 연구
            • (4) 이능화의<국문일정의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1) 국문연구소에 관한 자료
            • (2) 개설의 동기와 목적
            • (3) 직원과 운영
            • (4) 사업의 경과
            • (5)<국문연구 의정안>
            • (6) 각 위원의 연구안
          • 4) 문법의 연구
            • (1) 서양인의 연구
            • (2) 유길준의≪대한문전≫
            • (3) 주시경의≪국어문법≫
            • (4) 어윤적의 연구
            • (5) 김희상의≪초등국어어전≫
          • 5) 주시경의 국어 연구
        • 3. 한국사 연구
          • 1) 연구의 필요성
          • 2) 근대 한국사 인식의 추이
            • (1) 실학시대 후기에서 개항기의 역사학
            • (2)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
          • 3)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1)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1. 근대 문학의 발전
          • 1)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와 문체, 문학장르의 관련
            • (1) 위정척사파
            • (2) 온건보수파
            • (3) 개화자강파
            • (4) 일본체험파
            • (5) 민중계몽파
            • (6) 친기독교 개화파
          • 2) 개화기의 시가 장르
            • (1) 애국·독립가
            • (2) ‘사회등’ 가사를 비롯한 우국가
            • (3) 민요 개작
            • (4) 개화기의 시조와 가사
            • (5) 신체시
          • 3) 개화기의 서사 장르
            • (1) 신소설
              • 가. ‘신소설’이란 명칭과 그 개념
              • 나. 신소설의 정신적 바탕과 소설 미학
              • 다. 신소설의 중요 작가와 작품
            • (2) 역사·전기 소설
            • (3) 토론체 소설
        • 2. 근대 예술의 발전
          • 1) 음악
            • (1) 한국음악사회 구성
            • (2) 근대음악사의 전개
              • 가. 제1기
              • 나. 제2기
              • 다. 제3기
              • 라. 제4기
            • (3) 새로운 과제
          • 2) 미술
          • 3) 연극과 영화
          • 4) 무용
            • (1) 무도의 등장
            • (2) 권번춤의 무대화와 가무극의 번성
          • 5) 체육
            • (1) 학교체육의 전개양상
              • 가. 제1기:근대체육의 태동기(1876∼1884)
              • 나. 제2기:근대체육의 수용기(1885∼1904)
              • 다. 제3기:근대체육의 정립기(1905∼1910)
            • (2) 근대 스포츠의 소개
              • 가. 육상경기
              • 나. 축구
              • 다. 야구
              • 라. 농구
              • 마. 테니스
              • 바. 수영
              • 사. 빙상
              • 아. 사이클
              • 자. 골프
            • (3) 체육단체 결성
              • 가. 대한체육구락부
              • 나. 황성기독청년회 운동부
              • 다. 대한국민체육회
              • 라. 대동체육구락부
              • 마. 대한흥학회 운동부
              • 바. 소년광창체육회
              • 사. 체조연구회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2. 한국어 연구

1) 언문일치의 첫걸음

(1) 두 문체의 대립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는 우리 나라의 새로운 학문이 싹튼 시기였는데, 어느 다른 분야보다도 한국어 연구의 싹이 먼저 텄음을 볼 수 있다. 그 때의 연구는 한글과 문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文字문제는 19세기의 90년대에 들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 이유는 그 때까지 우리 나라에는, 개화기 학자들의 말을 빌면, ‘文二致’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면서 글로는 漢文을 쓰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을 해 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개화와 더불어 갑자기 커진 문자의 사회적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言文一致의 이상을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긴급한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한 것이다. 문자개혁의 첫 신호탄은 1894년 11월 21일에 공포된≪公文式≫에 관한 勅令(14조)이었다.

法律과 勅令은 모두 國文을 기본으로 삼되, 漢文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國漢文을 섞어 쓴다(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漢文과 國漢文을 들어 어정쩡한 것이 되기는 했지만, 국문(한글)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선언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 12일에 고종이 종묘에 誓告한 글(≪獨立誓告文≫)이≪官報≫에 국문, 한문, 국한문의 세 가지로 실려 있음은 위의 칙령을 따른 것인데, 국문을 맨 앞에 싣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위에 든 국문, 한문, 국한문 중에서 ‘언문이치’의 장본인인 한문은 뒤로 물러날 운명에 처해 있었고 국문과 국한문이 앞으로 누가 새 시대를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느 것을 택하거나 한글의 체계와 맞춤법을 정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1907년에 國文硏究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글체계와 맞춤법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국어의 音韻에 관한 연구를 이끌어 내었다. 가령 ‘ㆍ’자를 그냥 쓸까 없앨까 하는 문제라든가, 받침으로 새로운 글자(ㅈㅊㅋㅌㅍㅎ 등)를 더 쓰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의 해결은 국어의 음운체계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文法은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학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영어 문법을 통해서 이 학문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고 다른 편으로는 일본에서 새로 만든 일본어 문법을 통해서 한국어 문법에 대한 생각이 움트게 되었다. 한국어 문법 연구는 19세기의 마지막 10년간에 시작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야 책으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개화기 이전의 우리 나라에서 언문일치에 가장 가까운 문체를 지적하라면 아마도 대개는 諺文體라고 대답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고전소설과 편지 등 일상생활에 사용되어 일반 서민 사이에 제법 광범한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언문일치의 실현을 가장 강렬하게 추구한 개화기에 있어서 언문체 즉 國文體가 응당 대표적인 문체로 됨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 매우 미약한 존재였던 國漢文體가 크게 대두하여 국문체와 대립하였고, 마침내 이것이 도리어 대표적인 문체가 되었다.

 국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채택되지 못한 원인은 이것이 종래 문자생활의 하층부를 담당해 온 까닭에 갑자기 한문이 맡았던 상층부까지를 감당하기 어려운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한문체는 한문에 가까웠으므로 이런 결점이 없었다. 사실상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국한문체는 한문에 토를 단 정도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언문일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나, 점차 한문투가 적어져서 한자는 국어 속에 굳어진 漢字語의 표기에만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개화기에 있어서의 문체의 대립에는 매우 심각한 일면이 있었다. 가령 1883년에 나온≪漢城旬報≫는 순전히 한문을 사용했음에 대하여 1886년에 나온≪漢城周報≫가 한문·국한문·국문의 세 문체를 아울러 사용했음은 그 초기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뒤 이 두 문체는 상당한 각축을 벌였다. 신문에서는 일시 국문체가 우세했으나 점차 국한문체가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국문체도 점차 그 기반을 굳히고 넓혀 갔다.

 개화기에 있어서 문체의 단일화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