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근대 과학기술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실학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의 일부 식자들 사이에는 서양 근대과학에 대한 동경심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동경이 널리 사회에 퍼져 큰 힘으로 작용하지는 못하는 가운데 조선왕조는 1876년의 개국과 그 후의 개화기를 맞았다. 실학자들에 의한 開眼과 그 후 기독교 때문에 비롯된 지배계층의 위기의식과 위축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당연히 아직 서양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들이겠다는 의식은 자라지 못한 채 나라의 문이 열린 것이다.
집권 초기에 얼마 동안 대원군 李昰應은 서양기술에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는 서양 배를 건조하고 서양식 무기를 만들거나 또는 서양무기를 이겨 보려는 신무기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388) 마치 대원군시대 집권자의 의지가 아직 뚜렷하게 근대과학에 대하여 손들어 환영하지 못한 것처럼, 당시 지식층은 아직 일부 실학자들의 저서 속에 흐르는 서양과학의 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1860년대 중반까지도 책을 쓰고 있었던 崔漢綺(1803∼1877)의 여러 글 가운데에는 이미 서양과학의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널리 당시 사회에 퍼졌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개국 이후 서양과학의 내용은 다시 1880년대에 들어가서야 제대로 사회지도층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특히 1881년 중국 天津에 파견된 조선 역사상 최초의 기술유학생 38명은 領選使行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록 짧은 반 년 정도밖에 유학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가장 초기에 근대 과학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이었다. 같은 해에 일본에 파견된 紳士遊覽團은 62명의 고급관리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체계적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급속히 발전해 가는 일본의 근대문명을 구경하면서 근대과학과 기술의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지속된 일이 아니었고, 이 두 번만으로 조선에 근대과학의 싹이 트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보다 대중적인 근대과학의 수용은 다른 방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담당한 대표적인 경우로는 새로 시작된 대중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漢城旬報≫와≪漢城周報≫의 발행을 들 수 있다. 물론 1880년대를 특징지어 주는 이 신문들은 당시 중국에 나오고 있던 신문·잡지를 대체로 그대로 옮겨 싣고 있었다. 뒤에는 일본의 신문·잡지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지만, 아직 중국어를 읽기는 쉬워도 일본어를 읽는 조선 지식인은 적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근대식 초등 내지 중등 정도의 근대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육의 확대가 과학을 알리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1883년 최초의 근대식 학교라는 元山學舍, 그리고 同文學이 시작되었고, 배재학당(85), 이화학당(86)이 등장했다. 1910년까지 문을 연 사립학교 숫자는 약 3,0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서 정말로 내실 있는 근대과학 교육이 시행되었다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또 학교의 규모와 짜임새로 보아 아직 근대과학을 충실하게 교육할 수 있는 준비는 절대 부족이었다. 우선 근대과학을 교육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절대 부족했다. 育英公院에는 미국의 대학을 갖 졸업한 선교사겸 교사 3명이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들이 영어로 가르치는 내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지도 의문이고, 또 그 교육과정 가운데 들어 있는 과학분야가 실제로 많이 가르쳐지기는 어려웠을 것도 확실하다. 1880년대의 여러 학교에서≪한성순보≫에 많이 실린 과학기사를 읽는 정도로 과학학습을 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런 학습으로는 과학의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근대과학의 수용은 1890년대로 들어가서야 상당히 체계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특히 1894년의 갑오개혁을 전후해서는 학교교육도 더 충실해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에 일본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교사로서 또는 글의 집필을 통하여 근대과학과 근대문명을 계몽하기 시작했던 때문이다. 일본에 유학하는 조선 청년은 1870년대에 이미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1880년대까지도 그런 유학은 아주 적은 숫자가 개인적으로 거의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884년의 갑신정변에 여러 명의 재일유학생이 귀국해 참가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894년 이전에 이미 적지 않은 유학생이 일본을 다녀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력 때문에 갑오개혁 때에는 사범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초·중등 학교가 문을 열 수 있었고, 특히 기술관련의 학교들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기예학교(1895)·경성의학교(1899)·상공학교(1899)·광무학교(1900) 등이 그것이며 같은 시기에 위생국·전신국·철도국·광산국·기기국 그리고 공업전습소(1902) 같은 정부기관도 등장하여 이들의 활동 영역이 넓혀지기 시작했던 셈이다. 1894년의 갑오개혁이 내세운<洪範 14條>가 젊은이들의 외국유학을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런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그 이듬해 1895년에 당장 182명의 유학생이 일본 慶應義塾에 파견되었는데, 개화기의 최대 규모의 유학이다. 이 교섭은 당시 학부대신 李完用과 경응의숙 社頭 후쿠자와(福澤諭吉) 사이에 맺은 계약에 따른 것인데, 그 후에도 해마다 300명 정도의 유학생을 파견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이 계약대로 유학생이 파견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당시의 인력 수요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유학생은 일본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과학을 배워오기 마련이었다. 일본에 간 청소년들은 대체로 초등교육 정도에 머물렀거나, 또는 기술교육을 받고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나마 이들이 주역이 되어 대한제국시기의 학교교육에서 근대 과학교육이 초보적이나마 실시될 수 있었고, 이들이 또한 근대과학의 교재와 신문·잡지의 글을 통해 근대과학 수용에 중요한 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