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Ⅴ. 의열투쟁의 전개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1) 경찰기구의 강화
            • (1) 보통경찰제의 확립
            • (2) 신간부의 선정과 보통경찰의 기능
          • 2) 지방제도의 개편
            • (1) 동화정책하의 참정권 문제
            • (2) 지방제도의 개편과 자문기구의 설치
            • (3) 면제의 운영과 촌락정책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1) 친일과 협력이란 개념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 (3) 친일단체의 조직
        • 2. 수탈체제의 강화
          • 1) 총독부 산업정책의 전환
          • 2) 농업―산미증식계획
          • 3) 공업
            • (1) 식민지 공업구조의 형성
            • (2) ‘민족자본’과 조선인 자본
          • 4) 재정·금융
            • (1) 재정
              • 가. 세출
              • 나. 세입
            • (2) 금융
              • 가. 식산은행
              • 나. 일반은행
              • 다. 금융조합
              • 라. 전근대적 금융기관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1)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
            • (1)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 (2)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1) ‘국민대회’와 국내 정부수립운동
              • 가. ‘국민대회’와 한성정부의 선포
              • 나. ‘경성독립단본부’와 신한민국정부
            • (2)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 3) 임시정부의 초기활동
            • (1) 외교·선전활동
            • (2) 국내조직과 활동
              • 가. 연통제의 시행과 운영
              • 나. 임시교통국의 설치와 운영
            • (3) 군사외교와 독립전쟁 준비
              • 가. 군사외교의 강화
              • 나. 독립전쟁 방침과 군사제도의 정비
              • 다. 재만독립군과의 관계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배경과 참가세력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 (3) 제10회 임시의정원
          • 2) 국민대표회의의 전개 과정
            • (1) ‘비공식회의’와 제11회 임시의정원
            • (2) ‘삼방회의’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 (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1) 유일당운동의 배경과 계기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 (2)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 3) 유일당운동의 발전과 임시정부 참여
            • (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의 결성
            • (2) 전위조직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성립
          • 4) 유일당운동의 중단과 임시정부의 여당 결성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 1) 시대적 배경
          • 2) 독립군의 편성
            • (1) 북간도지역
              • 가. 대한군정서
              • 나. 대한국민군
              • 다. 대한군무도독부
              • 라. 대한북로독군부
              • 마. 대한의군부
              • 바. 훈춘한민회
              • 사. 대한광복단
              • 아. 대한신민단
              • 자. 대한의민단
            • (2) 서간도지역
              • 가. 서로군정서
              • 나. 대한독립단
              • 다. 대한독립군비단
              • 라. 광복군총영
          • 3) 국내진입작전의 전개
            • (1) 독립군의 전력강화
            • (2) 국내진입작전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 (1) 삼둔자전투
            • (2) 봉오동승첩
          • 2) 청산리대첩
            • (1) 일본군의 간도 침공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 (3) 독립군의 전투준비
            • (4) 청산리대첩
              • 가. 백운평전투
              • 나. 완루구전투
              • 다. 천수평전투
              • 라. 어랑촌전투
              • 마. 천보산전투
              • 바. 고동하곡 전투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1) 독립군의 북정
          • 2) 경신참변
          • 3) 자유시사변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1) 통군부의 성립과 남만한족통일회의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3부의 성립과 활동
          •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1)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대두
          • 2) 3부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1.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 2.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1) 의열단의 국내외 투쟁
            • (2)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 (4) 개인 단독의거의 흐름과 사례들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 (1) 이봉창의 동경의거
            • (2) 상해거사의 추진과 윤봉길 의거
            • (3) 국내·만주거사 계획의 추진
          • 2)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 3) 한국혁명당총동맹과 남자현의 의열투쟁
          •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 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 5.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1) 3·1운동 직후와 1920년의 의열투쟁

