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 목적
히데요시가 출병한 목적은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있었지, 조선을 정벌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조선이 우리 군대를 저지함으로써 우리에게 항거하는 경우에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므로, 조선의 병사들은 우리 군대에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히는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인민을 살육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는 본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맨 처음 출병할 때 장수들에게 명하여 확실히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였다. 다만 도기공(陶器工) 같은 경우는 일본으로 데려와 그 업(業)에 종사하게 한 결과, 일본 도기업의 발달에 기여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조선으로 건너간 장수들의 대부분은 히데요시의 뜻을 명심하여 무익한 살육을 금지하고 사졸(士卒)들의 난폭함을 경계하였다. 지금 그중 눈에 띄는 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분로쿠(文祿) 원년 정월에 일본군이 바다를 건널 때 히데요시는 3항목의 금지령을 내려 이를 각 군(軍)에 배포하였다.
① 군의 기강을 난폭하게 어지럽히는 일.
② 방화하는 일.
③ 인민에 대해 불법을 저지르는 일.
(2) 같은 해 4월 20일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대구를 함락시켰는데, 시내에 인민들이 없는 것을 보고, 곧바로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팻말을 세우고, 인민을 소집하여 힘껏 그들의 사정을 살피고 위로하였다.
(3) 같은 해 4월 26일에 히데요시는 다시 선봉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힘껏 인민을 위로하고 확실히 사병들의 난폭한 행위를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4) 같은 해 5월 5일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경성에 입성하자 서로 이어서 성 밖으로 진을 옮기고, 사방의 성문에 방(榜)을 세워 인민을 안도(安堵)하게 하였다.
(5) 같은 해 5월 16일에 경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나고야(名護屋)에 도달하자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① 국왕의 안도를 꾀하고, ② 국내의 정치 방식을 신중히 하고, ③ 도피한 주민들의 귀환을 꾀하도록 하였다.
(6) 같은 해 6월 3일에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훈시하여, 인민을 안도시키고 조세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7)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황해도를 평정하였는데, 6월 5일에 방을 세워, 일본은 천하와 함께 태평(太平)을 향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세를 가볍게 하여 인민의 안도를 꾀할 것이라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당시 화산(花山)에 체류하고 있던 이정암(李廷馣)은 그 일기에 쓰기를, “일본군은 한 사람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집도 역시 불태우지 않았으며, 사람을 보면 농업에 힘쓸 것을 권고하였다.” 【『사류재집(四留齋集)』】 라고 하였다.
(8)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西生浦)에 있었는데 게이죠(慶長) 2년 정월 20일에 편지를 보내 여러 방면에 공문을 게시하여 경상좌도(慶尙左道) 인민의 안도를 꾀하였다.
(9) 같은 해 9월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경상과 전라의 각 도에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도피한 사민(士民)은 신속히 돌아와 농사에 힘쓰라고 공시하였다.
(10) 같은 해 11월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공원(恭原) 【칠원(漆原)인 듯】 , 함안(咸安), 창원(昌原), 의령(宜寧)의 네 군(郡) 안에 방문을 게시하여, ① 군내(郡內)의 주민들은 안심하고 살면서 오로지 농사에 힘쓰게 할 것, ② 만약 그 처자들이 일본군에게 잡혀간 사람이 있으면, 신고에 응하여 곧바로 석방하여 돌려보낼 것, ③ 설령 관인(官人)이라 할지라도 일본에 따르는 사람은 각 향읍(鄕邑)으로 돌려보내 안도하게 할 것 등의 사항들을 공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