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6. 학생운동4) 6·10학생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1) 신문화건설, 실력양성론의 대두
            • (2) 청년회 운동
            • (3) 학교설립운동
              • 가. 학교설립운동의 배경
              • 나. 각종 학교 설립운동
              • 다. 야학과 강습소의 개설
            • (4) 물산장려운동
              • 가. 물산장려운동의 배경
              • 나.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 2) 1920년대 중후반 자치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 세력의 분화
            • (1) 자치운동론 대두의 배경
            • (2) 자치운동의 전개
            • (3) 자치론과 반자치론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1) 사회주의사상의 도입
            • (1) 사회주의사상의 국내 도입과 수용
            • (2) 국외 전위정당의 결성과 활동
          • 2) 국내 무산계급 운동의 성장
            • (1)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
            • (2) 꼬르뷰로 국내부와 화요파의 성립
            • (3) 오르그뷰로와 ‘13인회’
            • (4) 화요파와 민중운동자대회
          • 3) 조선공산당의 창건
            • (1) 조선공산당 1차당대회
            • (2) 조선공산당의 활동과 코민테른의<1925년 9월 15일 결정>
            • (3) ‘1·2차 조선공산당사건’과 조선공산당 2차당대회
            • (4) 조선공산당 3차당대회와 정치노선
          • 4)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당재건운동
            • (1) 조선공산당의 해체와<12월테제>·<9월테제>
            • (2) 1920년대 말 당재건운동
              • 가. ‘서상파’의 당재건운동
              • 나. ‘ML파’의 당재건운동
              • 다. 화요파의 당재건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1)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 2) 해외의 6·10만세운동 계획과 추진
          • 3)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 4)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 5) 만세시위의 전개와 성격
            • (1) 서울의 만세운동
            • (2)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
          • 6) 6·10만세운동의 이념
          • 7) 6·10만세운동과 그 영향
        • 2. 신간회운동
          • 1) 창립 배경
          • 2) 신간회의 창립
            • (1)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운동론
          • 3) 복대표대회와 신간회의 정비
            • (1) 복대표대회 개최와 규약 개정
            • (2) 복대표대회 선출 간부진의 성격
          • 4) 지회의 설립과 활동
            • (1) 지회의 설립
            • (2) 지회의 성격과 활동
              • 가. 지회의 조직문제
              • 나. 사회적·정치적 정책과 활동
          • 5) 신간회의 해소
            • (1) 신간회 해소론
            • (2) 신간회지회의 해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1) 일제시기 농민운동의 성격
          • 2) 일제의 농업정책과 한국 농민의 처지
          • 3) 농민운동 조직의 발전
          • 4) 농민운동의 전개
            • (1) 1920년대 전반기
              • 가. 암태도 소작쟁의
              • 나. 황해도 북률 동척농장 소작쟁의
            • (2)1920년대 후반기
              • 가. 전북 옥구군 이엽사농장 소작쟁의
              • 나. 용천 불이 서선농장 소작쟁의
              • 다. 갑산 화전민 항쟁
              • 라. 수리조합 반대운동
          • 5) 1920년대 농민운동의 특징
        • 2. 노동운동
          • 1) 노동운동 전개의 배경
            • (1) 노동자계급의 상태
            • (2) 사회주의의 보급
          • 2) 노동조합의 조직
            • (1) 전국적 노동조합
              • 가. 조선노동공제회
              • 나. 조선노동대회
              • 다. 조선노동연맹회
              • 라. 조선노농총동맹
              • 마. 조선노동총동맹
            • (2) 지방 노동조합의 조직
              • 가. 지역 합동노동조합과 직업별 노동조합
              • 나. 직업별 노동조합의 지역연맹체와 전국적 연맹체
            • (3) 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
          • 3) 노동조합의 조직 내 사업과 공장 내 활동
          • 4) 노동조합의 후생복지 사업 및 소비자운동
          • 5) 노동조합의 작업부와 생산조합의 조직
          • 6) 노동조합의 문화활동
            • (1) 노동자 교육활동
            • (2) 언론·출판 활동
            • (3) 연예·체육 활동
            • (4) 봉건적 사회제도·문화 타파운동
          • 7) 노동조합의 국내적·국제적 연대
            • (1) 국내에서의 민족·민중 연대
            • (2)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동지적 연대
          • 8)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 (1) 1920년대 전반기 파업투쟁
            • (2)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
            • (3) 1929년의 원산총파업
        • 3. 여성운동
          • 1) 국내외 항일여성운동
            • (1) 국내 항일여성운동
            • (2) 해외 항일여성운동
          • 2) 한국여성운동의 확대와 발전
            • (1) 서울의 여성계몽교육운동
            • (2) 지방의 여성계몽교육운동
            • (3) 기독교 여성의 여성운동: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와 조선여자
          • 3) 여성 경제의식 성장과 경제자립운동
            • (1) 부녀들의 조선물산장려운동
            • (2) 여성의 경제적 자립활동
          • 4)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두와 확대
            • (1) 조선여성동우회의 조직과 활동
            • (2)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
            • (3)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방 확대
          • 5) 근우회의 조직과 활동
            • (1) 근우회 조직의 배경
            • (2) 근우회의 창립과 이념
              • 가. 근우회의 창립
              • 나. 근우회의 이념:강령과 선언문
            • (3) 근우회 활동과 그 성격
