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철도를 비롯한 교통·운수를 아주 중요시했다. 일제가 러시아와 대항하면서 한국을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독점하기 위해서는 상품과 병력을 단시간에 대량으로 수송하고, 연선에 정치력을 확산시킬 수 있는 철도의 장악이 무엇보다도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청일·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서의 철도부설권을 장악하고, 우여곡절 끝에 1899년 경인선(서울-인천), 1905년 경부선(서울-부산),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 1905년 삼마선(삼랑진-마산), 1910년 평남선(평양-진남포)을 개통시켰다. 이 중에서 경인선과 경부선은 민간인 자본이 대거 투입된 半官半民의 철도였고, 경의선과 삼마선은 군대가 직접 부설한 군용철도였다. 일제는 철도의 소관이 이렇게 분립되어 있으면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1906년 7월 이 철도들을 모두 국유화하여 한국통감부 철도관리국의 소관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강점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 1,000㎞가 넘는 장대한 철도망을 소유하게 되었다.176)
일제는 한국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에 철도국을 설치하고 기존 철도를 개량함과 동시에 새로운 철도망을 급속히 확장해나갔다. 예를 들면, 호남선(대전-목포)은 1914년 1월, 경원선(서울-원산)은 1914년 8월, 함경선(청진-회령)은 1917년 11월, 평양탄광선은 1918년 5월, 박천선은 1919년 11월에 각각 개통되었다. 일제가 철도망을 이렇게 확장한 목적은 한국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발표한<포고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조선의 地勢를 두루 보건대 남쪽 땅은 비옥하여 農桑에 적합하며, 북쪽 땅은 대개 광물이 풍부하고, 내륙의 하천과 외부의 바다는 또한 어종이 많으니, 이익과 혜택을 남기는 수확물이 적지 않은지라, 그 개발의 방법이 적합하면 산업의 진작을 기대할지어다. 그런데 산업의 발달은 오로지 운수기관의 완성을 기다려야 할지니, 이는 산업을 일으킬 계제가 될지어다. 이번에 통로를 13도 각지에 열며 철도를 京城·元山 및 삼남지방에 신설하여 점차 전 국토에 미치게 함에 이와 같이하여 큰 성공을 장래에 기하고 모두 開鑿敷設의 공사로서 민중에게 생업을 부여하면 궁핍을 구제하는 一助가 됨은 의심할 것이 없는 바이라(≪純宗實錄≫, 순조 13년 8월 29일).
일제는 철도망을 확장하여 한국의 농업은 물론 광업이나 수산업까지도 장악하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도연장은 1915년에 1,600㎞를 돌파하고, 1919년에는 1,856㎞에 달하였다. 이제 한반도의 사방 끝까지 철도망이 연결되어 일제 식민통치의 위력이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되었다. 흔히 5대 간선이라고 불렸던 경부선(경인선·삼마선)·경의선·호남선·경원선·함경선은 새롭게 확충된 진남포·인천·군산·목포·마산·부산·원산·청진 등의 항구를 통하여 일본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신의주·회령 등의 국경 종단역을 거쳐 만주철도와 접속하게 되었다. 한국철도를 매개로 일본∼한국∼만주의 연락이 그만큼 원활하게 된 것이다.177)
또한 일제는 세력을 만주 등으로 확대하기 위해 경의선과 남만주철도와의 연결을 꾀하였다. 일제는 1909년 8월 압록강 가교의 부설에 착수하여 1911년 10월 이를 완공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철도 특히 경부선·경의선은 남만주철도의 안봉선과 동일궤간으로 연결되어 대륙침략의 동맥이 되었다. 일제가 한반도의 철도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 하는 점은 철도의 폭, 즉 궤간이 일본 국내의 협궤보다도 우수한 표준궤를 택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제는 한반도 종관철도를 대륙침략의 간선으로서 육성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동일한 표준궤를 택해야만 한다고 일찍부터 고려하고 있었다.178)
일제는 한국철도와 만주철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1917년부터 1925년까지 한국철도를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도록 위탁하였다. 당시 조선총독 테라우치는 열렬한 대륙 확장론자였다. 그는 국방상·정치상의 관점에서 한반도와 만주는 통합하여 지배하는 것이 낫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 槓杆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한국철도였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반대를 무릅쓰고 테라우치 총독은 한국철도와 만주철도를 통합시켰던 것이다.179)
일제는 철도뿐 아니라 도로·해운도 함께 정비하기 시작하여 침략과 지배의 중요 수단으로 삼았다. 일제가 도로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군사적 측면을 철저하게 고려하고 있었음은 다음의 회고담에서 잘 알 수 있다.