 의열투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될 조짐은 3·1운동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타났다. 국내 비밀결사 및 무장단체, 상해의 독립운동단체, 만주의 독립군조직과 기타 무장단체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상호 연계해서 조직적 의열투쟁의 기반을 닦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西間島 방면으로부터 소규모의 편의대·결사대가 국내로 자주 특파되어, 평안남북도 일원의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군수 또는 면장 이하의 중·하급 관리와 순사, 지방 밀정, 친일부호 등을 타격대상으로 삼았다. 독립군 특공대가 불시에 압록강을 건너 국경 부근의 군경시설과 관공서를 습격하여, 국경 안쪽으로 깊숙히 잠입한 특파 결사대의 암살 파괴활동이 시작되었다.

 3·1운동 이후 의열투쟁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될 만한 사건으로 먼저 27결사대의 국적섬제 거사계획을 꼽을 수 있다. 고종의 장례일을 기하여 ‘을사5적’과 ‘정미7적’(고종이 퇴위토록 강박한 李完用 이하 7대신)을 모두 암살키로 이동녕·이시영·安泰國·李鐸이 결의한 데 따라 서간도에서 구성된 27명의 결사대가 이탁의 인솔로 2월 말에 서울로 잠입했다. 그러나 무기의 서울 도착이 지연되어 국장일인 3월 3일에는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다시 기회를 노리며 군자금 수합과 격문 부착 등의 잠행활동을 벌이고 있던 중에 그 행적이 노출되어 대원 23명이 5월 초에 피체되었다.666)

 이탁이 어렵게 일경의 검거망을 벗어나 서간도로 귀환한 후, 다시 新興學校 學友團 단원들이 국내 암살폭파거사를 계획하여 1919년 9월에 文相直을 정탐요원으로 밀파했고,667) 유하현에서 3월 말에 결성된 大韓獨立團도 10월 경부터 국내지단 설치 등의 지하공작을 수행할 특파원들을 수차 국내로 들여보냈다.668) 9월 중순에 30명의 암살대가 상해로부터 육로로 파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군경당국이 만주 京奉線의 주요 역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차에 심양역에 막 도착한 객차 안에서 폭탄 8개가 순찰 일경에 발견되기도 했다.669)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9월 2일에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65세의 노인지사 姜宇奎가 감행한 폭탄거사에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설립된 老人同盟團의 만주 遼河縣 지부장을 맡고 있던 강우규가 조선총독의 경질소식을 접하고는 신임총독을 제거할 결심으로 밀입국한 뒤, 부임길의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막 올라탄 마차를 향해 영국제 수류탄 한 발을 던진 것이다. 척탄이 빗나가 떨어져서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를 비롯한 총독부 요인과 관리 등 34명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670)

 강우규의 투탄의거는 일제가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식민지 지배의 장기화를 획책함에 대한 준열한 경고였음과 동시에, 3·1운동 이후의 독립투쟁의 방향과 방법에 관한 전범 제시에 의해 비상한 자극과 깨우침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우규의 의거는, 국내 폭탄거사의 효시이기도 했지만, 1920년대 의열투쟁의 실질적인 기폭제였다. 실제로 강우규 의거 이후 국내와 만주, 상해에서 의열지향적 비밀결사와 특종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우선 국내에서는 10월에 韓民會가 결성되었는데, “독립군의 鮮內 진입에 앞서 관공리와 친일 鮮人을 암살하며, 철도·전신·전화 및 관공서 건물과 공장 등을 파괴할 것”을 활동목표의 하나로 적시했고, 그에 걸맞게 암살부와 進滅部도 따로 두었다. 기독교 장로파 신도·면서기·교사 등의 회원으로 구성된 한민회는 1920년 9월에 평남 영원군 온화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이 단서가 되어 조직이 발각되고 회원 전원이 피체되었다.671)

