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가.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발매반포투쟁
              • 나. 함북 종성 사립 온천학교 애국창가 교수활동
              • 다. 함남 이원 사숙 일신재의 민족의식 고취활동
              • 라. 함남 영흥 사립 문명학교 애국창가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가. 한민교육회·간민교육회-사우계
              • 나. 간민회-공교회·농무계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가. 경학사
              • 나. 부민단
              • 다. 신흥학우단·백서농장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가. ‘한일합병’ 반대운동
              • 나. 권업회
              • 다. 국민회
              • 라. 제1차 세계대전과 한인민족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가. 2월혁명과 고려족중앙총회
              • 나. 10월혁명과 한족중앙총회
              • 다. 한인사회당
              • 라. 전로한족중앙총회
              • 마. 시베리아 내전과 민족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가. 독립운동의 환경과 상해
              • 나. 한인사회의 형성과 생활상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가. 동제사의 결성과 조직기반의 마련
              • 나. 민족교육기관의 설립과 인재양성 활동
              • 다. 신한혁명당과 입헌군주론의 제기
              • 라. 대동단결선언과 임시정부수립 지향
              • 마. 신한청년당과 공화주의 노선의 정립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가. 하와이지역
              • 나. 미 본토 지역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가. 한인소년병학교
              • 나. 멕시코의 숭무학교
              • 다. 국민회의 군인양성운동
              • 라.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가. 1910년대의 상태
              • 나. 1920년대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가. 일반 단체의 결성
              • 나. 유학생 단체
            • (3) 2·8운동
              • 가. 2·8운동
              • 나.<2·8독립선언서>의 함의
              • 다. 2·8운동 이후의 재일조선인 민족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가. 1920년대 초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 나. 1920년대 후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가. 서울의 시위운동
              • 나. 시위의 전국확산
              • 다. 중부지방
              • 라. 남부지방
              • 마. 북부지방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가. 연길현
              • 나. 화룡현
              • 다. 왕청현
              • 라. 훈춘현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가. 유하현
              • 나. 통화현
              • 다. 환인현
              • 라. 관전현
              • 마. 장백현
              • 바. 흥경현
              • 사. 안도현
              • 아. 임강현
              • 자. 집안현
              • 차. 안동현
              • 카. 기타지역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가. 블라디보스톡
              • 나. 니콜리스크
              • 다. 라즈돌노예
              • 라. 녹도
              • 마. 스파크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가. 국내진공작전
              • 나. 노인동맹단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가. 자주독립의 민족정신
              • 나. 새로운 세계관의 제창
              • 다. 근대적 국민의 탄생
              • 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 마. 독립운동의 비약적 강화
              • 바. 민족공동체의 지향
              • 사. 무단지배체제의 후퇴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일제는 러일전쟁을 틈타 한국의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한 바 있다. 이것은 전 국토의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광대한 면적이었다. 그러나 개간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려던 일제의 기도는 보안회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열렬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090) 그 후 일제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하자, 1908년 12월 마침내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으로 약칭)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토지 수탈에 나섰다.

 일본정부는 1907년 “한·일의 정치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책으로는 拓地殖民을 제외하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라는 뜻의 동척 설립안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한국 농업의 개량·진보를 촉진하고 한국의 토지를 개척함으로써 그 富源으로 한·일 양국의 화친을 두터이 하고, 양 국민간의 경제적 관계를 발달시키기 위해 당장 필요한 조치임을 인정한다”라는 취지서와 함께<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제24회 제국의회에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같은 해 8월 東京에서 열린 동척 설립위원회 총회는 회사의 定款을 결정하고, 설립위원(한국인 23명, 일본인 82명)을 임명하였다. 동척의 처음 자본금은 1천만 원(납입자본 250만 원)이었다. 한국정부도 대주주로 참가하여 토지(역둔토 5,700정보, 당시의 평가액 300만 원)를 출자했다. 일본정부는 동척에 대한 보조금으로 매년 30만 원을 8년간 지출하고, 정부의 원리보증 아래 社債 2천만 원을 발행하였다. 동척의 총재로는 현역 육군중장 宇佐川一正를 임명하고, 부총재 2명, 이사 4명을 두었다. 한국인으로는 민영기(부총재)·한상용(이사)이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이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091)

 동척의 설립목적은 ‘한국에서의 척식사업의 경영’이었다. 동척의 업무는 농업은 물론이고, 척식을 위해 필요한 토지의 매매와 貸借, 토지의 경영과 관리, 건축물의 축조와 대차, 한·일 이주민의 모집과 분배, 이주민과 한국 농업자에 대한 물품의 공급과 그 생산 및 획득물품의 분배, 자금의 공급 등이었고, 부대사업으로는 수산업, 기타 척식을 위해 필요한 사업의 경영 등이었다.092)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한국’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수탈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한 修辭에 불과했다.