              • 가. 강연회·토론회
              • 나. 야유회·체육대회·척사대회
              • 다. 기술강습회
              • 라. 음악회
              • 마. 야학
            • (4) 근우회의 해소
        • 4. 형평운동
          • 1) 형평사의 창립배경
          • 2) 형평사의 창립
            • (1) 형평사의 창립 과정
            • (2) 형평사 창립에 대한 사회의 반응
          • 3) 형평사의 분열과 그 극복
            • (1) 형평혁신동맹의 창립
            • (2)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로의 합동
          • 4) 형평사의 조직
            • (1) 중앙본부의 조직
            • (2) 지분사의 조직
            • (3) 형평사 조직의 확대
            • (4) 하위단체의 조직과 활동
              • 가. 형평청년회
              • 나. 정위단
              • 다. 형평학우회
              • 라. 형평여성회
          • 5) 형평사의 활동
            • (1) 차별철폐와 인권신장운동
            • (2) 생활생존권 수호운동
            • (3) 형평사원의 교육과 계몽활동
            • (4) 지방순회 활동
            • (5) 상호부조활동
          • 6) 형평사의 해소
            • (1) 사회주의운동계의 방향전환론
            • (2) 형평사내 급진·온건파의 갈등
              • 가. 형평사 조직개편과 신강령의 채택
              • 나. 형평청년총연맹의 해체
            • (3) 형평사 해소론의 대두
            • (4)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과 형평사의 종언
        • 5. 청년운동
          • 1) 청년운동의 발생배경
            • (1) 청년의 역사적 등장
            • (2) 청년단체의 출현
            • (3) 조선청년의 현실
          • 2)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초기 청년단체의 활동
            • (1)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과 ‘문화운동’
              • 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
              • 나. 청년회연합회의 활동과 ‘문화운동’
            • (2)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 가. 초기 청년단체의 창립과정과 조직구성
              • 나.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 3) 조선청년총동맹과 청년운동의 조직적 진출
            • (1) 전조선청년당대회와 청년운동의 분화
              • 가. 전조선청년당대회
              • 나. 청년운동의 분화
            • (2)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과 ‘무산계급 청년단체’의 확산
              • 가.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
              • 나. 조선청년총동맹의 청년운동 방침
              • 다. 무산계급 청년단체의 확산
            • (3)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 4) 청년운동의 방향전환과 민족협동전선
            • (1) 조선청년총동맹의 ‘신운동방침’
              • 가. 청년운동의 방향전환
              • 나. 조선청년총동맹의 ‘신운동방침’
              • 다.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
            • (2)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 5) 고려공산청년회와 사회주의 청년운동
            • (1)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출현
            • (2)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과 조직 변화
            • (3) 고려공산청년회의 청년운동 방침과 주요 활동
              • 가. 민족문제 인식
              • 나. 공산대학에 학생파견과 공청학교 경영(계획)
              • 다. 조직방침 논쟁
              • 라. 연령제한 논쟁
              • 마. 학생운동 지도
              • 바.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6) 조선총독부의 청년단체에 대한 대책
            • (1) 조선총독부의 청년단체 지도방침
            • (2) ‘중견청년’의 양성
        • 6. 학생운동
          • 1) 일제하 학생운동의 배경
            • (1) 근대학생운동의 본질
            • (2) 일제하 한국학생운동의 성격
          • 2) 1920년대 이전의 학생운동
            • (1) 개화·애국계몽운동기의 학생운동
            • (2) 2·8학생운동
            • (3) 3·1운동과 3·5학생운동
          • 3) 1920년대 학생운동의 기저
            • (1) 학생단체
            • (2) 동맹휴학
          • 4) 6·10학생운동
            • (1) 6·10학생운동의 사회적 배경
            • (2) 6·10학생운동의 추진
            • (3) 6·10학생운동의 전개
          • 5) 광주학생운동
            • (1) 광주학생운동의 사회적 배경
            • (2)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 (3)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3) 6·10학생운동의 전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이했다. 돈화문 앞에서 홍릉까지 도열한 30만의 봉도인원중 학생(보통학교 6학년 이상으로 제한)만도 약 2만 4,000여 명이나 되었고 5,000명의 군대와 2,000명 이상의 정사복 경찰이 경계를 담당한 가운데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항일만세시위는 오전 8시 30분경 대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떄 중앙고등보통학교학생 30∼40명이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격문 1,000여 매를 살포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니 근처에 도열한 민중들도 이에 동조하여 함께 만세를 고창했다. 이와 같은 소란 속에 현장에서 학생 30∼40명이 일제군경에게 체포당하였으나 만세시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오전 8시 45분 경:관수교 부근, 연희전문학교학생 50여 명이 독립만세고창과 격문살포, 보성전문학교생 동조, 일반민중 가세, 현장에서 주동학생 이병립·이천진·박하균 등 체포당함. 오전 9시 30분 경: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 YMCA생 박두종 외 2명이 독립만세와 격문 150매 살포. 오후 1시 경:훈련원 부근, 학생 1명이 독립만세와 격문살포. 오후 1시 30분 경:동대문 근처,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독립만세와 격문살포. 오후 2시 경:신설동 부근, 학생 1명이 독립만세와 격문 100매 살포. 오후 2시 20분 경:동묘 부근, 중앙고등보통학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 독립만세와 격문 700매 살포.820)