 1919년 늦가을에 대한독립단이 특파한 金琫奎·朴承燁·李元甫도 평남 덕천군과 맹산군 경계에 위치한 仙遊峰의 속칭 ‘범굴’ 속에 국내 거점을 구축하고 영원·덕천·맹산 3군의 유력자들을 포섭하여 1920년 초까지 군별 지단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대한독립단 국내 총지휘소(나중에 ‘虎窟獨立團’으로 통칭됨)는 3개 지단 300여 명의 단원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들은 그 후 1년 여 동안 盡命團·盡忠團·義烈團·血盟團 등의 명칭을 번갈아 써가며 성동격서의 게릴라전법으로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습격·파괴와 무기 탈취, 일경 사살, 공금수송대 습격 후 거금 탈취, 친일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호굴독립단은 경찰의 끈질긴 탐문과 추적으로 1921년 5월에 아지트가 발각되고 단원 90명이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와해되었다.672)

 만주 길림에서는 柳東悅·黃尙奎 등 朝鮮獨立軍政司 간부진의 전략구상과 지도에 의해 1919년 6월경부터 동지 규합과 폭탄제조법 학습 등의 준비작업을 해온 金元鳳 등 열혈청년 13명이 11월 10일에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그와 더불어 창립단원들은 국내 적기관 및 주요 시설물의 폭파와 총독 등 고관 암살을 위한 대형 특공거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에서 입수한 폭탄 13개를 밀송하여 경남 밀양과 진영에 나누어 숨겼고, 거사행동대가 될 단원들이 입국하여 사전 정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이 경부 김태석에게 탐지됨으로써 입국 단원 거의 전원이 1920년 6월 중·하순에 피검되어, 의열단의 첫 투탄의거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검거망 밖에 있던 김원봉 등 다른 단원들은 좌절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거사를 기획하고 추진하여, 그 해 9월에 朴載爀이 부산경찰서 투탄의거를, 12월에는 崔壽鳳이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감행하였다. 두 거사는 각각 서장실 폭파 및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坪) 폭살과 청사 일부 파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외곽에서 여러 단체들이 결성·조직되어 가는 가운데 구국모험단과 성격을 같이 하는 의열투쟁 조직들이 나타났다. 그 중 1920년 1월에 孫貞道·金九 등의 발기로 결성된 義勇團은 “일본 요로의 대관 및 친일 조선인을 살육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함에 의하여 조국독립을 기한다”는 목적 아래 탐정대와 모험대를 설치했으며, 국내 각도에 지단과, 府·郡에 분단을 조직키로 하여 총무 金錫璜을 특파하였다.673)

 3월에 평양으로 잠입한 김석황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망 겸 지원조직의 하나인 평양교통국 책임자 金昌彬과 협의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서울·평양·평안도·황해도 등 여러 곳에 의용단 지단과 분단을 조직하였다. 상해로 돌아간 김석황은 구국모험단이 제조한 폭탄 12개를 각지 지단으로 보내고, 중국 安東에 출장소를 설치하여 상해와 국내간 연락 중계소 겸 거사지휘소로 삼았다.674)

 이처럼 서간도-국내, 상해-국내, 남만주-상해의 2각 연계에 의한 조직적 의열투쟁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것과 보조를 같이 하여 서북지방에서는 1920년 봄에도 의열지향적 무장단체와 비밀결사들이 잇따라 조직되고 저마다 활동을 개시하였다.

 먼저 3월 경에 서간도의 大韓光復軍司令部 제4영장 崔時興이 구한국군 출신 위주로 40여 명을 규합하여 평북 의주군 천마산에서 天摩山隊를 건립했다. 창건 직후부터 천마산대는 의주·삭주·구성·창성군 일대에서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습격 파괴와 일경 및 친일분자 처단 활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675) 또한 3월 초에 평북 의주군 월화면에서는 만주 관전현을 다녀온 金東植이 大朝鮮靑年決死隊를 조직하여 군자금 수취 활동에 주력했는데, 5월 하순에 총기 획득을 계기로 조직을 확대시켜 大朝鮮獨立普合團으로 개칭하고 무장활동에 돌입하였다.676)

