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씨(閔氏) 일족이 권세를 쥐고 있던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
왕비 민씨(閔氏)는 즉 명성황후(明成皇后)로서, 이왕(李王)의 생모(生母)이다. 왕비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이 태왕 3년 3월에 왕비에 책봉되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인 운현궁(雲峴宮)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이때 나이 16세였다. 같은 왕 10년에 대원군이 나이가 들어 물러났을 때 국왕은 22세였고 왕비는 23세였으며, 이때부터 국왕은 중요한 정무를 친히 처리하였지만 그 정사(政事)는 왕비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또 민치록의 양아들인 민승호(閔升鎬) 【왕비의 사촌형제】 와 그의 아우인 민겸호(閔謙鎬) 등을 비롯하여, 민씨 일족은 높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그 세력이 강하였으며, 대원군이 해 놓은 대부분이 일들을 변경하였으며, 대원군의 일파를 모두 배척하였다. 그 때문에 대원군은 의기소침하여 기분이 좋지 않은 양상이 되었다. 따라서 두 파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민씨 일파는 개화주의(開化主義)의 정치를 행하였으며, 특히 외교관계는 옛날의 면모를 고쳐 일본 및 여러 외국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서로 교류하였으므로, 국가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민씨 일파가 권세를 떨친 것은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부터 같은 왕 32년 【메이지 28년】 에 왕비 민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으로, 이 기간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항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 태왕 11년 갑술년(甲戌年) 【메이지 7년, 서기 1874년】 2월 원자(元子) 【곧 이척(李拓) 전하이다.】 가 탄생하였다.
12년 을해년(乙亥年) 【메이지 8년, 서기 1875년】 3월 예전에 일본에 대해 강경한 외교를 담당하였던 전(前) 부산훈도(釜山訓導) 안동준(安東晙)이 효수(梟首)되었다.
8월 【양력 9월】 일본 군함이 강화도 부근의 포대(砲臺)에서 포격을 받았다.
13년 병자년(丙子年) 【메이지 9년, 서기 1876년】 2월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 의 저택에 방화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前) 병사(兵使) 신철균(申哲均)은 예전의 민승호(閔升鎬) 폭사(爆死) 사건과 함께 그 주모자라고 하여 주살되었다.
2월 【양력 2월】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조약】 가 체결되었다.
4월 【양력 6월】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하여, 일본에 보빙(報聘)하게 하였다.
17년 경진년(庚辰年) 【메이지 13년, 서기 1880년】 2월 수신사 김굉집(金宏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3월 【양력 4월】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와서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에 주재하였다.
같은 달 【양력 5월】 원산진(元山津)을 개항하였다. 【강화도조약의 결과】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영의정 이최응을 통리대신(統理大臣)으로 삼았다.
같은 달 대원군이 설치하였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였다.
18년 신사년(辛巳年) 【메이지 14년, 서기 1881년】 4월 신사(紳士) 조준영(趙準永), 박정양(朴定陽), 민종묵(閔種黙),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였다.
6월 군제(軍制)를 개혁하여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새로 장어영(壯禦營), 무위영(武衛營)의 2영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따로 백여 명의 병력으로 신식(新式) 부대 하나를 설치하고, 일본에서 육군 중위(中尉) 호리모토 레이죠(堀本禮造)를 초빙하여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10월 안기영(安驥泳), 임정호(任鼎鎬) 등이 반역을 꾀하여, 왕의 서형(庶兄) 이재선(李載先)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을 추대하려고 하였다. 사건이 드러나자 안기영, 임정호 등은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하고 이재선은 사약을 받았다.
19년 임오년(壬午年) 【메이지 15년, 서기 1882년】 4월 【양력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6월 【양력 7월】 훈국(訓局)이 병란(兵亂)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도 역시 난민들에게 습격당하였다.
같은 달 【양력 7월】 대원군은 조정에 다시 들어와 국정을 돌보았으며, 예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영(營) 및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7월 【양력 8월】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8월 【양력 8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와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이 수행원이었다.
같은 달 【양력 9월】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었다. 청나라는 이것으로 조선과 종속(宗屬) 관계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12월 통리군국기무아문(統理軍國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청나라 사람 왕석창(王錫鬯)을 참의(參議)로 삼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설치하고, 독일인 멜렌도르프를 협판(協辦)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조선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 모두 청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20년 계미년(癸未年) 【메이지 16년, 서기 1883년】 2월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였다.
