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을 물리치고 일본의 국서(國書)를 거절함으로써 여전히 쇄국의 방침을 고수하였는데,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말에 대원군이 정계를 은퇴함에 따라 민씨 일파는 대원군과 반대의 방침을 취하였으며, 국외 사정에 밝은 박규수(朴珪壽), 민규호(閔奎鎬) 등이 중용되자 정부의 방침은 점차 개국(開國)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강화도 사건을 기회로 메이지 9년에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조선의 쇄국 방침은 완전히 파괴되기었다. 지금 그 전말(顚末)을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메이지(明治) 8년 【이 태왕 12년】 9월 12일에, 운요함(雲揚艦)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만선(滿鮮) 연해(沿海) 조사의 명을 받고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10일에 경기도 연안(沿岸)에 왔다. 20일에 강화도 동남쪽의 한 작은 섬인 난지도(蘭芝島)의 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땔감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함장 이하 십 수 명이 국기를 내걸고 단정(端艇)에 올라타고 한강의 수로(水路)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강화도의 남단인 초지진(草芝鎭) 부근에 있는 섬의 포대(砲臺)에서 갑자기 그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우리 병사들은 그에 응하여 분전하였지만 때마침 비가 내렸고 또 수로를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함선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21일에 함장은 전날 당한 폭거를 되갚아 주려고 초지진 포대를 포격하고 22일에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운요함은 22일에 나가사키로 돌아왔으며 그 취지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의 불씨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이 보고를 받고 국론(國論)이 다시 들끓었다. 11월에 일본은 우선 청나라 주재 공사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로 하여금 조선의 불법을 꾸짖고 조선과 수호(修好)를 논의하자는 취지를 청나라 정부에 알리게 하였다. 이어서 구로다 키요다카(黑田淸隆)를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에,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특명전권변리부대신에 임명하여, 조선으로 가서 수년 이래 우리의 국서를 거절하는 이유와 이번의 운요함 포격의 사유를 조선 정부에게 따져 묻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육군 8백 명 및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을 이끌고, 9년 1월 하순에 경기도 연안에 도달하였으므로, 한국의 조정은 급히 바다의 방비를 엄격히 하였으며, 또한 신헌(申櫶)을 접견대관(接見大官)에,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부관(接見副官)에 임명하였다.【병자년 정월 5일, 양력 1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