 4월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주민 중심의 비밀결사인 獨立團 決死隊가 조직되어, 임시정부군의 국내진입시 일본군과 교전하며 길 안내를 할 것, 사직 권고에 불응하는 관공리를 처단할 것 등을 계획하고 활동에 들어갔다.677) 5월에는 평북 구성에서 大韓民族自決國民會가 조직되어, 연통제 조직인 平北督辦部와 기맥상통으로 경찰관습격대 및 암살단 보호·원조, 총기 소재 및 친일자 조사 등의 목적 아래 활동을 개시하였다.678) 평남 진남포에서도 5월 경에 임시정부 운동기관의 하나로 國民會가 결성되어, 군자금 수합과 관공리 살해, 관청 파괴 등의 무력투쟁 방침을 세웠다.679)

 이들 국내 자생단체는 활동 개시 후 얼마 못가서 일경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조직이 파괴되었지만,680) 그럼에도 서북지방에서는 무장대의 지방관서 습격 및 파괴·방화와 관공리·친일유지 암살사건이 1919년 말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의열·준의열 투쟁의 기세가 고조되고 있음을 웅변해 주는 사건들이었는데,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19년 12월 23일, 평북 용천군 읍동면의 친일유지 崔時傑이 대한독립단 국내특파원 白雲翰·李明瑞 등 4인에 의해 거소에서 사살됨(金厚卿,≪大韓獨立運動功勳史≫, 光復出版社, 1984, 595쪽).

② 1920년 3월 15일, 평북 선천군 태산면사무소가 대한독립단 국내특파원 3명에 피습되고 면장 金炳駿과 서기 金殷基가 총살됨(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朝鮮三, 東京:みすず書房, 1977, 419·430쪽;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 大韓民國公報處, 1949, 56쪽).

③ 3월 15일, 평북 의주경찰서의 순사 金明翼이 대한독립단원에 의해 거소에서 총살됨(위와 같음).

④ 3월 20일, 의주군 고관면 동상동의 전 신의주경찰서 형사 洪世憲의 집에 무장대원 2명이 들이닥쳐 권총으로 저격, 중상을 입힘(姜德相 編, 위의 책, 422∼423쪽;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Ⅰ-分冊, 309쪽).

⑤ 5월 7일, 의주군 고관면 서하동의 친일부호 白成植이 무장대 3명에 의해 총살됨(姜德相 編, 위의 책, 439쪽).

⑥ 6월 4일, 평북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의 경찰관주재소를 호굴독립단원 8, 9명이 습격하여 순사 洪明根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순사 吳泰鳳을 사살함(金正明 編, 앞의 책, 434쪽).

⑦ 6월 8일, 평북 벽동경찰서 삼서주재소의 악질 순사 文治朝가 광복군총영 암살대원에 의해 거소에서 사살됨(蔡根植, 앞의 책, 62쪽).

⑧ 6월 10일, 평북 창성군 대창면사무소에 천마산대 대원 3명이 내습하여 면장 姜昌憲을 사살함(姜德相 編, 앞의 책, 460쪽;蔡根植, 위의 책, 65쪽).

⑨ 6월 25일, 벽동군 학회면 학하리의 경찰관주재소에 광복군총영 대원 8명이 내습하여 일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방화하여 전소시킴(姜德相 編, 위의 책, 469쪽;蔡根植, 위의 책, 62쪽).

⑩ 7월 2일, 의주군 고령삭면의 洪應濂이 대원 밀고 혐의로 천마산대에 처단됨(≪東亞日報≫, 1924년 11월 12일).

⑪ 7월 3일, 의주군 고령삭면 대하동의 吳王漣이 무장대 6명에 의해 총살됨(姜德相 編, 앞의 책, 473쪽).