 이와 같이 학생들이 계획한 항일독립만세시위는 실행되었다. 그러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던 일군경에 의하여 제지당하고 또 체포되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운동으로 일제 당국자들을 놀라게 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다시 한번 심어주었으며,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를 나타내었다.

 학생만세시위운동 중 민중을 크게 격동시킨 곳은 사범학교 앞인데,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자 그곳에 모여 있던 민중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당황한 일군경이 총탄을 난사하면서 진압에 나서고 학생과 군중이 한꺼번에 도피하는 바람에 사범학교 벽돌담이 무너지고 부근의 상점들이 파괴되었으며, 구경나왔던 일인 고관부인이 부상을 당하고 민중 속에서도 부상자가 나오는 등 불상사가 있었다.821)

 6·10학생운동으로 일경에게 검거된 수는 종로서에 150명, 동대문서에 50명, 본정서에 10여 명, 합계 210여 명이나 되었고, 전국 각 지방의 동요에 따라 1,000여 명의 학생이 체포당하였다. 이와 같이 체포된 학생 중에서 취조를 받은 학생이 106명이었고, 그 뒤 6월 12일에는 90명, 14일에는 47명만이 수감되었다.822) 한편 중앙고등보통학교생들은 교사 趙喆鎬와 함께 21명이 취조를 받고 그 중 6명이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823)

 학생만세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일경은 수감중인 학생들을 석방하고 그 중에서 11명만 제령 제7호 및<출판법>위반으로 같은 달 25일 기소하였다. 구속 기소된 학생은 11명이었지만, 학생들에 대한 일제 당국의 처사는 가혹하였다. 총독부 학무당국은 7월 초 6·10학생운동으로 기소된 학생은 경성제국대학 입학불허방침을 발표하고, 각급 학교에 6·10학생운동에 관련된 학생에 대한 처벌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협성학교·중동학교에서는 각 7명, 중앙고등보통학교는 21명, 배재고등보통학교는 8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는 당시 사회 각계각층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로써 일제당국에 대한 비난이 비등하였다.

 같은 해 11월 2일 기소된 11명에 대한 공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되었다. 이때 재판장 강릉의 심문에서 학생들은 조금도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824)

이병립: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는 말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우리 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했다.

유면희: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거하려 했다.

박용규:4,000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 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의 진술과 같이 이들 젊은 학생들은 솔직담백한 태도와 기개로 잠재된 민족정신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제 검사는 이들 학생에게 무거운 형량을 구형하여 학업을 등지게 하였으니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의 일면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 11명의 명단과 형량은 다음<표 3>과 같다.825)

성 명 연령 본적 학 교 학년 학생단체 가입 형 량
이선호 24 경북 중앙고등보통학교 4 조선학생과학연구회집행위원 징역2년
이병립 강원 연희전문학교문과 2 조선학생총연합회집행위원 징역3년
박두종 함북 YMCA 영어과     징역2년
박하균 25 함남 연희전문학교문과 2  
이천진 23 경성제국대학예과 1 조선학생과학연구회집행위원
유면희 경북 중앙고등보통학교 4   징역1년
박용규 22 중앙고등보통학교 5   징역2년
곽대형 20 전북 중동학교특과 2  
김재문 22 중동학교특과 3  
황정환 중동학교특과 3  
이동환 27 중앙고등보통학교 5  