기타 寺內씨의 훌륭한 점은 많이 있지만, 지금 마음 깊이 느껴고 있는 것은 寺內씨가 군인이기도 해서인지, 그때부터 이미 군사를 움직이는 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의 기발함으로서, 도로의 폭은 포병의 제일 큰 砲車가 충분히 서로 비켜갈 정도의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교량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최대의 포차가 서로 비켜가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폭을 갖춘다, 또 포차의 통과를 감당할 만한 강도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늘 시끄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엔 전차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기 때문에, 중량물로서는 포병의 가장 큰 포가 목표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목표로 하여 모든 도로 설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하고 계셨습니다(林茂樹,<溫故知新>,≪朝鮮の回顧≫, 近澤書店, 1945, 70쪽).
일제는 통감부 시절(1907∼10년) 이미 1,993㎞의 간선도로를 개수했다. 그리고 한국강점 이후에는 수많은 한국인을 동원하여 도로를 더욱 확장시켰다. 일제는 1911년 4월에<도로규칙>(府令)을 발포하여, 도로를 1·2·3등 및 等外로 나누고, 총독부와 지방 행정청으로 하여금 등급별로 도로의 축조·유지·수선을 책임지도록 했다. 연선 부락의 한국인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제가 이렇게 도로의 건설과 관리에 신경을 쓴 것은 한국민중의 반일 의병투쟁을 진압하고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배를 방방곡곡까지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일제는 봄·가을에 도로 수선공사를 명목으로 호별세의 등급에 따라 매호당 수명씩 부역노동을 부과했다. 빈자는 노동으로, 부자는 금전으로 부역에 응했다. 부역에 동원된 가난한 한국인은 때로는 점심도 거르며 몇 리나 되는 먼 길을 걷거나 노숙하면서 지정된 날짜까지 공사를 완성해야만 했다. 부역을 기피했을 경우에는 헌병경찰이 笞刑을 가하였다. 이렇게 가혹한 부역을 통해 일제는 1910년대에 방대한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제1기 치도사업(1911∼16년, 1천만 원 투입)에서 34선 2,690㎞, 제2기 치도사업(1917∼22년, 3천만 원 투입)에서 26선 2,308㎞의 도로가 개수되었다. 치도사업을 통해 한국인 소유의 상당한 소유지가<토지수용령>에 의해 몰수되었다.180)
일제는 육상교통뿐만 아니라 해운·수운에서도 지배를 강화했다. 해상·하천항로 및 항만시설의 정비·강화가 그것이었다. 한국강점 이후 일제는 한국의 해운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배하려고 기도하였다. 즉, “유사시에는 명령 하나로 선박의 징발, 또는 매수에 응하게끔 하여, 군대·병기의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할 필요”181)에서, 몇 개의 선박회사를 통폐합하여, 1912년 1월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 회사에 대해 연안항로를 통일적으로 운행하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내륙 하천항로는 이에 대한 보조명령항로로 규정했다.
일제는 한국강점을 전후하여 부산·인천·진남포·평양·원산·신의주·군산·목포·청진·성진·마산 등 11군데의 항만을 수축하고 세관설비를 개수했다. 이 사업은 더 확장되어 1911년부터 9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특히 원산항은 1915년부터 150만 원의 예산과 5년간의 사업으로 다시 축조되었다.
일제는 1905년 4월 한국에<한국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을 강요하고, 다음 해<통감부통신관서관제>를 공포하여 한국의 통신망을 장악하였다. 한국강점 이후 일제의 통신망은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일제에 의해 정비된 도로·항로·항만·통신시설은 철도망과 연결되어 정치·군사·경제의 식민지적 지배를 관철시키는 데 크나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철도·해운·강운·운수·통신사업이 억압당하였지만, 이를 통해 근대문명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경제적 향상을 위해 분투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