⑫ 7월 8일, 의주군 월하면 화하동의 친일파 崔學貞이 천마산대에 의해 총살됨(≪東亞日報≫, 1924년 11월 12일).

⑬ 7월 29일, 삭주군 외남면사무소를 신원불명자 2명이 습격하여 서류와 비품들을 소각한 후 만석동 구장 崔之鉉을 찾아가 사살함(姜德相 編, 앞의 책, 487쪽).

⑭ 8월 15일, 황해도 은율군에서 군수 崔丙赫과 부호 高學倫이 九月山隊 대원 10명에 의해 거소에서 사살됨(姜德相 編, 위의 책, 492·498∼500·511쪽). 구월산대는 대한독립단이 특파한 이명서 등의 암살단이 황해도 송화군 구월산에서 결성한 무장단체로,681) 그 후 10월 말에 대원 다수가 일경에 피체되기까지 순사 저격, 밀정 척살, 군자금 징수 등의 활동을 계속 벌여나갔다(姜德相 編, 위의 책, 558쪽).

⑮ 9월 1일, 평북 후창군수 桂膺奎가 西路軍政署의 특파 암살단원 李昌德과 李宗植에 의해 거소에서 총살됨.682) 그 후 이창덕이 金成辰의 밀고로 피체, 사형되자 이종식 등 다른 단원 6명이 10월 3일에 김성진을 사살함(김용국 외, ≪獨立運動史≫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390쪽).

(16) 9월 10일, 의주군 옥상면장 金麟書와 옥상면 상목동의 손꼽히는 친일자 李俊炯이 무장대 4명에 의해 총살됨(姜德相 編, 앞의 책, 501쪽)

(17) 9월 16일, 평북 선천군 산면 용경동의 金洛範이 군자금 제공에 불응하여 피살됨(위와 같음).

(18) 9월 26일에 평북 철산군 서림면 양책주재소 순사 宋龍範이, 9월 29일에 의주군 비현면의 친일파 張某와 순사 文致武가 보합단원에 사살됨(姜德相 編, 위의 책, 507∼508·529∼530쪽).

 이상과 같은 습격·척살 사건들로 서북지방의 일제 통치기관은 치명타를 입었고, 친일 협력자들의 행동은 크게 위축·제어되었다. 평북 일원에서는 관공리와 친일분자들이 경찰의 보호 없이는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여러 군에서 면장과 면서기가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아 면사무소 업무가 중단되었으며, 조선인 형사 중에도 사직자가 나오고 부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일도 속출했다.683)

 서북 변경지대를 중심으로 무장대 의열투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서울과 지방도시에서는 대규모 투탄거사 계획이 1920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수차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는 8, 9월에 집중적으로 실행되어 대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먼저, 유하현 대황구의 大韓獨立臨時軍政府 특파원 李根洙·康聲利 등이 1920년 3월 초에 평양으로 들어와 군자금 수취와 관청 파괴, 관공리 암살을 계획하고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해 폭탄을 제조하다가 5월에 피검되었다.684) 대구에서는 조선인 관공리 습격을 밀의하고 폭탄을 손에 넣으려던 농민 梁韓緯 등 여러 명이 6월 하순에 경찰에 체포되었다.685) 이어서 7월 말에 의열단의 ‘밀양폭탄사건’ 적발 및 수사 결과가 상세히 보도되어 그 대담한 거사계획이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9월 14일에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의거가 있었다.

 이에 앞서 5월 초에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 42명이 8월에 극동지방을 시찰할 때 한반도를 방문한다는 것이 보도되어 국내외 의열단체와 지사들이 매우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이 기회에 “독립에 대한 조선민족의 대결심을 내보임과 함께 민심을 격동시켜 독립 실현을 촉진시키고자”686) 대대적인 폭탄거사를 실행하려는 계획이 크게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한 갈래는 옛 광복단 계열 운동자들의 거사계획이었고, 다른 한 갈래는 서간도의 광복군총영과 상해 의용단 국내 지단과의 합작거사계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전자는 실행에 실패했고 후자는 대부분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다.