<표 3>학생운동 관련자 형량

 이들에 대한 변호는 13명의 변호사가 맡았다. 이때 姜世馨 변호사는 학생들이 양심에 의하여 행동하였고 솔직한 대답과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감안하여 벌을 주는 것보다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요지의 변론을 하였다.826) 같은 해 11월 17일 언도공판에서 박하균만 징역 1년을 나머지 10명은 5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담당검사인 長屋은 이 판결이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공소를 제기, 1927년 3월 25일 2심공판이 개정되었다. 이때에도 학생들의 태도와 결의는 변화가 없었다. 즉 이병립은 “1년 또 1년이 되어도 초지는 결불변”이라 하였고, 박하균은 “양심의 소신대로 만세를 호창하였다” 하였으며, 박두종은 “오직 인산 당일의 목적은 조선독립을 완수하자는 데 있다”라고 하였고, 이선호는 “지금도 마음은 변치 않았다”고 대답하였으며, 유면희는 “그날을 어떻게 기념할까 하였다” 하였고, 박용규·김재문은 “지금도 조선독립을 열망한다”라 하였고, 곽대형은 “아직도 조선독립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2심판결의 결과 형량은 무거워져 이선호·이병립·박두종·박하균·이천진·박용규·곽대형·김재문·황정환·이동환은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유면희만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았다.827)

 6·10학생운동이 학생들의 뜻한 바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자 제2의 6·10학생운동이 계획되었다. 즉 시내 6개 고등보통학교학생 대표 수십 명이 서대문 피어선성경학원에 모여 거사계획을 토의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격문을 인쇄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다가 1926년 6월 16일 오후 2시 피어선학원생 劉載獻,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 金東鎭, YMCA 학원생 金東石 등 3명이 검거되고, 뒤를 이어 배재고보의 文昌模·孫盛華·廉弼柱·車鎭浩·金祚永·黃奎燮, 협성학교의 崔永植·孫秉錫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되도록 축소, 경미한 운동으로 취급하여 그 여파를 줄이는 방법을 취하여 같은 달 30일 기소유예처분으로 마무리지었다.828)

 6·10학생운동은 3·1운동 때와 같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서울에 국한되었으나 그래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적인 동요가 일어났다. 전라도의 고창·순창을 비롯하여 평안도의 정주·평양, 충청도의 홍성·공주 등지에서 동요가 있었고, 충청도 당진·홍성·강경,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하동, 함경도의 이원 등지의 학교에서는 동맹휴교로 일제와 대항하기도 하였다.829) 특히 전북 고창에서는 고창고등보통학교생 50여 명이 봉도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 운동을 전개, 일제에 대항하였다.830)

820)≪東亞日報≫, 1926년 6월 11·12일.

≪朝鮮日報≫, 1964년 4월 26일,<6·10만세사건>.
821) 중앙중고등학교, 阿部薰,≪朝鮮問題論集≫(1932), 388쪽.
822)≪東亞日報≫, 1926년 6월 16일. 수감된 학생들을 학교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희전문학교생(33명)

문과 3년:이권희·이은택·윤지련

문과 2년:김규봉·이금산·이광준·이병립·박안근·채우병

문과 1년:김세진·김영하·김윤근·박봉래·박영준·안태희·원종뢰·장홍식·홍명식

상과 2년:김근배·김낙기·김명진·김근·김대삼

상과 1년:김영소·장희창·이병철·안운정

학과학년미상:박락규·조대벽·최창일·김락식·김락기·김석영

중동학교:황정환·김재문·정대형·장길주·김인오·박선복

경성제대예과:이천진

신문배달부:외 1명

중앙기독청년학관:박두종 외 기타 4명
823)≪東亞日報≫, 1926년 6월 19일.

중앙중고등학교,≪중앙60년사≫, 133쪽. 취조 받은 학생들은 박용규·이동환·조홍제·김홍신·강연선·이규호·정수영·박객원·이홍영·김영환·정달영·김규정·계익선·이단종·안종운·박승태·박덕규·김장춘·정민환 등이었다.
824)≪東亞日報≫, 1926년 11월 3일.
825) 위와 같음.
826)≪東亞日報≫, 1927년 3월 26일.
827)≪東亞日報≫, 1927년 3월 26일.
828)≪東亞日報≫, 1926년 7월 1일.
829)≪東亞日報≫, 1926년 6월 12·13·14·16일.
830)≪東亞日報≫, 1926년 6월 12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