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10. 강화도 사건과 임오 정변(壬午政變)비고(備考)제도의 개폐(改廢)와 청나라의 간섭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처음에 대원군은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켰으며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민씨가 세력을 잡는 시대가 되자 예전의 비변사에 상당하는 중요한 정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그 안에 7사(司)를 두었으며,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을 통리대신(統理大臣)으로 삼고, 그 밖에 정부의 중요 관리들을 그 직원으로 하여, 많은 개화파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이 태왕 17년, 메이지 13년】 또 같은 해에 대원군이 설치한 삼군부를 폐지하고, 이듬해에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2영으로 고쳤으며, 따로 신식(新式)의 한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이것들은 참으로 지혜롭고 용기 있는 조치였지만, 수구파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였으며 일반 인민들의 분노가 결국 폭발하여 임오정변(壬午政變)이 일어났다. 그 정변 과정에서 대원군은 중요 정무에 관여하였는데, 반대파가 설치한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영과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이 태왕 19년 6월, 메이지 15년】 그러나 청나라가 이 정변을 잘 마무리하려는 대책에 관여하면서, 한국 조정을 위해 알선(斡旋)할 기회를 잡고 새로운 태도로 조선을 대하였으며, 조선의 정치에 간섭을 시작하자, 조선은 다시 제도를 크게 바꾸었다. 같은 해 말에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처음에는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라고 불렀다.】 을 설치하고, 처음에 문무관(文武官)을 주로 영의정으로 삼던 것을 총리(總理), 판리협판(辦理協辨) 등의 관직에 임명하여, 청나라 정부가 추천한 청나라 사람 왕석창(王錫鬯)을 그 아문의 참의(參議)로 삼았으며, 【이듬해】 그와 동시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처음에는 통리아문(統理衙門)이라고 불렀다.】 을 설치하고, 마찬가지로 이홍장(李鴻章)이 추천한 독일인 멜렌도르프를 이 아문의 협판(協辨)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오장경(吳長慶), 다음에는 원세개(袁世凱)가 경성에 주차하여 국사를 감독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선은 내치와 외교에서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쳤으며, 【이 태왕 19년 12월】 5영(營)을 폐지하고 따로 좌·우·전·후의 4영으로 편제(編制)하여 청나라 군대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에 더하여 세관(稅關)에 관한 사무도 역시 이홍장의 부하인 로버트 하트 【Sir Robert Hart】 의 감독을 받아 처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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