 전자의 거사계획은 광복단-대한광복회원이었다가 상해로 망명해 있던 韓焄이 임시정부의 李東輝·이시영·申翼熙 등으로부터 폭탄 10개와 권총 40정을 제공받아 광복단 결사대장을 자처하고 1920년 3월에 다시 국내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입경 후 8월 10일에 北路軍政署 특파원 金東淳과의 제휴로 暗殺團을 조직한 옛 동지 金相玉을 만나 같이 행동할 것을 약정했다. 양인은 미국 의원단의 입경 예정일인 8월 24일을 기하여 출영 일본인 고관들을 암살하는 등의 일대 거사를 벌이기로 합의하고 극비리에 준비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8월 23일에 특별경계령을 내리고서 벌인 일경의 예비검속에 걸려 한훈과 다수 동지들이 피체됨으로써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687)

 후자의 거사계획은 국내 암살파괴공작의 총지휘 임무를 수행토록 대한광복군사령부 예하의 특별기관으로 1920년 6월에 설치된 光復軍總營(영장 吳東振)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대원 13명이 3개의 결사대로 나뉘어 국내로 밀파되었다.

 서울거사 임무를 부여받은 결사대 제1지대(金榮哲·金聖澤·金最明)는 포목상으로 위장하고 남하하여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도중에 그들은 친일주구로 악명 높은 평북 慈城郡守와 황해도 長淵郡守를 사살 처단하였다. 3인 대원은 총독부·서울역·종로경찰서를 폭파하려 했으나, 8월 21일 회식 장소를 급습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688)

 평양거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제2지대 5명은 평남 안주에서 검문하는 일인 경부를 사살한 후 평양 시내로의 잠입에 성공했다. 서로 임무를 분담한 뒤에 그들은 8월 3일 밤에 일제히 거사를 단행하였다. 文一民·禹德善·安敬信이 평남경찰부(평남 제3부라고도 함)에 던진 폭탄은 그대로 폭발하여 청사를 대파시켰다. 그러나 張德震과 朴泰烈이 평양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도화선이 빗물에 젖어 불발하였다.689) 평양거사에는 의용단 평양지단 단원들도 동참하여 투탄행동에 같이 나섰는데, 呂行烈과 表永俊이 평양부청에 던진 폭탄은 불발했으나 金禮鎭과 金孝錄이 평남도청에 던진 폭탄은 신청사 일부를 파괴시켰다.690)

 결사대 제3지대의 평북 선천 방면 특파원 3인(林龍日·李學弼·金應植)은 만주 본부로부터의 폭탄 반입이 지연됨으로써 8월 24일의 선천역·선천경찰서 투탄계획을 실행치 못하였다. 뒤늦게 폭탄을 수령한 후 9월 1일 밤에 그들은 선천군청 지적도 창고에 폭탄을 던졌는데 불발이었고, 현지에서 행동대원으로 포섭된 학생 朴治毅가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청사 일부를 파괴시키고 격문과 경고문을 살포했다.691) 제3지대의 신의주 방면 특파원인 李振武와 鄭仁福은 8월 15일에 신의주역에 투탄하여 대합실을 파괴했다.692)

 이들 거사의 여진은 9월 18일 農民團의 평남 강동경찰서 투탄으로 이어졌다. 이 거사로 유리창 일부가 파손되고 일경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농민단은 군내 청년층 농민, 탄광부, 금융조합 소사 등 10여 명이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전달하고자 8월 초에 결성한 비밀결사였는데, 우선 민심을 격동시킬 필요에서 관공서를 파괴키로 하고 탄광용 다이너마이트로 폭탄을 만들어 던진 것이었다.693) 뒤이어 10월에는 평남 안주에서 경찰서 및 읍내 부호가에 투척키 위해 폭탄을 제조해 두고 있던 康龜年과 徐光憲이 피체되었다.694)

