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제 정책과 경제 구조
경제 정책
고려 말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민생이 피폐했던 경험을 살려, 조선 초기에는 국력을 증진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 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처음부터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교의 왕도 정치 사상에서는 민생의 안정을 중요시하였고, 이를 위해서 농업을 진흥시키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조선 초기의 신진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중농 정책을 국가 산업 시책의 기본으로 삼아, 문란했던 고려 시대의 경제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농 정책으로 인해 토지 개간과 양전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5세기 중엽에는 경지 면적이 160여만 결에 이르고,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갖가지 새로운 농법이 개발되었다.
물화를 제조, 교역하는 수공업과 상업은 초기에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자유로운 활동이 억제되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고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폐단이 있다고 보아, 국가가 그 활동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한편, 유교적인 검약 생활로 인하여 물자의 소비가 많지 않았으며, 교통 수단이 미비되고 화폐의 유통이 부진하여 상공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다. 또, 자급 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대외 무역도 부진하였다. 교환 경제의 부진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지 못하였고, 다만 약간의 저화와 동전이 제조되어 포목, 미곡과 병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책은 16세기부터 상공업의 진흥으로 해이해졌다. 따라서, 국내 상공업과 대외 무역은 점차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해 갔다.
토지 제도
조선의 토지 제도는 고려 말의 사전 개혁에서 완성된 과전법에 그 기반을 두었다. 과전법은 고려 후기 이래로 누적된 토지 제도의 모순을 일단 해결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세족이 축적한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함으로써 조선 왕조를 건국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준 것이었다.
과전법에서의 모든 토지는, 국가가 수조권을 가지는 공전과 개인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준 사전으로 구분된다.
공전은, 원래는 대부분의 일반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민전을 국가가 징세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국가는 농민들에게 공전의 경작권을 보장해 주고, 이들로부터 조를 받았다.
사전에는 관리들에게 주는 과전,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 중앙 관부와 지방 관아에 지급된 공해전과 늠전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성균관, 4학, 향교에 소속된 학전, 사원에 소속된 사원전 등이 있었다. 공신전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되었는데, 받은 사람이 죽으면 국가에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수신전, 휼양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습되었다. 토지의 세습으로 인하여 신진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5세기 후반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이 실시되었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16세기 중엽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고, 관리들은 오직 녹봉만을 받게 되었다.
한편,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토지의 사유 관념이 확산됨에 따라 토지 소유는 점차 양반 지주 중심으로 보다 편중되어 갔다.
원래 각각의 토지에는 실제 소유자가 있었으며, 또한 수조율에서도 사전의 대부분은 병작 반수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양반 지주들의 대토지 집적 현상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강화시켰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과 병작 반수제에 입각한 지주제는 16세기에 직전제의 소멸과 함께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토지의 사유화는 양반 관료와 지방 토호들의 매매, 겸병, 개간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 제도
국가 재정을 위한 조세 제도는 전통적으로 조, 용, 조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즉,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 가호마다 부과되는 공납, 그리고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되는 역 등이 국가 재정의 기초였다.
조선 시대에 양인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양반, 중인 등은 관료라는 신분 때문에 신역을 법제적으로 면제받았다. 전세에 있어서도 소작농인 농민에게 그 조세가 전가되었으므로 지배층은 실제로 면세되었고, 오로지 농민만이 조세를 부담하였다.
전세는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의 10분의 1을 조세로 바치는 것이나, 15세기 중엽에는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법을 마련하여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 차등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농민의 부담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공납은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공납은 농민에게 전세보다 더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물품의 생산지가 바뀌면서 공물의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공물의 수납 과정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절차가 까다로웠기 때문에 온갖 폐단이 발생하였다.
조세는 모두 현물로 납부되었는데,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특히 평안도는 사신의 내왕이 잦은 곳이라 하여, 이 지역에서 받은 조세는 현지에서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쓰도록 하였다. 수납한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에 모아 두었다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해 한양의 용산과 서강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한편, 정남에게는 역의 의무가 있었다. 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위해 교대로 번상해야 하는 군역과, 1년 중 일정 기간 동안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요역이 있었다. 요역은 경작하는 토지 8결마다 한 사람씩 차출하며, 1년 중 동원 일수는 6일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임의로 징발되었다.
이처럼, 국가 재정은 농민이 바치는 전세, 공납, 역이 중심을 이루고, 그 밖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을 국가가 경영하여 얻은 수입과,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로 충당하였다. 국가는 수입의 일부를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 공공 행사비,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비,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농민 부담의 가중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조세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면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생산의 2분의 1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였다. 그리하여 나머지 2분의 1로 자신들의 생활과 생산에 재투자를 해야 하였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다.
그리고 공납제의 운영 과정에서 방납(防納)의 폐단이 생겨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에, 공납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되면 그 일족에게 대신 받는 족징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인징이 행해졌다. 이이와 유성룡 등은 이러한 공납에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공납을 쌀로 내게 하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군역이 요역화되면서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즉, 장기간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군역이 잡역 등으로 전환되자, 군역 담당자로 하여금 포를 납부하게 하여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행해졌다. 그러나 잡역이 가혹하여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고, 군적이 문란해짐에 따라 농민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졌다.
환곡제는 처음에는 어려운 처지의 농민을 구휼하기 위한 제도였다. 어려운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 주어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취지였으나, 후에는 고리대로 변하여 농민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써 각처에서는 유민이 발생하고,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무대로 하여 활약하던 임꺽정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