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보편적 식민지 지배원리는 ‘최소의 비용에 의한 최대의 수탈’이다. 이러한 보편적 식민주의에 입각하여 서구 열강은 ‘개척’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비백인·비유럽 지역 각처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여 갔다. 그리고서 필요에 따라 간접통치 혹은 직접통치를 통하여 ‘자기목적’을 충족시킨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을 통하여 천황제 통일국가를 수립하자 그 순간부터 주변지역에 대한 침략을 자행하여 이민족이 살고 있던 북쪽의 蝦夷地(현재의 북해도)와 남쪽의 琉球王國(현재의 오키나와현)을 병합하여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서 침략의 방향을 조선으로 돌려 정한론(1873년) 이후 줄곧 침략적 행위를 자행하여 오다가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을 치르고서 1910년 조선을 불법적으로 강점하였다. 40여 년만에 조선침략의 ‘숙원’이 달성된 것이다.
근대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자행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백인의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황인종의 아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는가 하면,185)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독립과 부강을 위한 대륙국가화”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를 주도한 것은 특히 군벌세력과 대륙팽창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 침략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갔고 근대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어 갔다. 군국주의란 다름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군사최고주의이고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패권주의를 뜻한다.
해군 군벌이 남진론에 서서 남방진출을 도모하는 데 반해, 조선을 출발점으로 하여 대륙침략을 주장하고 주도한 것은 육군 군벌 특히 죠슈(長州)閥이었다.186) 이들에게 조선은 지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 침략의 기지로 자리 매겨졌다. 이것은 조선지배 이데올로기와 지배정책 및 지배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천황의 조서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지배할 것을 천명하는가 하면,187) 강제적으로 체결한 병합조약에서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 양여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서는 一視同仁·內地延長主義·內鮮融和·內鮮一體化·皇國臣民化 등을 표방하면서188) 조선을 통치하여갔다. 이것은 곧 ‘조선인의 일본인화’, ‘조선의 일본화’를 통하여 북해도나 오키나와처럼 일본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켜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일제의 식민주의는 조선민족 말살을 통한 영토확장주의189)라고 할 수가 있다.
민족말살주의에 의한 제 정책은 전통적 ‘조선’의 파괴와 해체를 통한 일본에의 편입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시혜적인 ‘무차별의 경지’도 아니었고 문명화·근대화를 뜻하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이 민족말살의 본질은 ‘조선’의 斷裂化를 통한 천황제 국가체제에의 노예적 편입 바로 그것이다.
단열이란, 통일·통합과 대비되면서 分裂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분열이 ‘집단적으로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고 하면, 이는 파쇄화하여 해체되는 것을 표상한다. 때문에 사회구조 전체를 논할 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구조가 통합성과 정합성을 상실하여 단층화되는 현상을 뜻하며, 정치사적인 분석개념으로 사용될 때는 분할지배(divide and rule)에서 더 나아가 斷轄지배 즉 이온화하여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뜻한다. 식민지 사회를 포함한 종속사회의 필연적 사회현상인 이중구조화를 비롯하여 정치적·사회적 분열현상, 문화적 정체성의 파괴, 경제 각 부분간의 비접합성과 경제적 제 공간의 식민지 본국에의 직접적 편입, 비자립적인 이온적 개체의 양산 등은 모두 단열사회의 현상이다.190)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은 조선사회를 철저히 단열화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전통사회가 근대적이든 봉건적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민족공동체로서 갖는 통일성과 통합성 그리고 정체성을 모든 분야에서 해체시켜야만 하였다.
일제의 단열을 통한 민족말살은 오랫동안 민족공동체로서 독립된 역사를 영위하여 왔던 조선민족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적 저항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여 물리적인 강권통치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였다.
일제의 조선지배의 권력, 통치기구 및 정책은 이 민족말살주의가 관철되는 범위내에서 내외의 현실적 조건에 규정되면서 결정된다. 그러면 일제의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어떻게 관철되어 갔고 지배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다음과 같이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191)
185) | 竹內好 編集,≪アジア主義≫(筑摩書房, 1963). 강창일,<근대 일본의 사상흐름과 조선침략론>(역사학연구소 엮음,≪오늘에 본 친일문제와 일본의 조선침략론≫, 거름,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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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 죠슈벌의 수령으로서 근대 일본의 대륙침략을 선도하여 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총리대신으로 재직하던 1890년에 이미 시정방침 연설에서, 일본의 독립과 자위를 위해서는 ‘이익선’인 조선을 보호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山縣有朋,<외교정략론>, 大山梓 편,≪山縣有朋意見書≫, 原書房, 1966, 196∼201쪽;山縣有朋<施政方針演說>, 1890년 12월 6일, 같은 책, 201∼204쪽;山縣有朋,<帝國の國是に就ての演說>, 1891년 2월 16일, 같은 책, 204∼207쪽). |
187) | <倂合ノ詔書>(1910. 8. 29)·<韓國倂合ニ關スル條約>(1910. 8. 29) 第1條. |
188) | 이상의 슬로건은 ‘동화주의’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일제는 이를 ‘시혜적인 무차별주의’라고 선전하였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天皇은 ‘-視同仁’을 선전하였고(<官制改革ノ詔書>), 수상 原敬는 ‘內地延長主義’(原敬,<朝鮮統治私見>)를 천명하였다. ’內鮮融和’는 宇垣一成 총독(1931∼1936) 때에, ‘內鮮一體化’와 ‘皇國臣民化’는 南次郎 총독(1936∼1942)에 의해, 특히 주창되었다. |
189) | 민족말살의 용어는 단지 생물학적인 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공동체, 혈연공동체, 언어·문화 공동체, 역사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부정하여 이를 해체·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뜻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민족문화 및 민족성의 말살에서부터 민족차별·노예화·추방·아파르트헤이트·혼거·혼혈 등의 제 정책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내선일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민족말살주의가 어떠한 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한다. 국민총력 조선연맹,≪(秘) 內鮮-體の具現≫(1941). 조선총독부 경무국장,≪(極秘) 內鮮一體の理念及其實現方策要綱≫(1941). 강창일,<일제의 조선지배정책-식민지 유산문제와 관련하여->(≪역사와 현실≫12, 한국역사연구회, 1994). |
190) | 이 글에서 표상하는 단열의 개념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와 사회 형태를 분석한 알렌 토래누의≪종속사회≫를≪단열사회≫로 번역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다(佐藤幸男 譯,≪斷裂社會≫, 新評論社, 1989;Alain Touraine, Les Societes Dependantes). |
191) | 종래에 이 시기구분은 일반적으로 3·1독립운동과 경제공황·‘만주사변’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서 1910년대 무단통치기, 1920년대 ‘문화통치’기, 1930년대 이후 ‘황민화’정책기 혹은 대륙병참기지화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분법은 ‘만주사변’ 이후 패망 때까지를 ‘15년 전쟁’으로 묶어 한 기간으로 설정하는 일본 근현대사의 시기구분을 그대로 한국사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강창일, 앞의 글, 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