 1920년의 평안도지방 의열투쟁의 열기는 이듬해 초에 함경남도로 파급되었다. 1921년 1월 18일에 풍산군 안수면의 부호 金丙善과 廉相漢이 처살되었는데, 이는 임시정부의 함남교통국 조직과 연관된 거사로 추정된다.695) 이어서 2월 4일에는 갑산군 운흥면에서 관내 순시중이던 군청 서무주임과 면장, 면서기가 3명의 무장대에 피습당해 면장이 즉사하고 군서기가 부상을 입은 사건도 있었다.696)

666)≪東亞日報≫, 1921년 1월 21일·3월 5일.

김용국 외,≪독립운동사≫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265∼270쪽.

金厚卿,≪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光復出版社, 1984), 927∼929쪽.
667)문상직은 대구에서 암약하다 1920년 2월에 피검되었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Ⅰ-分冊, 東京:原書房, 1967, 302∼303쪽;朝鮮總督府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 1934, 266∼267쪽).
668)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9), 57∼58쪽.
669)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403쪽.
67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1976), 576∼621쪽. 현장을 빠져나가 재거사의 기회를 노리던 강우규는 警部 金泰錫의 집요한 추적으로 피체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그 해 11월에 순국하였다.
671)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朝鮮 三(東京:みすず書房, 1977), 536∼537쪽.
672)≪東亞日報≫, 1920년 6월 4·15·17·26일, 10월 21·28일, 11월 23일.

김용국 외, 앞의 책, 391∼401쪽.
673)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Ⅰ-分冊, 451∼455쪽.
67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12∼513쪽. 이상은 김석황이 1920년 9월에 만주 奉天에서 피체되어 드러난 사실들이다.
675)朴杰淳,<1920年代初 國內 武裝鬪爭團體의 活動과 推移>(≪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287∼292쪽.
676)朴杰淳, 위의 글, 309쪽.
677)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39∼540쪽.
678)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95∼496쪽.
679)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74∼475쪽.
680)독립단 결사대는 1920년 11월에, 대한민족자결국민회는 동년 9월에, 진남포 국민회는 동년 7월에, 일경의 검거망 가동으로 조직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천마산대는 일군의 추적과 탄압으로 본거지를 수차 옮겨다니면서도 光復軍總營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으며 꾸준히 활동을 전개였고, 1922년 남만주의 독립군단 통합으로 統義府가 발족하자 그 의용군 제3중대로 편입되었다(朴杰淳, 앞의 글, 297∼299쪽).
681)金承學,≪韓國獨立史≫(獨立文化社, 1967), 251쪽.
682)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02쪽.

宋相燾,≪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1971), 296∼297쪽.
683)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Ⅰ-分冊, 1967, 319∼320쪽.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みすず書房, 1970, 618∼619쪽.

≪東亞日報≫, 1920년 8월 18일.
68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47쪽.
685)朝鮮總督府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 269∼270쪽.
686)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98쪽.
68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06∼111쪽.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02∼505쪽.
688)김용국 외, 앞의 책, 323∼324쪽.
689)김용국 외, 위의 책, 325∼326쪽.

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87쪽.

宋相燾, 앞의 책, 294쪽.
690)宋相燾, 위의 책, 292∼293쪽.

金厚卿, 앞의 책, 702∼703·1086쪽.
691)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497∼498쪽.

宋相燾, 위의 책, 296쪽. 박치의는 사건 직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이듬해 9월에 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692)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 445쪽.

김용국 외, 앞의 책, 335∼336쪽.
693)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43∼54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19∼122쪽.
69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523쪽.
695)金度亨,<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친일파 처단과 의열투쟁>(한국근현대사학회 편,≪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206·212쪽.
696)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Ⅰ-分冊, 51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