 일제가 동척을 설립하면서 내세운 명목상의 목적은 “內鮮人 교류의 역사는 유래가 극히 오래된 것이지만 명치 37·38년(1904·5) 전승의 결과 및 명치 39년(1906, 사실은 1907)<한일신협약>의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을 지도·인도해야 할 중책을 맡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먼저 한국의 부강을 꾀하고 일반 민생이 문화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가장 유효 적절한 방법으로 한국의 산업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093) 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을 지도·인도한다거나, 한국의 부강을 꾀한다는 것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여 경제적 富源을 지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동척이 한국을 이롭게 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오히려 동척이 한국의 토지를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094) 한국의 흉흉한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낀 동척의 사원은 모두 제복에 권총을 차고 경영활동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095)

 동척의 토지는 한국정부가 출자한 토지와 동척이 매수한 토지로 구성되었다. 한국정부의 출자지는 전술한 것처럼 역둔토 전답 5,700정보였다. 이것은 역둔토·궁장토 10만 정보 중에서 사업경영상 가장 유리하고 우량하다고 하여 선정된 토지였다. 동척은 1913년까지 이미 소유하고 있던 역둔토에 근접한 민간인 소유 토지를 대량으로 매수했다. 매수지는 1913년 현재 47,000여 정보(1,076만여 원)였다. 일제는 매수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예를 들면 전라남도 영산포 부근의 宮三面에서는 사실상 민유였던 토지를 동척이 慶善宮이라는 宮家로부터 매수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동척이 목포라는 개항장을 배후지로 가지고 있는 영산강 주변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수한 것은 일본인 이민을 유치하기 위함이었다. 동척은 1913년 이후에도 매수를 계속하여 1919년 현재 소유한 토지는 78,520정보나 되었다.096)

 동척의 사업의 하나는 출자지와 수매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지주경영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 의회는 매년 1만 명 이상을 농업이민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일제는 1910년<이주민취급규칙>을 정한 이래 매년 농업이민을 모집하였다. 1910∼20년 동안 모집호수 10,995호, 응모호수 19,483호, 승인호수 8,508호, 정착호수 약 3,500호였다. 이주민은 처음 갑종(자작), 을종(소작)으로 구분되었는데, 1914년 이후로는 자작(2정보)을 목표로 하는 제1종과 소지주(10정보)를 목표로 하는 제2종으로 나누어졌다(1921년 이후는 제2종만으로 모집했다). 동척은 이들이 지주로서 성장하도록 자금이나 이주비 등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다른 보호와 원조를 많이 베풀었다.097)

 동척은 또 자금의 융자를 비롯하여 수리·토목·산림 등을 경영하였다. 일제는 1917년 동척의<회사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의 척식사업’이라는 항목을 ‘조선 및 외국에서의 척식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의 경영’으로 바꾸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제 영업활동의 범위가 중국을 비롯한 필리핀·남양제도·말레이반도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사업의 제1목표가 농업에서 금융으로 바뀌어, ‘척식은행’의 형태로 자금을 공급하는 데 주력하였다. 1919년 현재 동척은 7천만 원의 대부금을 보유하였다. 같은 해 동척의 자본금은 5천만 원으로 증자되었다.098)

 동척의 수익은 대부금 이자, 유가증권 수입, 농지·산림의 수입 등 세 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토지를 저당잡고 대금업을 하거나, 저당에 잡힌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 주요 이익원이었다. 동척은 일반은행과 같이 예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농민이 돈을 빌릴 때는 토지를 저당으로 잡혀야 했다. 당시 한국에서 저당을 잡힐 만한 물건으로는 토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지를 저당잡히고 돈을 빌린 한국농민은 이 돈을 상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저당 잡힌 토지는 대개 동척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척은 이러한 수법으로 토지를 집적했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농민의 원한도 쌓여갔다.099)

 동척이 세운 이주식민계획은 실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대륙침략정책의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그 이유로서는 동척이 한국내에서 최대 지주이자 금융기관으로서 한국의 농촌과 농민을 지배하고 있었던 점, 1917년 이후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여 奉天·大連에 지점을 설치하고 만주와 몽고 방면으로 진출한 점을 들 수 있다.100)

090) 윤병석,<일본인의 황무지개척 요구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
091) 朴慶植, 앞의 책, 75쪽.
092) 東洋拓植株式會社,≪東拓十年史≫(1918), 8쪽.

<東洋拓植株式會社法>(≪日本外交文書≫41-2, 1908), 297∼301쪽.
093)≪農務要覽≫(東拓).
094) 靑木香代子,<東洋拓殖株式會社の設立>(≪朝鮮近代史料硏究集成≫3), 121∼122쪽.
095) 靑木香代子, 위의 글, 123쪽.
096) 이규수,<전남 나주군 ‘궁삼면’의 토지소유관계의 변동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집적>(≪한국독립운동사연구≫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097) 君島和彦,<朝鮮における東拓移民の展開過程>(≪日本史硏究≫161, 1976).
098) 朴慶植, 앞의 책, 78쪽.
099) 水田直昌·土屋喬雄 編述,≪財政·金融政策から見た朝鮮統治とその終局≫(1962), 51쪽.
100) 靑柳綱太郞,≪總督政治史論≫(1928), 194∼211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