5월 【양력 6월】 인천(仁川)을 개항하였다.
10월 【양력 11월】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달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1년 갑신년(甲申年) 【메이지 17년, 서기 1884년】 2월 멜렌도르프를 전환국 총판(總辨)으로 삼고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하였다.
3월 우정국(郵征局)을 설립하고 홍영식(洪英植)을 총판으로 삼았다.
윤5월 【양력 6월】 이탈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달 【양력 7월】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 【양력 12월】 김옥균 등이 개혁을 기도하였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1월 【양력 이듬해 1월】 일본과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22년 을유년(乙酉年) 【메이지 18년, 서기 1885년】 2월 【양력 4월】 영국 함대가 갑자기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였다.
3월 【양력 4월】 일본과 청나라 양국 간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이루어졌다.
7월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삼아, 청나라가 파견한 관원들과 백두산의 경계를 상의하게 하였다.
8월 대원군이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서 돌아왔다.
23년 병술년(丙戌年)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3월 미국인 데니(Denny)를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삼고, 외무장교사(外務掌交司)를 겸직하게 하여 멜렌도르프를 대신하게 하였다.
4월 【양력 6월】 회령부(會寧府)를 개항장(開港場)으로 삼았다.
5월 【양력 6월】 프랑스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4년 정해년(丁亥年) 【메이지 20년, 서기 1887년】 2월 【양력 2월】 영국 함대가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25년 무자년(戊子年) 【메이지 21년, 서기 1888년】 7월 영국 기사(技士) 할리팍스가 전선(電線)을 가설하였다.
26년 을축년(乙丑年) 【메이지 22년, 서기 1889년】 11월 함경감사(咸鏡監司) 조병식(趙秉式)이 명을 발령하여 곡물의 수출을 금지하였다.
27년 경인년(庚寅年) 【메이지 23년, 서기 1890년】 1월 함경감사는 3등(等) 월봉(越俸)의 처벌을 받았다. 이어서 충청도 감사로 전근되었다.
윤2월 내무협판 데니는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여전히 계속 고용되었다.
29년 임진년(壬辰年) 【메이지 25년, 서기 1892년】 3월 함경감사 이원일(李源逸)의 지나친 폭압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5월 【양력 6월】 오스트리아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1월 회령부(會寧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30년 계사년(癸巳年) 【메이지 26년, 서기 1893년】 3월 양호(兩湖)에 동학당(東學黨)이 창궐하였다. 이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았다.
8월 이 달 이후로 재령(載寧), 중화(中和), 개성(開城) 등의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31년 갑오년(甲午年) 【메이지 27년, 서기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학정(虐政)을 견디지 못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며, 동학당의 우두머리 전봉준(全琫準)이 이에 가담하여 난을 일으켰다.
같은 달 자객(刺客) 홍종우(洪鍾宇)는 김옥균을 상해(上海)로 유인하여 암살하였다.
4월 김해부(金海府)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
5월 【양력 6월】 청나라는 군대를 아산(牙山)에 보냈으며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이 사실을 일본에 통지하였다.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였으며 일본 군대는 인천에서 경성(京城)으로 들어갔다.
6월 【양력 7월】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는 개혁 5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국왕은 위원(委員)을 두어 그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같은 달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는 군대를 이끌고 왕성(王城)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궁중에 들어가 국정을 살폈다. 한국 조정은 일본군에게 아산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도록 요청하였다.
같은 달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7월 【양력 8월】 일본과 청나라는 선전(宣戰)을 포고하였다.
10월 법무협판(法務協辨) 김학우(金鶴羽)가 암살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은 궁중을 떠나 공덕리(孔德里)로 물러났다.
32년 을미년(乙未年) 【메이지 28년, 서기 1895년】 3월 【양력 4월】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이 사랑한 손자 이준용(李埈鎔)이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되었다. 예전에 김학우 암살에 관계하였기 때문이다.
8월 【양력 10월】 대원군은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다. 이 변란으로 왕후 민씨(閔氏)가 목숨을 잃었다. 왕후에게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무(光武) 원년 【메이지 30년】 에 황후(皇后)로 추책(追冊)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